꼼데갸르송과 지구를 걷는 법을 지나 어느 비닐 봉투의 무한성
코로나가 뭐라고 침묵에 가려있던 마르지엘라에 관한 영화가 연달아 개봉하고, 미디어 노출이라면 치를 떨던 카와쿠보 레이는 지난 주 TV 인터뷰에 응했다. 아침 뉴스 프로그램에서 그녀의 짧은 단발 머리를 보게될 줄이야...세상은 변하고 있다. "(만들어간다는 것의) 파워를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인터뷰에 응하기로 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달지, 좀 쉬자가 아니라 이런 때이기 때문에 오히려 무언가 새로운 것을 해가야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 비대면을 이야기하는 시대에, 만남조차 마스크를 동반해야 하는 나날에 거리의 매장은 어디로 숨을까 싶지만 오히려 들려오는 건 여느때와 마찬가지의, 오히려 조금 더 발랄하고 재기 넘치는 '오프라인' 상의 새로움들이다. 오사카엔 발렌시아가 최대 매장이 들어서고, 교토의 에이스 호텔은 로비에서 영화관을 펴내고, 나란히 여든 무렵을 걷는 카와쿠보 레이와 사진가 모리야마 다이도는 손을 잡고 꼼데 매장 두 곳, 그리고 트렌딩 뮤지엄에 사진 전시를 진행하고 있다. 그러고보면 둘의 공통점은 모노크로. 대범한 사이즈로 펼쳐진 흑과 백의 거침없는 향연을 바라보니 코로나가 뭐라고...좀 다른 빈정거림으로 중얼거리게 된다. 참고로 모든 전시는 카와쿠보 씨의 큐레이션. 모두 109장의 사진이 쓰였다. 여든 인생의 카리스마란.
40년 역사의 가이드북 '지구를 걷는 법'이 처음으로 펴낸 국내편 '도쿄'는 512페이지. 올해에만 초고층 빌딩이 5, 6개 생겨버린 시부야의 도시 바이오그래피, '시부야학'은 208페이지, 그리고...어쩌다 제작 소요 기간 1년 그리고 2개월이 걸려버린 나의 첫번째 책 '도쿄의 시간 기록자들'의 428페이지. '아오야마 북 센터'가 38년만에 문을 닫아버린 뉴스에 왜인지 맘이 싱숭생숭, 좇기 시작했을 뿐인데 어쩌다 나의 오늘이 되어버렸다. 그러고보면 영화 잡지 기자가 된 것도, 일본 영화, 문화에 기울기 시작한 것도, 번역을 해보게 된 것도 그저 짤막한 장면의 스쳐감에서였고, 그런 별 거 아닌 순간들이 어쩌면 내겐 '아이덴티티'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조금 더 마음을 열자는 다짐을 했다. 마음대로 줄여서 '도시기'의 북토크는 11월 19일 저녁 7시, 서교동 비하인드에서 조촐하게 마무리되었고, 찾아주신 분들, 인스타 라이브 놀러오신 분들 모두 감사드려요. ☕️
그리고 오늘 아침, '지구를 걷는 법 도쿄'가 집에 도착했다.
"올림픽 해에는 서점에 올림픽 관련 진열대가 생겨요. 여행 가이드북이 참가할 수 있는 건 2020년 뿐. 창간 40주년을 맞이해 무언가 하고싶다는 이야기가 나온 게 지난 해 4월이었어요. -편집장 미야타 타카시
"일본인이 국내 여행을 할 때 쓰는 책이기 때문에, 전차 타는 법이나 Suica 사용법 같은 건 당연히 알고있어요. 그런데 그걸 해외판이랑 똑같이 세세히 소개하고 있으니 패러디가 아니냐고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웃음) 하지만 에스컬레이터도 칸사이와 관동 지방에서 '서야 하는 위치'가 다르고, 심지어 에스컬레이터 협회에 의하면 본래 좌우 어디든 에스컬레이터에서는 걸으면 안된다고 하더라고요. 저 스스로도, 매일 다니는 거리인데 모르는 게 많다고, 작업을 하면서 새삼 느꼈어요." -편집자 사이토 마리
이에 더해 책에는 야마노테센을 대해 이야기하며, '바로 앞 전차를 놓쳐다 해도, 야마테는 몇 분당 한 번 꼴로 오기 때문에 가볍게 포기하고 다음 차를 기다립시다'라고도 쓰여있다. 그러고보면 신주쿠 플랫폼에서 차를 놓친 '작은 실패'들은 숱하게 많았지만 매번 금새 탈 수 있었고, 세상엔 알지 못하면서 그냥 그렇게 완성되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차별점은 대부분의 책들과 달리 신주쿠와 같은 환락가가 아닌 '니혼바시'로 시작한다는 점. "보통 도쿄에서 OOkm’라고 할 때 그 중심이 되는 게 니혼바시에요. 그러니 '니혼바시는 여행자가 걷는 길의 원점인 셈이죠'라고 사이토 씨는 이야기한다.
2020 올림픽은 무산됐지만, 도쿄의 원점, 에도 시절의 기원으로 시작하는 책은 오히려 더 좋은 반응을 얻고있고, 10월 말 현재 7쇄를 찍으며 가이드북으로는 이례적인 8만 판매 부수를 기록했다고 한다. 디지털 시대에 스마트폰 하나 쯤 누구나 갖고있는 시절에 500페이지 넘는 책 한 권은 그저 불편할 뿐이지만, 돌연 코로나 시절을 살고있는 우리에겐 어쩌면 익숙함, 친근함, 그런 '안도', 여행을 떠나면 늘 기다리고 했던 '집으로 가는 길'에 대한 믿음같은 게 필요했는지 모른다. 떠나기 위한 한 권이 아니라 돌아오기 위한 한 권. '지구를 걷는 법'이 창간 당시 내세웠던 '사명'은 '이 책 한 권 들고 출발해 다시 공항으로, 아무일 없이 살아 무사하게 돌아오는 것'이었다. 다들 무사히 하루를 보내고 있나요?
"지금은 현지에서도 와이파이를 쓸 수 있어 길을 잃을 일은 별로 없지만, 어떤 장치를 가지고 여행을 한다고 해도,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책을 만든다는 편집 방침에는 창간부터 지금까지 40년간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정보를 추가할 때에는 매우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작업합니다." -미야타 편집장.
그리고 이 시절에 돌아보는 또 하나의 특별한 올드함. 우리보다 꽤나 늦게 지난 7월 비닐 봉투 유료화가 시작된 도쿄에선 브랜드마다 새삼 에코백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고, 그 와중엔 편의점 봉지 디자인 그대로를 재연한 비닐 봉투 형태의 에코백도 등장했다. 몇 해 전 에비스 가든 패밀리 마트에서 난 셀프 포장 계산대의 비닐 봉지를 팬시 잡화처럼 진열해 놓은 걸 보고 그저 좋다고 느꼈는데, 일본엔 아무렇지 않게 '편의점 비닐 봉지'가 환기하는 일상의 추억같은 것들이 있다. 이름하여 'THE 콘비니 라이프 에코백'을 디자인한 크리에이티브 스튜디오 '에코드 웍스'는 "멋진 에코백이 흘러 넘치는 거리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콘비니 비닐을 보는 일은 적어졌습니다. 모두에게 익숙한, 하지만 지금은 향수로 기억하는 그 비닐 봉투가 있던 풍경을 탈・플라스틱 이후 새로운 시대의 디딤돌로 만들어가고 싶습니다"고 이야기한다. 도시는 여전히 빠르게 흘러갈 뿐이지만, 이런 작은 마음가짐들은 어쩌면 어딘가 남아 세월의 결을 만들곤 한다. 소소한 일상이란 아마 그런 것들의 이름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