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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Aug 02. 2020

나를 졸업하던 그 여름의 블루 아워

나를 찾아 다시 내게서 떠나는 시간...



’어딘가에서 잃어버린 나' 


달랑 이 문장 하나였다. 국내에선 심은경이 일본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을 수상해 화제가 됐지만, 저예산으로 만들어진(이 영화는 츠타야 크리에이터 프로젝트 지원 작품이다) '블루 아워'를 마음에 새겨놓은 건, 저 '촌스러운' 말 딱 하나 때문이었다. 지난 해 가을 초입, 여름이 아직 끝나지 않았던 도쿄에서 영화를 보려다 저 예고편의 문장을 만나버렸다. 돌이켜 보면 그리 멋있는 이야기도 아닌데, 그 말이 왜인지 남았다. 당시의 난 나오는 예고편마다 눈물을 흘릴 정도로 약해져 있기도 했으니... 그 말이 좀처럼 떠나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잃어버린 나' 세상에 어떤 말은 그 순간의 전부가 되기도 한다.


당시 보려고 기다리던 영화가 이케마츠 소스케의 '미야모토가 너에게', 그는 아마 내가 아는 가장 매력적인 '혼자'일지 모른다


영화는 도쿄로 상경해 영상 PD로 탄탄한 일상을 사는 주인공 스나다(카호)가 어쩌다 친구 키요우라(심은경)와 고향인 이바라키에 가게되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골동품 마니아인 아빠, 방에 틀어박힌 히키코모리 오빠, 산과 바다를 빼면 아무것도 없는 고향도 싫고, 실은 그냥 모든 게 싫어 떠나온 자신의 '어제'를 왜인지 다시 다녀오는 이야기다. 줄거리만 봐도 구도가 그려지는, 꿈과 희망, 그리고 '나밖에 없던 생활'에서 뒤늦게 알아차리는 어제와 내일로 나아가는 기승전결. 사실 이런 건 이제 별 다를 것도 없지만, 두 해 전 겨울 난 오래 전 살던 도쿄 미타카시의 1LK를 다녀왔던 적이 있다. 개발이 되어서인지 내가 알던 허름한 목조 건물 자리엔 못생긴 콘크리트 빌딩이 세워져 있었고, '어딘가에서 잃어버린 나'라는 건,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이 계절의 문장인지 모르겠다. 해가 지고 아침이 오기까지, 세상이 아직 잠들어 있는 사이 내게만 보이는 시간이 있다.


벌써 10여년 전,  어쩌면 거의 20년. 도쿄 미타카에 살던 무렵의 나. 왼쪽은 이타미에 놀러갔던 이른 겨울.


괜찮지만 괜찮지 않고, 잘 지내지만 잘 지내고 않고, 밥을 좋아하지만 빵을 먹어도 상관없고...인생은 언제부터인가 이런 패턴의 루프가 되어버린다. 생각해보면 꿈도, 하고싶은 일도, 먹고 싶은 것도 분명히 있었는데, 인생이란 삶을 그렇게 나두지 않는다. 세상의 대부분은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 투성이고, 상경이랄지, 직업이랄지 삶의 전반을 좌우할 포인트라도 지나고 나면, 돌이킬 수 없는 길목에 홀로 두고온 내가 외롭게 서있기도 한다. 나를 살고있지만 내가 아닌 하루가 쌓여가는 시절이, 언제부턴가 시작돼버렸다. 




영화 속 스나다(카호)는 겉으로 보기엔 잘 나가는 영상 PD다. 남자 친구와 원만한 동거 생활도 한다. 하지만 직장 내 유부남과 불륜 중이고, 동거남은 미소시루를 만들어 놓아도 토스터에 빵을 굽는다. 딱히 보이는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녀가 말하는 대부분의 '괜찮아'는 그렇지 않음을 외면한 말이기도 하다. 내일을 버텨내기 위함이고, 오늘을 흘려버리려는 일종의 '습관'같은 것이다. 영화엔 어린 시절 스나다가 자주 나타나  말을 걸어오고, 스나다는 그렇게 잠시 어제를 돌아보지만 어쩔 수 없이 내일은 살아야 한다.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일상이 오늘도 반복된다. 평온함으로 위장된 내가 아닌 나의 일상, 어느새 서른이다.


카호는 내가 알던 그녀의 연기 중 가장 입체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비중이나 연기나 왜 그녀가 주연상을 받지 못했을까(왜 심은경이 탔을까가 아니라) 아리송한데 그녀의, 그 피상의 현실이 균열을 일으키는 순간, 문제의 키요우라가 등장한다. 지난해 일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심은경의 키요우라가 나타난다. 그리고 그건 영화 '블루 아워'에서 가장 큰 사건이다.




별 일 없어 보이는 일상을 살아가는 '블루 아워'에 유일하게 숨쉬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건 평온함이라기 보다 불안, 따사한 봄자락이 아닌 연심 땀을 닦게 하는 치명적인 뙤약볕이다. 괜찮지 않지만 괜찮고, 세상 모든 게 싫지만 실은 내가 가장 싫고, 그런데도 어김없이 흘러가는 하루는 그저 아직 넘어지지 않았을 뿐, 언젠가 무너질 '오늘'이다. 불편한 관계를 이어가던 직장 상사 토가시(산타마리아 유스케)의 둘째 출산 소식을 알게된 날, 스나다의 시간은  끝내 부러지고 만다. 그 순간 영화는 그곳에 키요우라를 데려오는데, 다소 엉뚱하기까지 한 이 이질감이 영화에서 하나의 전환이 된다. 내가 아닌 나를 지우고, 다시 나를 바라보는 순간으로의 전환, 그리고 화해.


'블루 아워'는 나를 만나는 영화이고, 나를 졸업하는 영화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키요우라와 스나다는 영화적으로 '한 사람'이다. 스나다의 이름에 모래를 뜻하는 스나(砂)가 있고, 키요우라의 키요(清)가 맑음을 뜻하는 한자를 쓰는 것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키요우라는 스나다가 잊고있던, '언젠가 잊어버린 나'를 상기시키기 위한 장치적 인물이다. 위태롭던 관계가 바스락 무너졌을 때 스나다는 술에 취해 쓰러지지만, 키요우라는 알지 못할 하이 텐션으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왜인지 같은 날, 같은 시간, 같은 킷사뗑에 마주 앉은 자리에서도, 스나다는 커피를 시켜놓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한 모급도 마시지 않지만, 키요우라는 '맛이 없다'면서도 파르페를 바닥까지 긁어가며 먹는다. "전 지지 않았어요. 마지막까지 이놈을 믿었는데 맛없어." 이런 어린애같은 말이나 하면서. 그렇게 둘은 다르고, 어쩌면 닮았있다. 



이 영화엔 나를 버리고 떠나온 나의 이야기가 있다. 시골에서 자라 도시로 상경하는 주인공의 서사가 대부분 그렇듯, 영화는 어제를 벗어나 살고싶었던 인물의 오늘이 배경이다. 하지만 그곳엔 '막상 와봤더니...', '생각과 달라서', '해봤지만...'등 지독히 리얼한 현실의 이야기가 버티고 있다. 되고 싶은 나를 찾아 떠난 곳에서 잃어버리고 만 '나.' 지난 가을 내가 예고편을 보다 눈물을 흘렸던 건, 아마 그런 나의 서사를 보았기 때문이었을까. 그와 비슷한 장면은 나의 다른 일상에도, 또 다른 영화 하마구치 류스케의 '아사코'에도 있어, 떠나버린 '바쿠'를 우연히 다시 본 아사코가 멀어지는 그의 차를 바라보며 '바이바이'라 손을 흔드는 장면에서 터져나온 눈물은 영화가 끝나고도 그치지 않았다. '언젠가 잃어버리고 만 나.' 꽤 중2스럽고, 유치하고, 촌스럽기도 한 이 말은 여지없이 인생의 한 시절을 수식하는 문장이다. 어느 누구에게나 한 번쯤 스쳐 지나갔을 '올 타임 프레이즈'.


영화에는 스나다가 키요우라에게 "왼쪽 핸들 차야?"라고 짧게 묻는 장면이 있다. 일본에선 운전석이 오른쪽인데, 둘의 드라이빙을 멀리서 바라보면 내가 나를 테우고 어딘가로 향하는, 조금은 초현실적 하루가 시작되고 있다. 오직 나만이 존재하는, 무적 파워 블루 아워의 그림이 그곳에 빛을 드리운다.


https://youtu.be/_4KQoIrdZ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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