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과 굿나잇의 365일들.
#01 어떤 날은 꿈속에 기억된다
이것저것 쓸 게 있어 영화를 보고 또 비하인드에 왔다. 키보드를 두드르는 사이 알바생이 교대됐고, 러닝하던 무리가 두바퀴를 돌았으며, 해가 지고있다. 쓰려던 것들은 쓸만큼은 끝냈고, 창밖에선 서너 번 바람이 불었으며, 핸드폰 배터리는 31%다. 회사에 다니고 있지 않으니 시간이 내맘대로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밤에 자는 것도, 일을 하는 것도, 노는 것도 누가 뭐라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계속 생각을 하자고 되뇌인다. 생각을 하지 않으면 멈춰있다는 불안감이 몰려올까 마음이 움츠러든다. 더위를 느끼며 글을 썼던 순간을 기억한다. 흐르던 음악이 멈췄던 순간을 기억하고, 엄마에게 우리 아들 장하다는 카톡이 왔던 순간을 기억한다. 곰돌이가 나가지 말라고 짖어댔던 순간 또한 기억한다. 편지로 꿈과 같았던 나날을 기록해놓는 <꿈의 제인> 속 소현처럼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든 되뇌고자 한다. 그러고 싶은 마음만은 지키려 한다. 못났던 나도 나고, 아팠던 나도 나다. 그 어느 하나 놓치고 싶지가 않다. 작고 사소한 것들이, 상처와 흉터가 쌓여 만들어 내는 삶이란 게 있다고 나는 믿는다. 병원에서의 두 달여, 비행기에서 흘렸던 눈물, 그리고 십 년간 써내려간 글과 그 추억.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이지만 과거가 지닌 의미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이 쓰디 쓴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과거는 현재의 아픔에서 빛이 발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저녁 여덟 시 오십 구 분이다. 잊지 않기위해 그냥 한 번 적어본다.
#02 내것으로 하기 위한 너를 위한 선택
1번과 2번과 7번. 집에 도착한 선거 홍보물을 보고 처음으로 기권을 해야하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요즘의 뉴스를 보면 온통 코로나 뿐이지만, 와중에도 정치라는 소위 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사람들 사이에선 잡음만 들려오고, 이번만큼 아무런 기대도 없이 선거날을 맞이한 적도 없다. 그저 간만에 아무런 구실을 만들지 않고도 외출을 할 수 있는 날. 딱 그만큼의 기다림이 있었다. 원래 개표 방송의 엎치락뒤치락 보는 걸 꽤나 즐기던 사람이었는데... 이건 내가 나이를 먹어서만은 아니다. 엄마는 아침일찍이라 하기에도 이른 시간에 투표를 마치셨고, 미루다가는 귀찮음이 발동할 것 같아 아홉시가 조금 되지 않게 올해 아마도 딱 두 번만 입었던 간류의 점퍼를 걸치고 투표를 했다. 그저 따분하다 못해 무력한 한 표를 던질 요량이었지만, 엄마가 도장을 찍다 실수를 했다며 상심한 표정을 보이셨고, 생애 처음 쳐다도 보지 않았던 2번을 찍었다. 선거에 조금 나은 삶을 위한 한 표라는, 그런 순진무구한 정의가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내게 그건 엄마의 일그러진 얼굴을 조금 달래드릴 수 있는 한 표였다. 새벽 6시 무렵엔 도장에 뚜껑이 닫혀있었다고 하는데, 비닐 장갑을 낀 채 그 작은 뚜껑을 벗겨내는 건, 누군가에게 실수를 일으킨다. 별로 화를 낼 마음은 없고, 그저 우리 엄마, 가족들이 함께 밝은 얼굴을 서로 마주하는 게 내겐 이제 더욱 소중하다. 언제 그랬냐는 듯, 뉴스는 온통 선거판으로 뒤바뀌었는데, 내겐 가장 소박한, 조용한 선거철이 지나간다. 조금 보던 방송도 끄고, 도착한 지 한참 지난 잡지를 몇 페이지 넘기고, 하던 일을 마저 조금씩 끝마친다. 세상 모두를 위한 무언가가 아닌, 나와 내가 아는 누군가만을 위한 시간이란, 어쩌면 가장 가까운 정답이다. 맘마미아!
#03 세상 모든 '정반합'의 시작들
어제 나는 누나에게 잘못을 하나 했고, 사소하게 삐쳤고, 많이 울었고, 그래서 가슴이 아팠고, 눈이 부었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올랐다. 이게 어떻게 끝날까, 정리가 되기나 할까 싶었는데 누나가 아침에 내게 다가와 미안하다고 말했다. 오줌을 싸며, 아침 밥을 먹으며 생각을 해보려 했는데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제가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았다. 밥을 먹고 엄마는 사과와 참외, 오렌지를 들고 거실에 와 앉으셨다. 커피를 마시며 뉴스를 보았다. 곰돌이가 사과를 달라고 앵앵거렸고, 엄마는 밥 먹기 전엔 안된다고 하셨다. 심통이 난 곰돌이는 내가 보고 있던 신문 위에 앉아버렸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어느새 어제가 밀려가고 있었다. 오늘이 어제를 밀어내고 있었다. 아무리 흐린 날에도 해는 뜨고, 아무리 힘든 날 다음에도 내일은 온다는 걸 시간이 얘기하고 있었다. 굿모닝. 그리고 멍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