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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하는 캡슐 호텔이
펴내는 커뮤니티의 잠자리

포틀랜드에 에이스 호텔이 있기 이전, 도쿄엔 캡슐 호텔이 있었다.

by MONORESQUE




캡슐 호텔엔 별 다섯 개 호텔과는 다른 보이지 않는 긴장감, 불안의 벽이 있었다. 꽤나 해묵은 이야기지만, 샤워는 커녕 세수는 어떻게 할 것인지, 최소한 20kg짜리 캐리어를 끌고 가는 처지에 그 많은 짐들은 다 어디에 숨길 것인지, 매일매일 입은(을) 옷을 꺼내고 집어 넣는 건 얼마나 번거로운 4박5일의 루틴일지...배 이상은 저렴한 요금에 맘이 흔들리다가도 이내 어김없이 신주쿠 비지니스 호텔에 짐을 풀고말았다. 내 방의 절반도 되지 않는 크기에 창문 밖은 다른 건물의 뒷벽이고, 그래도 녹초가 다 된 몸을 끌고 풍성하고 새하얀 매트리스에 털썩 주저앉고 나면, 새삼 착한 사람이 된 것처럼 '내 한 몸 거둘 곳의 소중함'같은 걸 절감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도쿄를 수 십 번 오가면서도 캡슐, 그 작은 한 칸에 내 몸을 뉘여본 건 꽤나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난 뒤에서이다.

아마도 3년 전, 나름의 가성비로 고른 (비지니스) 호텔에서 약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었더라면, 홧김에 나머지 일자를 취소하고 야밤에 호텔을 나서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내게 캡슐에서의 1박, 그 작은 밤이 찾아올 일은 아마 없었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늦은 밤, 도토루 창가에 앉아,하염없이 '부킹스 닷컴'의 호텔 리스트를 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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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부야를 그렇게 쏘다니고도 모르는 길이 많다. 신주쿠라면 오래 전 살던 동네보다 파삭할 듯도 싶은데 아직도 동쪽과 서쪽 그 출구 앞에서 헤매는 일이 있다. 어디까지나 메트로폴리탄 도쿄의 스케일 문제이겠지만 때로는 그저 나의, 몸에 베인 삶의 어떤 습관같은 게 놓치고 가는 길들이 있다. 벌써 3년 전 퍼블리에서 리포트 작업을 하며 도쿄에서 인터뷰를 잡아놓고, 약속 장소가 시부야라 좋아했지만 만남이 예정된 카페를 찾느라 거진 한 시간을 쏟았다. 6월 한복판 뙤약볕의 아스팔트에서 땀도 그만큼 쏟아졌다. 그리고 이런 '헤맴'은 대부분 지도 탓이 아니다. 어플 맵과 씨름하며 '자꾸만 방향 설정이 달라진다'고 나는 씩씩댔지만, 다음 날 오래 전 함께 일했던 도쿄의 주민은 그 카페가 NHK 근처라고 이야기해주었다. NHK 근처면 옷을 사겠다고, 요요기 공원의 프리 마켓에 가겠다고 수십번은 오갔던 길인데, 난 그 때까지도 시부야 남쪽의 어느 즈음, 그곳의 카페를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면 나의 지도 난독증 때문일지 몰라도, 이젠 난 이런 바보같은 실수를, 도시와 나 사이의 '어긋남', 뭐 그런 게 아닐까 상상하기도 한다. 나는 인생 첫 캡슐 호텔을 내가 알지 못하는 시부야에서 만났다. 스크램블 교차로와는 거리가 있는, 사쿠라가오카란 이름의 언덕길 그 위에 '꼬뮨'이란 작은 호텔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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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도쿄엔 캡슐 호텔이 자꾸만 생겨난다. 예전이라면 주로 막차가 끊겨 집에 돌아가지 못하는, 살인적인 택시비를 감당하지 못할 사람들을 위해 유흥가, 그리고 도심 중심 어두막한 길가에 있었지만, 요즘은 관광지, 상점가, 시내 중심 어디든 장소를 가리지 않고 캡슐이 문을 연다. 아마도 2020이 되고 싶었던 2021 올림픽을 위한 준비이겠지만, 개인 주의의 도시 도쿄에서 밤의 상징이라는 '캡슐 호텔'이 이렇게나 급증하는 건 어떤 세월의 변화를 느끼게도 한다. 두 해 전 여름 록뽄기의 서점 '아오야마 북 센터'가 문을 닫고 그 자리에 유료 서점 '분끼츠'가 들어섰을 때 어슴프레 느껴졌던 '도시가 세월을 살아가는 풍경'과 같은, '아사코'를 만들었던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311 이후에 사람들이 많이 달라졌다고 느꼈어요"라고 말했을 때의 '나의 상실이 아닌 너의 뭉클함'과 같은...그런 변화가 어쩌면 지금 도쿄에 시작되고 있다.

오모테산도 길변의 파머즈 마켓, 그리고 맞은 편 '꼬뮨246'은 당시 포틀랜드와 에이스호텔처럼 힙한 트렌드로 소비되기만 했지만, 그곳을 작업했던 쿠라모토 쥰은 나와 두 번째 만난 자리에서 "최근의 새로운 움직임들은 분명 311 대지진 이후의 변화라고 느껴요"라고도 이야기했다. 311 그 당시 일본에선 전기, 수도, 와이파이가 모두 불통이었고, 오직 '라인'으로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고도 하는데, 일상을 집어 삼킨 재해가 남긴 건 수많은 상실 곁에, '이어짐'이었는지 모른다. 2019년 말, 모리미술관이 한 해를 정리하며 기획했던 전시 타이틀은 '록뽄기 크로싱: 이어보다(록뽄기 CROSSING : つないでみる)'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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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슐 호텔은 함께 쓰는 화장실, 같이 하는 샤워, 옷 하나 갈아입기도 비좁은 공간...그러니까 얼추 불편함의 장소로 기억되는 공간이다. 나와 같은 경우만 해도 경험하지도 않은 그런 불편함에 발길을 돌렸고, 궁여지책으로 찾았던 사쿠라가오카쵸의 '꼬뮨' 역시 짐 하나를 꺼내려면 전에 없던 번거로움을 감수해야만 했다. 비좁은 복도에서 캐리어를 열어젖히고 목도하게 되는 난잡한 짐들의 풍경은, 캡슐 호텔의 저렴한, 1만엔도 채 넘지 않는 숙박료의 처절한 현실이곤 하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번거로움,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는 이유로 느껴지는 타인과의 시간이 그곳엔 있다. 유치하지만 내게 외로움을 느끼게 해주는 타인이랄까. 마음껏 옷을 갈아입을 순 없지만, 아침 화장실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맘이 바빠지지만, 개인주의의 상징, 도쿄 밤에 펼쳐지는 캡슐 호텔의 오늘은 그곳에 숨어있던 타인, 너의 밤, 함께 하는 시간으로서의 1박이기도 하다. 외로움을 감춘 캡슐 하나의 작은 방(밤)들은 사실, 수 십년 혼자의 세월을 버텨온 셈이다.

일본에서 가장 먼저 책방과 호스텔을 결합한 숙박 시설 '북 앤 베드', 그곳의 기획자 리키 마루는 호텔의 시작을 "친구와 늦은 밤 놀다가 자고 싶지 않은 밤을 생각하며 디자인했다"라고 이야기했다. 잠을 거부하는 호텔이 등장했다. 더불어 캡슐 호텔의 어찌할 수 없는 구색이었던 라운지, 공용 샤워・세면실, 식당은 혼자 잠드는 밤 한 켠의 '함께'의 공간으로 변주되고, 지금 도쿄에 새로 생겨나는 캡슐 호텔들은 이러한 '함께', 자지 않는 시간에 무엇보다 공을 들인다. '북 앤드 베드'에 이어 생겨난 츠타야의 '츠타야 북 아파트먼트', 차실에 잠자리를 편 쿄바시의 '호텔 젠', 심지어 시부야 뒷골목의 '턴 테이블 호텔'은 지역의 커뮤니티를 이야기하며 로컬리티까지 가져온다. 정기적으로 개최되는 마르쉐, 무료로 제공되는 조식의 식재료를 모두 토쿠시마에서 가져오며 트랜서빌리티를 구현한다. 이 쯤 되면 호텔은 이미 먼 산을 건너버렸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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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슐 호텔은 더이상 '어쩔 수 없는' 1박의 자리가 아니다. 호텔이 아트를, 카페를, 옷가게를, 책방을 한켠에 품고 변화하는 와중에 캡슐 호텔의 '어쩌다' 생겨버린 '공공의 공간'들은 세월의 변화를 입고 오랜 역사가 깃들어진 '커뮤니티 공간'으로 변주된다. 오래된 빌딩의 지하거나, 노천탕을 구비하는 이유로 옥상이거나 허르슴한 1박을 대변했던 이미지도 이제는 훌쩍 달라져 유명한 건축가, 디자이너들이 하나둘 호텔, 캡슐 호텔 작업에 나선다. 지난 봄 쿠마 켄고가 디자인한 동쪽 끝 스미다 강변의 'ONE@TOKYO'가 구현하는 '시타마치'랄지, 나리타 공항에서 막차를 놓치면 신세를 질 수 있는 히라타 마키히사의 '9hours'랄지, 고탄다와 에비스, 두 곳에서 영업중인, '도시(℃)'는 지난 7월 제주도에 오픈한 'd-jeju'의 건축가 '스키마 건축 계획'의 나가사카 죠의 솜씨이기도 하다. 참고로 이 호텔은 이름에서도 연상되듯, 사우나에 특화된 호텔이다.

일본의 호텔 비평가 니기자와 노부아키는 한 기사에서 근래의 캡슐 호텔을 이야기하며 "이건 뭐 이제 캡슐 호텔도 아닌 게 아냐"라고도 이야기했는데, 그 정도로 캡슐 호텔의 환골탈태가 활발하다. 오늘의 캡슐 호텔은 흘러버린 시절의 뒷켠이 아닌 오지 않은 내일을 예고하는 자리에 당당히 서있다. 커뮤니티 디자인의을 이야기하는 이 시대에 가장 가시적인 샘플인지도 모른다. 지난 4월 교토에 새로 문을 열었다는 에이스 호텔은 '커뮤니디 디자인의 결정판'이라 평가되던데, 포틀랜드에 에이스 호텔이 있기 이전, 도쿄엔 캡슐 호텔이 있었다. 외로움을 감추고 싶지만 드러내고도 싶고, 외로워서가 아니라 고독해 잠을 못 이루는 밤, 캡슐 너머 너와의 동침이 그곳에 또 한 범의 밤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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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어쩌면 지금 이 글의 시작일지 모를 마에타니 카이의 'Kapsel.' 2018년 모리 미술관의 마지막 전시 '이어짐'엔 캡슐 호텔만 찍은 사진 몇 컷의 작품이 있었다. 위에서 언급한 세련되고 모던하고, 디자인적으로도 새로운 캡슐 호텔이 아니라, 90년대 영화에서 종종 보던 누런 플라스틱 재질의 캡슐을 찍은 사진이었다. 어두운 밤 불을 끄지 않은 작은 방(밤) 한칸의 찰나를, 사진은 외로움인지, 고독인지, 애절함인지 상실인지 묘하게 번져가는 감정으로 표현간다. 캡슐 내부 어느 구석에 그린 낙서, 매트 한 켠에 치워놓은 백팩, 옷을 벗은 남자와 아직 펴지 않은 이불, 그리고...

사진을 찍은 마에타니는, 도쿄가 아닌 아이치현에서 태어나 교토에서 활동하는 1988년생 작가이다. 나는 지난 가을 그와 만나 대방역 스타벅스에서 카푸치노 한 잔을 마셨다. Capsule이 아닌 Kapsel이란 제목에 일본식 발음, 그래서 더욱 도쿄의 캡슐 호텔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마에타니는 "제가 독일에서 유학을 했어요. 독일에서 캡슐을 그대로 썼을 뿐이에요"라고, 꽤나 허망한 이유를 들려줬다. 어긋난 예상에 나는 돌연 외로워졌지만 그건 분명 타지에서의 자신, 외국인 마에타니 카이로서 느꼈던 외로움의 반영이었을 거라고 멋대로 자신했다. Capsule과 Kapsel 사이의 대화, 그저 그런 캡슐 하나의 상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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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내가 묵고 있었던 호텔은 고탄다의 '도시.' 돌아온 방(캡슐)엔 새로운 이불이 곱게 개어져 있었다. 나는 'Kapsel'에 남아있던 구겨진 이불, 그렇게 남아있던 타인의 밤을 떠올렸다. 도쿄의 캡슐 호텔엔, 나와 너, 타인과의 동침에서 시작하는 묘한 빈자리의 이야기가 있다."캡슐 호텔이 아니면 무어라 해야할지 고민을 했지만, 진화형 캡슐 호텔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아요."니가자와 노부아키는 이렇게 말했는데, 캡슐이 떠난 자리에서, 캡슐이 남기고간 지난 밤을 생각했다.


https://youtu.be/lNfQeKRwNZ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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