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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Aug 20. 2020

세상 어떤 방황은
길을 잃고 완성된다

돌란의 비틀대는 자유와 그 모든 것에 대하여...



이 영화엔 사실 나의 가장 비밀스런 비밀이 묻어있다. 어떤 영화는 이입을 넘어 보는 사람의 내면을, 보이지 않는 구석까지 드러내 당사자를 곤혹스럽게 하는데, 내겐 자비에 돌란의 영화가 그렇게  가혹하다. 나로선 감히 들여다보지 못하는 것들을 파고들며 돌란의 영화는 가장 나의 이야기를 한다. '마미'에서 보이는 엄마와의 치명적인 애증이랄지, '마티아스와 막심'에서 그려낸 에로틱한 성장의 무렵이 내게 지나갔던 건 아니지만, 그의 영화엔 지독히 밉고 그만큼 멀어질 수 없는 나와 내가 아닌 그들의 이야기가 여전히 끝나지 않고 시끄럽다. 나를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는 나의 모든 것. 돌란은 어쩌면 그걸 알고있다. 식구 많은 집에 태어나 십 수년을 보내고 성인이 되어 홀로 서울에서 10여 년을 살았던 난, 그 시절을 뒤로 다시 가족 곁에 돌아와 매일을 보내고 있는 요즘의 나는, 어쩌면 아직 돌란의 계절을 맴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세상 끝의 라멘'이란 가게에서 오랜만의 지인과 점심을 한 뒤, 문득 그의 2018년 영화 '단지 세상의 끝'을 떠올렸다. 세상은 결국 나와 나 사이의 무수한 방황이곤 한다.  



'단지 세상의 끝'을 거칠고 투박하게 정리하면, 오랜 시간 가족과 떨어져 살던 남자가, 그러니까 나처럼 긴 세월의 공백을 품고있는 남자가 그들과 다시 재회를 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파리를 떠나 아침이 지나 집에 도착하고 다시 떠나기까지, 하루도 되지 않는 주인공 루이의 고작 반토막 한 나절을 영화는 세상 전부인 것 마냥 그린다. '단지 세상의 끝'이란 제목은 꽤 심오하게 들려오지만, 구조만 두고보면 가족 드라마를 빌린 전형적 로드 무비 형태다. 하지만 돌란의 영화에서 모든 건 '나'란 세계 안에서 벌어지고, 고작 그 이유 하나로 그의 영화는 어디에도 없는 '외로움'의 세계로 진입한다. 가장 가까운 나의 풍경에서 가장 내가 아닌 것들을 걷어내는 투쟁이 돌란의 영화를 움직인다. 돌란의 영화가 엄마와 자주 부딪히는 것도, 이분화된 섹슈얼리티에 정착하지 못해 방황하는 것도, '나'라는 세계, 아직 덜 자란, 어쩌면 도달하지 못한, 그리고 만나지 못한 미지의 자리를 품고있기 때문이다. 충격 그 차레였던 타이틀 '아이 킬드 마더'에서 10여 년. 그의 나침판은 여전히 방황을 탐닉한다.



비행기 안에서의 나, 고독만이 침체되어 있던 그 시간을 떠나 문을 열고 도착한 집에서 영화는 팽팽한 긴장으로 흐른다. 엄마인 나탈리는 에피타이져부터 디져트까지, 심지어 소스도 손수 만들며 법석을 떨고있지만 딸 쉬잔과 말싸움을 주고받고, 조금도 닮지 않은 루이의 형 앙투완은 앉지도 서지도 못한채 모든 일에 불만이다. 물론 고작 이 정도의 부딪힘이 루이를 그곳에서 멀어지게 한 이유가 되지 않을진 모르지만, 돌란은 대부분의 일상에서 그들과 어떤 접점도 보여주지 않는다. 어긋나는 대화, 자리를 찾지 못한 말들,  날을 세우고 배회하는 관계들과 조금도 쉴틈 없이 이어지는 부딪힘. 심지어 루이는 시한부를 선고받았고, 얼마 남지 않은 그 생을 고백하고자 하는 시한폭탄까지 안고 도착해있다. 10년이 지났어도, 그게 12년이라 할지라도 변하지 않은 그들과 그들 곁에서의 '나.' 비행기 안에서 루이는 모자를 깊숙이 눌러쓴 채 이렇게 읊조렸다. "세상엔 누가 뭐래도 떠나야 할 이유가 있고, 돌아가야 할 이유도 그만큼 많다." 그런데 가족은 출발하는 자리일까, 도착하는 자리일까. 앙투완과 쉬잔과 그리고 엄마인 나탈리와. 그들은 모두 가족이고, 가족이 아니다.



자비에 돌란의 영화는 대부분 그의 섹슈얼리티에서 이야기된다. 픽션을 논픽션으로 해석하는 일만큼 위험한 건 없지만, 섹슈얼리티를 넘어 아이덴티티를 바라보는 그의 영화는 결코 남자와 여자, 이항의 젠더에 머무는 서사가 아니다. '나'를 이야기하는 돌란의 영화는 언제 한 번 마침표를 찍은 적이 없고, 이렇게나 '자신'에 몰두해 치열하게 부딪히는 영화 작가를 나는 별로 본 적이 없다. '개인적인 건 정치적'이라는, 오래된 명언을 돌란은 항상 자신의 이야기로 구현해낸다. '로렌스 애니웨이'에서 남성이 아닌 여성의 문을 열고, 웬일로 배우로만 참여했던 '보이 이레이즈드'에서 지워진 나란 정체성과 사투하는 건, 섹슈얼리티의 자각, 퀴어 시네마가 제기하는 마이너리티의 독립처럼 비쳐지기도 하지만, 돌란의 영화엔 그보다 넓은, 하지만 사소한 '나'란 이름의 세계가 여전히 불안하게 움틀댄다. 게이 남성이기 이전에 스티브,  존, 그리고 루이의 단 하루. 어느 여름철과 같은 날들이 추락을 모르고 비틀비틀 길을 걷는다. 그렇게 걸어온 '단지 세상의 끝이랄까.' 영화의 마지막 흘러나오는 건 moby의 명곡 태초의 우울을 선언했던, 'natural blues'다. 


https://youtu.be/z3YMxM1_S48


'단지 세상의 끝'은 어쩌면 단 세 개의 장면으로 설명될 수 있다. 기내 뒷자리에 앉은 어린 꼬마의 장난과 '안전 벨트를 매주세요'란 승무원의 이야기, 그리고 고개를 깊숙이 숙이고 단 두 문장만을 속으로 되새기는 루이. 영화 초반을 장식하는 이 조용한 일련의 흐름은 하나의 세계가 태어나 스스로의 길을 자각하고, 어느새 다가온 마지막을 향해가는 인생의 한 지점을 암시하는 듯 보인다. 다시 돌아가야 하는 불안, 잊었거나 외면했던 시간과의 불편한 조우, 그리고 어찌할 수 없이 집으로 향하는 '나'를 영화는 가장 아이러니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은유한다. 나를 찾기 위해 드랙을 하고, 남자와 키스를 나누고, 길을 떠나고 방황을 하지만 '돌아감'으로 완성되는 어떤 슬픈 시간. 마치 로버스트 프로스트가 그의 흔한 시, '가지 않은 길'을 읊조리는 것처럼, 비장하게 나의 남아있는 날들을 찾아가는 외로운 여정. 심지어 돌아온 집에서 앙투완의 아내 카트린과 마주앉아 조카의 이야기를 주고받는 장면은 왜인지 '루이'의 이야기를 하고있는 듯한 인상도 준다. "저희 집에서는 할아버지 이름을 장남 이름으로 삼는 게 관습이에요." 나란 세계란, 왜인지 나 이상의 무언가가 되어버린다.



다시 한 번 오프닝의 대사를 가져오면, 프로스트의 시를 떠올리게 하는 문장 다음, 루이는 한 마디를 더한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나라는...환상. 어떻게 되는지 보고싶다." 결국 '나라는 환상'은 돌란의 영화를 움직이는 중심이고, 그의 그 영화적 여정, 지난한 방황을 가능하게 하는 건 결국 내가 아닌 엄마, 그리고 가족이라는 나의 뒷면이다. 너라는 공범을 만나 나의 방황이 완성된다. 미치도록 벗어나고 싶지만 멀어지지 못하는, 죽도록 밉지만 사랑하고 아끼는...이런 모순을 돌란은 인간의 이름으로 그려낸다. 아이러니로서의 사람을 바라본다. 지난한 싸움으로, 잠깐의 허그로, 혹은 몇 번의 마주침과 찰나의 마주봄으로 불완전함의 너와 나를 애달프게 포옹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그의 영화 '마미'에서 스티브가 엄마인 디안과 그렇게나 싸우면서, 욕을 주고받을 정도로 부딪히면서 품에 안기는 건, 나이기에 앞서 아들, 아들이기 이전 나란 존재로 서로를 마주했기 때문이고, 보지 못하는 어깨 너머의 서로 다른 하늘을 함께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너로 인해 나를 보기 때문이다.



온갖 음식 장만은 물론 매니큐어까지 새로 칠하며 루이를 반겼던 '단지 세상의 끝'에서의 엄마 나탈리는 단둘이 된 자리에서"널 평생 이해하진 못할 거야"라고 말한다. 그리고 '사랑한다' 이야기한다. 이 어우러질 수 없 두 애증의 문장. 껴안은 엄마 어깨 너머로는 창가에 커튼이 바람에 흔들리고, 그 순간 나탈리의 매니큐어가 발린 두 손은 루이의 등을 어루만지고 있다. 너와 내가 묘하게 어우러져 하나의 아이러니를 낳는 순간. 너를 안았을 때야 비로소 펼쳐지는 창 밖의 풍경, 그리고 진실. 그러고 보면 세상이 내게 가장 처음 안겨준 건 엄마 품에서의 세상이었고, 그 끝에 내가 아닌 너가 서있다. 그런데 너는 내게 시작이었을까, 아니면 마지막이었을까. 태초의 우울은 아마 이곳에서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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