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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May 14. 2021

'트라우마'라는 도시 유산을 살다, 쿠마 켄고의 말

올림픽이 아닌, 그 후를 설계하는 건축가의 오늘을 살아가는 말들



"건축가는 사회의 OS를 만드는 일을 합니다. 인간의 생활, 사회의 기본적인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건축가의 중요한 역할입니다. 지금은 이전까지 좇아왔던 '상자의 OS'가 부정되고, 우리에겐 새로운 OS를 만들 의무가 있습니다. 앞으로는 여러 프로그램이 상상도 하지 못할 형태로 변화할 것이고, 그건 아마 저의 상상도 넘어설 것이기 때문에, 그에 도전하고 싶습니다."  
80주년을 기념해 리뉴얼 중인 긴자의 '소니 빌딩', 현재 지하 4층부터 2층까지만 공개되어 있다. 2030년 무렵 완공될 예정. 도쿄엔 지금, '만들어가는 내일'이 있어요.


올림픽이 아닌, 그 후의 설계는


2020 올림픽의 취소가 (잠정) 결정됐다는 보도가 흘러나왔던 날, 뒤이어 반박 보도가 이어진 날, 건축가 쿠마 켄고의 위의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당연히 찾아올 줄 알았던 지구촌 축제는 뒤로 밀리고, 코로나와 씨름하느라 많은 것들은 하지 못한 채 흘러가고, 그렇게 한 해가 몽땅 끝나버린 지금. 올림픽 마저 잃은 2020의 도쿄는 위태로울 것만 같은데, 쿠마 켄고는 한 대담 자리에서 '상자'에서의 탈출, 그리고 새로운 OS로서의 도쿄를 이야기했습니다. 이전 시대의 종말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시대의 OS를 건설하자는 전환의 메시지를, 혼란의 한복판에서 꺼내든 것입니다. 사실 1월 22일 올림픽 위원장 토마스 바흐의 말은 Yes를 말하고 있었지만 No처럼 읽혔고, 두 번의 부정을 동원해야만 했던 그 말(....no reason whatsoever to believe that the Olympic Games in Tokyo will not open ...)은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불안하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쿠마의 이 이야기에는 다시 시작하는 마음의 개운함이 있습니다. 컴퓨터의 리셋 버튼 같은 개운함이 아니고, 지금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맑음의 개운함입니다. 참고로 '상자(箱)'는 쿠마 켄고가 건축을 의야기하며 자주 비유하는 집, 오피스, 건물의 상징이고, 쿠마는 올림픽 주경기장으로 쓰여질 스태지엄 설계에 참여한 건축가이기도 합니다. 그 스태디움에 관해 그는 "올림픽이 아닌 그 후를 생각했다"고 말했습니다. 올림픽이 아닌 그 후, 코로나가 아닌 그 후. 어쩌면 도쿄는 그곳에 있습니다.


도쿄 내 진행중인 재개발 프로젝트의 규모가 도쿄 돔 250여 개 크기 분량?이라고도 합니다.


지금의 도쿄는 코로나 때문에, 불매운동을 하느라 멀어져버린 듯 싶지만, 2020년의 도쿄는 사실 자못 의미심장합니다. 올림픽을 잃은 도쿄는 초라할 것만 같아도, 근래의 도쿄만큼 스펙터클한 도쿄를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도쿄의 2020년은 사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올림픽이 아니었어도, 새로운 시대가 시작하는 2020이었습니다. '재개발 프로젝트'란 이름으로 진행중인 도쿄 곳곳의 30여 개 대대적 공사는 쿠마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새로운 OS를 짜기라도 하듯 분주하고, 100년의 한 번이라는 재개발에 들썩이는 지금 도쿄에선 시대의 유산과 과제가 뒤섞여 서로 내일의 이야기를 합니다. 오랜 전통이 이별을 고하고 새 시대가 시작을 준비하는 '어느 문턱'의 도시, 그게 지금의 도쿄입니다.  그리고 그건 묘하게도 2011년 311 동일본 대지진의 아픔, '그 후'의 이야기로 쓰여집니다. 동북 지역을 쓰마니가 할퀴고 간 비극의 날, 그로부터 10년을 맞이하는 2020년의 도쿄는 반성과 재기, 돌아봄과 교훈으로 다시 일어나는 '내일의 도시'이기도 합니다.



영화 '아사코'를 만들었던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영화와 관련한 인터뷰에서 "311은 일본 사람들에게 당연하게 흘러가는 일상이 당연하지 않음을 한 순간에 일깨워준 사건"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건 곧 '아사코'는 311, 그 후의 이야기라는 얘기기도 합니다. 국내에서 유료 서점으로 화제가 됐던 록뽄기의 '분끼츠'도, 오모테산도 길변의 힙해보이기만 하는 커뮤니티형 마켓 공간 '꼬뮨'도, 기획을 한 '일본출판협회'의 아루치 카즈야, 공간 큐레이터 쿠라모토 쥰은 그 시작이 (우리에겐 별 상관 없어보이는) 311 대지진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쿠마가 이야기하는 '그 후'의 도쿄. 그 시간은 지금의 코로나 팬데믹과 유사하게 느껴지고, 그런 이상한 데자뷔의 기억과 함께 그들이 팬데믹을 건너온 시간은 이미 오래 전에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겐 상처가 남긴 아픔, '트라우마의 유산'이 있습니다. 쿠마 켄고는 10년 전 그 무렵을 이렇게 돌아봅니다.


"탈·공업화 사회, 탈·콘크리트의 흐름은 2000년 정도부터 시작됐고 일본에선 2011년 311 동일본대지진이 결정적이었다고 느낍니다. 아무리 멋진 집을 갖고있어도 츠나미가 오면 단숨에 쓸려가버린다. 그런 부조리를 마주하고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재산을 늘리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인연'을 소중히 하며 살아가는 쪽으로 방향을 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불확실성이 남겨준 교훈일까요. 그러니까 코로나가 겁을 주지 않어도, 올림픽에 휘청이지 않아도, 도쿄는 지금 새로운 내일, 기존과 다른 시스템 OS 구축에 매진하는 도시였습니다. 1964년 이후 60여 년만에 다시 개최하는 도쿄에서의 올림픽, 새로운 연호를 맞아 다시 시작하는 레이와(令和) 2년, 버블 시대 세워졌던 건물은 노후돼 재건축을 하며 다짐하는 내일의 이야기. 그저 우연일지 모를 어느 분기점에서의 도시가 그곳에 있습니다.


코로나 이후, 다시 삶을 시작하다


불운의 경기장이 되어버린 쿠마 켄고의 '국립 경기장'


지난 3월 14일 일본에서는 새로운 '역'이 등장했습니다. 쿠마 켄고가 설계한 '타카나와 게이트 웨이 역(高輪ゲートウェイ駅)'입니다. JR 야마노테센의 30번째 역이고, 1971년 니시니뽀리(西日暮里) 역이 만들어진 이래 49여 년만의 '신(新駅)역'이라고도 합니다. 철도 매니아가 많고, OO주년같은 걸 참 좋아하는 그곳에선 역을 준비하며 이름을 공모하기도 했는데, 그렇게 선정된 '타카나와 게이트웨이'는, 외래어가 들어간 JR 역명(駅名) 역사상 예를 보기 힘든, 올림픽을 의식한 이름이라는 평이 있습니다. '새로움'으로서의 '신역.' 시기만 보아도 (연기가 되지 않았던 당시) 올림픽을 3~4달 남겨둔 시점에 문을 연 이 도쿄의 새 역은, 여지없이 올림픽를 기대하고 준비된 프로젝트입니다. 여러모로 뭐를 해도 '올림픽'이 따라붙는 2020의 도쿄입니다.


하지만 올림픽이 열리면 세계 곳곳에서 관광객이 몰려들고, 역의 수요는 몰라보게 팽창하고, 도쿄로 향하는 '입구'와도 같은 공항, 역이 손님 맞이에 힘을 기울이는 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폭격을 당했던 도쿄역이 보수 공사를 마치고 19번 홈을 신축, 공개한 것도 1964년 도쿄에서 첫 번째 올림픽이 열리던 해였습니다. 그 때 처음으로 오사카와 도쿄를 단 3시간에 잇는 토카이도신칸센(東海道新幹線)이 개통됩니다. '역'은 교통의 중추 정도일 뿐이지만, 알게 모르게 우리 삶과 작용하고, 때로는 새로운 시대의 다짐이 되기도 합니다. 쿠마는 이 신역, 타카나와 게이트웨이를 "역과 마을이 하나가 되는, 역을 마을 중앙에 데려오는, 커뮤니티의 장으로 건설하는 그림"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역을 운영하는 JR이 말하는 타카나와 게이트 웨이는 '미래의 역'입니다.

'타카나와 게이트웨이'역의 가장 커다란 모티브는 '개방감', 자연과의 동거입니다.


쿠마 켄고가 말하는 '마을과 역이 하나가 되는'과 같이, JR의 조금은 부끄러운 표현 '미래의 역'처럼, 타카나와 게이트 웨이 역엔 '앞으로의 도쿄'를 모색한 흔적이 역력합니다. 먼저 '미래적인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면, 타카나와 게이트 역은  초반 AI 기술의 응용, 무인 편의점, 로봇 등으로 화제가 됐습니다. QR 코드가 삽입된 티켓으로 개찰구를 통과하고, 역사 내부를 청소하고 안내하는 건 로봇이고, IT 기업 TOUCH TO GO의 AI 기술로 구현된 무인 편의점에선 점내 카메라와 적외선, 그리고 상품 진열대의 중량을 감지하는 데이터 시스템으로, 정말 '터치' 한 번 없이 쇼핑을 할 수 있습니다. 가방에 담은 상품의 목록이 출구 앞 디스플레이에 표시된다고 합니다. 현재 이곳에 편의점 체인 패밀리 마트가 입점해있습니다. 하지만 기술 발전으로 일으킨 문명의 역사가 흔들리는 가운데, 또 하나의 첨단 기술이란 놀라움 뒤에 불안을 숨긴 말이나 다름없고, 쿠마 켄고가 50여 년만에 도쿄에 새로운 역을 디자인하면서 궁리한 것은, 그런 첨단의 '내일'을 또 하나 얹는 식의 설계가 아니었습니다.


도쿄의 이 '미래의 역'에는 각종 안내, 청소를 하는 로봇이 20여 종이라고도 해요. 세상은 어떻게 변화할까요.


미래가 아닌, 내일을 짓다


쿠마가 이야기한 '마을과 역의 일체화'는, 3밀(密)을 피해야 하는 눈앞의 과제를 해결하는 식의 답이 아닌, 보다 삶에 다가가는, 역에 '장소성'을 부여하고, 일상에 스며드는, 기능보다 함께 살아가는 자리로서의 '역'을 되돌리는 전략에 가깝습니다. 기존의 역들이 기능에 중심을 두어 마을이 역에 맞춰, 따라오게 설계되었다면, 쿠마의 역사(駅舎)는 그 반대의 길을 개척합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역 자체가 마을 중심이 되어 지금까지 가보지 못했던 동서남북으로 뻗어가는 각각의 에리어를 잇는 기점이 될 수 있는 방식을 고민했습니다. 역에 상업 시설이 있는 곳은 많이 있지만, 마을과 역이 하나로 이어진 케이스는 지금까지 일본은 물론 세계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고, 아마 이게 제가 생각하는 '앞으로의 역'의 모습입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타카나와 게이트 웨이 역사 내의 '스타벅스', 나무를 주요 소재로 활용한 '온화함'이 눈에 띱니다.


마을과 하나가 되는 역. 조금은 막연하기만 하지만, 타카나와 게이트 웨이 역은 목재 건물입니다. 쿠마는 '나무'를 꺼내들었습니다. 벽이며 바닥이며 천장 할 것 없이 일본 곳곳에서 가져온 나무를 깔았고, 천장을 덮지 않는 4천 m2 크기의 지붕은 일본 전통 놀이 '종이 접기'에서 모티브를 얻어 무수의 이음매로 완성됐습니다. 그리고 이건 그가 근래 보여주고 있는 '작은 것에서 시작하는' 건축, '작은 건축'의 예처럼도 보입니다. 역 그 자체는 크지만, 그 안에 오고가는 한 사람,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태도로서의 건축'이랄까요. 그렇게 '마을과의 일체화'일까요. "역에 내렸을 때 마을이 한눈에 보인다는 게 가장 중요했습니다." 쿠마는 근래 신역과 관련한 인터뷰에서 거의 빠짐없이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역을 설계한다는 건 구조물로서의 건축이 아닌, 삶의 얼개, 혹은 감각을 직조하는 일에 더 가까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삶, 그건 분명 불안, 불확실성을 마주하게 된 우리의 지금, 코로나 이후의 일상입니다.


타카나와 게이트 역은 터미널 역으로 쓰이고 있는 시나가와 역과 타마치(田町) 역 사이에 위치합니다. 그리고 2024년을 목표로 마을 중심형 역 앞 광장이 계획중입니다. "실내에 많은 목재를 이용, 거대하게 뚫린 천장을 설치함으로서, 기분 편해지는 광장이 만들어집니다. 공공 시설이라고 하더라도 얼마나 일상에 가까이 데려다 놓을 수 있는가를, 늘 의식합니다." 쿠마의 역, 그의 공공시설은 보다 리얼한 의미'모두역(쿠마가 311 직후 '키신노카이(帰心の会)'를 결성해 가장 먼저 시작한 게 재해민들에게 집을 안겨주는 '모두의 집'이었습니다)'으로 완성되어가는 '중'입니다.


나카메구로에 지어진 세계에서 5번째 로스터리 스타벅스 매장, 그리고 오모테산도의 나무로 직조한 타이완 '펑리수' 가게.


사실, 쿠마 켄고가 사용한 '나무'는 역사(駅舎) 건축에서 잘 쓰이지 않는 소재입니다. 근대 건축이 나무를 배제해온 역사를 차치하더라도 특히나 상공(上空)에 나무를 쓰는 예는 거의 없다고 합니다. 목재가 부식해 낙하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역사에서 나무를 쓴다는 건 꽤나 위험한 발상입니다. 하지만 쿠마의 근래 작업들을 돌아보면 올림픽 경기장으로 쓰여질 스태디엄도, '가장 비싼 커피'라고 화제가 되었던 나카메구로의 스타벅스 리저브도, 그리고 도쿄의 동쪽 끝 아사쿠사에 지어진 호텔 One @ Tokyo도 나무로 벽을 쌓거나 파사드를 올립니다. 건축의 역사를 스크랩과 빌드(scrap & build)의 연속이었다고 가정한다면, 쿠마는 모더니즘 건축을 대변했던 강함, 안전함의 콘크리트가 아닌, 연약함과 유연함을 내포한 나무에서 새로운 건축의 힌트를 찾아가고 있는 셈입니다. 그의 저서 타이틀('작은 건축', '지는 건축(負ける建築, 국내에서 번역된 타이틀은 '약한 건축')', '나는 왜 신국립경기장을 만드는가'에서 스스로 자신의 건축을 지칭했던 '말없는 건축(無口な建築)')들만 살펴봐도, 쿠마는 최대한 '짓지 않는' 방식의 건축을 모색합니다. 그의 또 다른 저서 '나, 건축가 쿠마 켄고'에서 그는 311 이후 '무얼 또 더 지어야 하나'라고 토로했던 날도 기술하고 있습니다.


불확실성의 미래를 짓다, 오늘을 생각하는 나무의 건축


그리고 여기서 '나무'는 그가 찾은 '말하지 않는 건축'의 주요한 실마리가 됩니다. 불확실성의 시대를 곁에 두고 쿠마는 시간이 흐르면 썪고, 변이되고, 부식되거나 삭아서 사라질 '나무(자연)'의 연약함에서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환상으로 끝나버리고 말았던 콘크리트도 하지 못했던, 지켜주지 못한 안전을, 불완전성(不完全性)을 받아들이면서 확보하는 것입니다. 쿠마 켄고는 불확실성, 불완전함을 설계합니다. "콘크리트로 만든 건축은 개축이 힘들지만, 나무를 썼을 경우에는 특정 부분을 손보는 게 용이합니다. 공업 사회인 20세기엔 영구성이 없고 타기 쉽다는 이유로 건축 재료로 경시된 경향이 있지만, 지금은 열기에 버티고 부식도 느리게 해주는 기술이 크게 발전했습니다. 가볍고, 부드러운 나무야말로 미래의 형태를 만들어간다고 생각합니다." 타카나와 게이트 웨이 역사엔 후쿠시마 현과 미야기현(宮城県)에서 가져온 나무에 철강을 끼어맞추는 식으로, '목강 하이브리드' 소재가 사용됐고, 근래 쿠마가 자주 사용하는 건 여러 종류의 나무를 모아 덧대고 접합해 강도를 높인 가공목 CLT입니다.


18세기 스페인 리스본 지진 이후 '지키는 건축'으로서의 콘크리트가, 관동 대지진 이후 '강한 건축'으로서의 모더니즘이 각각 유럽 근대, 그리고 전후의 도쿄를 디자인했다면, 쿠마의 건축은 애초 '지키려는 의지가 없습니다. 불안과 불확실함에 맞서 더 강한, 더 튼튼한 '네오-콘크리트'같은 걸 찾는 게 아니라, 거리에 스며들고, 일상과 하나가 되는, 함께 나이를 먹어가는 유기체로서의 건축을 그는 지향합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를 '자연' 앞에서 쿠마의 건축은 그 나무, 그 땅, 그 바람, 그 자연과 '한 편'이 됩니다. "'자연이라는 불안정한 조건과 함께 어떻게 잘 살아가야 하나'로 시점의 전환이 진행되고 있다고 느낍니다." 쿠마의 '말하지 않는 건축'이 그래도, 다시 건축을 시작하는 방식(이유)입니다.


왼쪽이 쿠마 켄고, 오른쪽이 자하 하디드. 둘의 차이가 극명하게 보이죠. 내일과 미래란, 이런 질감의 차이일지 모르겠어요.


사실 돌이켜보면 우리는 '목조 건축'의 시대를 지나왔습니다. 몇번의 재해를 경험하며, 유럽에서는 리스본 지진, 일본의 경우 관동 대지진과 2차 세계 대전의 패전 이후 전소된 도시를 보고 일궈낸 게 '요쇄'로서의 콘크리트 건축입니다. 그런데 다시금 나무를 이야기한다는게 아이러니하게도 느껴닙니다. 하지만 쿠마는 이렇게도 말합니다. "근래의 IT 기술로 인한 스트레스, AI가 석권해버린 탓에 인간의 '장소'가 없어지는 가운데, 나무로 만들어진 마을에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난다고 느낍니다." 기술은 이미 나무의 약점을 보완할 정도로 충분한데 제자리에 쓰이지 못한 채 스트레스만 양산하고 있다는 이야기일까요. 쿠마의 건축은 제자리를 돌아봅니다. 무엇을, 어떻게가 아니라 '왜', 왜 지어야 하나, 지어야만 하나를 되묻고, 완성된 건축이 아닌 완성해가는, 미완의 건축을 설계합니다. 2020 올림픽 경기장 설계안으로 잠시 오르내렸던 자하 하디드의 건축이 '상징'의 건축이라면, 쿠마 켄고는 '체험'의 건축을 합니다. 그에게 '완공'은 마침표를 찍는 마지막이 아니라, 사용하는 사람들의 일상, 시간의 흔적, 쌓여가는 세월로 채워질 빈 칸을 남겨놓는, '말이 없는', 흐릿한 구둣점의 시간인 것입니다. 심지어 그는 리노베이션이야 말로 건축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앞으로의 건축은 '변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리노베이션란 말은 근래 자주 쓰이면서도 아직은 신축이 표준인 상황이지만, 본래 리노베이션이란 행위 자체야 말로 건축이라고 생각합니다." 완결된 끝이 아닌 변화에 품을 내어주는 건축. 팬데믹 시대에 쿠마의 건축은 어떤 탐색의 '순환'을 떠올리게 하고, 봄, 여름, 가을, 겨을, 세상은 사실 늘 순환의 반복이었습니다.



완공을 미루는 건축에서, 의도적으로 지연하는 건물에서 구성 요소는 분명 달라집니다. 콘크리트가 아닌 색이 바래고 결이 달라질 목재를 사용하면서 시간, 나아가 세월이, 건물이 지어지는 자리에 따라 풍토와 계절을 비롯한 외부 조건들, 그리고 건물을 드나들고 혹은 머무는 사람의 삶과 그 수 만큼의 개체성은, 건축의 (보이지 않는) 변수가 됩니다. 변화, 세월의 흐름을 생각하는 건축은 무기질의 완결체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건 때로 나,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이기도 합니다. 쿠마는 도쿄 신주쿠 근처에 살던 시절 311을 겪고, 당장 달려가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주민의 존재가 크게 다가왔다고 말합니다. 집, 혹은 건물은 우리의 신변을 보호해주는 존재이지만 관계를 맺어주고, 유지하게 해주는 자리로서의 건물이기도 합니다.

"15년 전 신주쿠 야라이쵸(矢来町)로 이사를 했습니다. 지반이 튼튼하고 주변에 공원도 있고 내진 설계도 확실히 한다는 건 집을 지을 때 전제조건이지요. 하지만 동일본 대지진이 왔을 때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에 친구가 있다면...하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동네 네트워크가 필요하구나 정말 생각하게 됐던 것 같습니다." 쿠마는 이를 '근거리의 힘(近所力)'라고도 부릅니다. 대부분의 건축이 지면을 그린 뒤 마지막 단계에서 재료(material)을 고른다면, 쿠마 켄고의 건축은 머티리얼, 재료(자연)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그건 불확실함을 품고 시작하는, 조금은 성스럽게 느껴지기도 하는 설계입니다. 쿠마는 311 이후 '종교 건축'이 답은 아닐까 생각했다고도 회고한 바 있습니다.


셰어 하우스의 오너가 되는, 세계적 건축가


2015년 311이 지나고 얼마 쯤, 쿠마 켄고는 셰어 하우스를 짓습니다. 독립을 하겠다는 아들의 요청에서 시작됐지만, 지금은 쿠마 자신도 종종 방문해 입주자들과 저녁을 먹고, 전에 없던 젊은 세대와의 커뮤니케이션도 즐기고 있다고도 합니다. 도쿄 카구라자카(神楽坂)에 1호점을 만들어 현재 두 개 동을 운영중이고, 1호점에는 아들과 함께 친구들 8명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거주 공간이 달라지면서 생겨나는 관계가 있습니다. 지금은 가족의 형태도 다양화되고 있듯이, 가족은 아니지만 느슨한 이어짐으로 연결되는 셰어하우스와 같은 형태가 미래의 집으로 제격이라 느낍니다." 쿠마는 셰어 하우스를 지으면서도 역시 목재를 사용했고, 그건 어느 하나 균일한 깨끗하게 정돈된 나무가 아닙니다. 그에게 관계란 사람 사이의 이어짐 뿐 아니라, 자연과의 관계이기도 합니다.


쿠마가 '스노우 피크'와 함께 잡업한 주거의 상자, '쥬바코', 환경과 생활에 따라 마음껏 변화(개수)가 가능합니다. 쿠마는 여기서 주인공은 '집'이라 이야기했어요.


"셰어 하우스는 '너무 깨끗하게 만들지 않기'를 가장 의식했습니다. 노이즈가 있는 나무의 잡다한 느낌을 부러 모티브로 했죠. 보통은 구조재로 쓰는 러프한 합판을 벽에 그대로 붙였고, 업무용으로 찍어놓은 스탬프 자욱도 지우지 않고 그대로 남겨두었습니다. 노이즈가 있다는 건 다양한 사람이 모여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고, 공간이 그 자리에 녹아 들어가는 맺음의 좋은 역할을 합니다." 쿠마 켄고는 망치를 두드리며 관계를 엮습니다. 모형을 제작하며 내일을 구상합니다. 역이 마을과 하나가 되고, 건물이 일상에 다가오고, 정작 '다양성'은 빠져있는 수많의 복합 건물(도시)의 '다시 쓰기'의 작업을 이어갑니다. 효율성과 성장만을 좇았던 20세기 무수히 많은 '상자'에 대한 반성, 안티체제로 쿠마의 건축이 자리하는 것입니다. "20세기는 보다 효율적인 '상자'를 쌓고 더해온 역사입니다. 하지만 그건 요즘 이야기하는 3밀, 그 자체의 공간이고, 효율성이라는 건 사실 스트레스의 원인이었습니다. 그렇게 역으로 '상자'가 효율적이지 못하다는 걸 알게된 게 지금, 이제는 상자의 '안'이 아닌, '밖'을 디자인해야 합니다." 쿠마 켄고가 이야기하는 '상자'의 밖. '밖'의 건축. 창문을 열고 환기를 하기 시작한, 밖의 가치를 깨닫기 시작한 지금, 코로나 시대의 힌트일지 모르겠습니다.


쿠마는 60년대 단게 겐조의 '도쿄 계획'을 연상케 하는 2020 도쿄 건축의 새로운 키워드를 제시했어요. 그리고 그건 '고양이의 시선'이었습니다.


쿠마 켄고는 애초 집, 오피스, '상자'를 해체합니다. 과거 공업화 시대에 배열된 오피스 중심의 생활권을 '집'의 자리에서 다시 바라보고 자유롭게 분산시킵니다. 일은 회사, 잠은 집, 아침에 일어나면 만원 열차라는 '상자'를 타고 출근을 하던 효율 중심의 질서를 이탈해, 다른 관점, 수직이 아닌 수평의 구조를 가진 건축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지난 11월 코치에서 열린 자신의 대규모 전시를 앞두고는 '도쿄계획 2020-고양이 건축의 5656원칙(東京計画2020-猫ちゃん建築5656原則)'이란 이름의 새로운 청사진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1960년 단게 겐조의 '도쿄계획1960'을 의식한 새 시대 건축에 대한 제안이었고, 도시를 위가 아닌 아래서, 고양이 시점에서 설계한다는 그림의 선언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엔 건축과 도시의 주어를 교체해보는, 전환의 비젼이 담겨있습니다.


"본래 오피스가 등장한 건 19세기 후반, 의외로 최근입니다. 그 전까지는 일도, 개인적인 생활도 모두 집을 중심으로 이뤄졌습니다. 하지만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오피스가 사회에서 점점 메인의 자리를 차지하게 됐고, 집은 조역으로 밀려납니다. 하지만 근래 IT 기술이 발달하며 생활의 장소 뿐 아니라 일, 그리고 커뮤니케이션 장으로서도 집의 기능이 확장하고 있습니다. 집이 다시 본래의 자리를 되찾기 시작했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이는, 최근 일본에서 책으로도 출판된 '사요나라(さよなら, 작별 인사) 오피스'란 말과도 상통합니다. 건축가이자 '일본 경제 신문'의 테크 부분 부편집장 시마즈 쇼가 펴낸 이 책은 자택 근무, 텔레 워크로 더이상 쓸모를 느끼지 못하는 오피스의 축소, 그 후의 향방에 대해 고찰한 서적입니다. 쿠마 켄고는 이에 동의하면서도, 코로나 이후 어쩔 수 없이 확대되고 있는 텔레 워크에 대해 아래와 같은 말을 더합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오피스란 개념의 변화입니다. 지금까지 오피스라고 하면 실질적인 공간을 지칭했고, 그게 사회의 상징이었습니다. 물리적인 공간이 오피스였죠. 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 대유행 이후, 일본 전역에서 사원들이 흩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흩어진 사원과 사원 사이의 네트워크, 저는 그 자체가 '오피스', 또는 '사회'가 되어간다고 느낍니다." 그야말로 '사요나라 오피스'입니다.


'긴자 식스' 내에 위치한 공유 오피스 Wework. 다다미 방에서의 오피스 워크라니. '공유 오피스'란 단순히 함께하는사무실을 이야기하는 게 아닐 거에요


물리적 공간이 아닌 관계, 이어짐, 네트워크로서의 오피스. 재택 근무는 감염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취했던 고육지책이지만, 동시에 처음으로 일, 사무실이 아닌 곳에서 자신의 공간을 탐색하게 했던 사건이기도 합니다. 쿠마는 "텔레워크는 처음으로 인간에게 원하는 때, 원하는 곳에서 일을 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했다"고까지 이야기합니다. 그의 사무실은 현재 도쿄에 있지만 직원들은 미야기현 토미야(富谷)에 거주하며 중국 쪽 일을 하고, 오키나와 이시가키(石垣)에 살면서 도쿄 쪽 업무를 담당하기도 합니다. 물리적 공간을 경유하지 않는 네트워크로서의 '오피스.' 공간을 세우면서 만들어지는 관계(생활)도 있지만, 공간을 지움으로서 드러나는 관계(생활)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쿠마가 보여주고 있는 양극의 활동 반경에 대한 코멘터리처럼도 읽힙니다. 쿠마는 타카나와 게이트웨이 역이나, 카도카와 그룹의 대규모 복합 문화 시설인 사이타마현 도코로자와 시(所沢市)의 '카도가와 무사노시 뮤지엄(角川武蔵野ミュージーアム)', 그리고 2021년 개관을 앞두고 있는 와세다 대학 내의 무라카미 하루키 도서관과 같은 대규모 작업을 진행함과 동시에, 보다 관계의,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하는 (작은) 건축에도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작음의 설계, 그리고 자연으로의 귀화


2017년부터 시작한 캠핑 브랜드 스노우피크와와 함께하는 '여행하는 집', 주거 상자(住箱)를 비롯해서, 2013년 오모테산도에 오픈한 파인애플 케이크 가게 '써니 힐즈(サニーヒルズ)', 지난 해 키치죠지 하모니카 요코쵸(ハモニカ横丁) 재개발로 참여한 야키토리 가게 '텟짱(てっちゃん)' 등은 건축이 일상에 적용되고, 동시에 도시 계획의 일부로 어떻게 자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실천입니다. 파인애플 케이크 가게 '써니 힐즈'는 6cm정도의 나무 조각을 무수히 이어붙이는, 일본 전통 공법 '지도리(千鳥)' 방식으로 파빌리온에 가까운 외관을 디자인했고, 하모니코요코쵸의 야키토리 가게는 버려진 랜 케이블을 무작위로 엮어 내장을 꾸몄습니다. 대량 생산, 규모의 건축를 추구했던 근대 공업화 시대에 대한 안티 테제로서의 '작은 건축'을, 쿠마는 보다 가까운 일상의, '크기'로서의 방식으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때로 인테리너 건축가가 됩니다.


우리 식으로 이야기하면 뒷골목 시장. 쿠마는 오래된 골목 상점가, '요코쵸' 재생에도 힘쓰고 있어요. 미타카와 키치죠지의 쿠마가 '다시 완성한' 작은 가게들.


"작다는 건 단순히 스케일의 문제 뿐 아니라, 디테일이 밀접하게 만들어져있는 상태로도 이어집니다." 쿠마는 '작음'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집의 위치도, 모양도, 크기까지 변용이 가능한 가장 도발적인 주거 형태, '주거 상자'에 대해서는 "작은 공간이 세계를 향한 창이 되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낸다고 의식했습니다. 세상에 작은 집이 있고 그렇게 존재한다면, 그 집의 주인공은 나무이고, 사람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조금 그의 말을 따라서 이어보면, 세상에 작은 집이 있다면, 그 안에 삶이 담긴다면, 그건 아마 가장 작은 모델의 세상일지 모릅니다.


https://youtu.be/MAa0jdZkd4g


올해 쿠마 켄고가 보여준 작업 중에 시계 브랜드 '그랜드 세이코'의 공방이 있습니다. 이곳은 그랜드 그랜드 세이코의 창립 60주년을 맞아 리뉴얼한 이와테현 시즈쿠이시(雫石)에 위치한 시계 제작 스튜디오입니다. 시즈쿠(雫, 물방울)이시(石, 돌)는 지명에서 보이듯 일본에서 사계가 가장 선명한 곳이고, 그랜드 세이코는 창업 당시부터 지금까지 줄곧 'The Nature of Time'의 철학으로 시계를 만들고 있습니다. 봄에는 꽃이 피고, 여름엔 벌레가 지저귀고, 가을엔 홍엽이, 겨울엔 눈이 강가에 쌓이는 자연의 한복판. 브랜드가 공방을 소개하며 제작한 영상은 한 장인을 비추며 시작하는데, 그는 "제 안의 감각과 숫자를 서로 비추어가면서 작업합니다"와 같은, 좀 수수께끼같은, 신비로운 이야기를 합니다. 나의 감각과 숫자라는 왜인지 자연의 언어일 것 같은 말들. 쿠마는 나무의 리듬, 기둥, 벽, 지붕에 쓰이는 목재의 서로 다른 리듬을 조화하듯 아울러 '시간'의 공방을 만들었고, 삼각의 모양을 한 지붕에 대해 "하늘과 바람, 그리고 산과 건물을 잇고자 하는, 그런 제스쳐를 표현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지어야 할지, 어떤 건물이면 안전한 내일을 보장해줄지, 그러니까 코로나 이후 건축은 무엇을 해야하는지 막막하기만 한 시절, 쿠마는 자연에 다가가는 걸음으로, 그곳에 자리를 내어주는 품으로 또 하나의 건물을 내려놓습니다. 그의 이 '시간'과의 작업은 하나의 내일을 향한 '제스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이코의 전자 시계는 백만 분의 1초도 틀림이 없어 비지니스 맨들이 주요한 일이 있을 때 착용한다고 하는데, 사람이 시간을 자꾸 확인하는 건 그만큼 불안한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쿠마가 이야기하는 앞으로의 건축은 '자연에 시간을 새겨넣는 것과 같은 일'처럼도 보입니다. "60년이라는 건 사람 나이로 보면 환갑에 해당합니다. 환갑은 본래 인생이 한 바뀌를 돈 시간이고, 다시 태어나는 하나의 분기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양의 시대에서 질의 시대로의 이동, 시간이 태어나는 순간의 느낌, 그런 시간 축의 작업이었습니다. 건축가란 어떻게든 시간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 정확하지는 않지만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기억하는 것처럼, 최선은 아니지만 내일을 기약하는 또 한번의 차선으로. 불확시한 시대 불완전한 우리는 불완전한 자연 곁에서 불완전한 둥지를 틉니다.


https://youtu.be/aowdkl7JhNM

별 상관은 없지만, 요즘 가장 빠져있는 puma blue입니다.


*보다 간략하고, '인사이트'적으로 정리된 글은, 폴인 페이지에 공개되어 있습니다. 본 글은, 기사를 시작하며 생각을 정리하며 긁적여본, 밑그림과 같은 초고 같은, 그런 글입니다.


https://www.folin.co/story/16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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