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이후, 난 어쩌면 나의 '자리'를 알 것 같았다
살아온 세월이 ‘약관'을 넘어가는 아파트엔 공사가 잦다. 사람 나이로 따지면 애 둘, 셋 쯤은 낳고 손자까지 본 아파트라면 어쩌면 그 횟수는 매일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태풍이 잦을 거라는 날씨에 대비해 샷시를 교체하는 쇳소리, 커튼을 다시 달거나 가구를 새로 들이는 우다닥우다닥. 이사를 오고 떠나는 한 시절 엔딩과 오프닝 의 소음과, 헌 집이지만 새롭게 살아보자며 문지방을 뜯어내고 새 살림을 들이는 어떤 ‘교체의 팡파레.’ 그러니까 20년을 살고도 또 하루를 살겠다며 다시 한 번 일어나는 오래되고 새로운 아침의 '뿌드득.' 집이란, 왜 하필 꼭 탈이 났을 때 그 자리를 가늠케 하는지. 그건 곧 우리가 나이를 먹었다는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이삿짐 사다리 소리가 바통을 주고받듯 이어지던 여름날, 나는 이곳을 ‘탈출'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스무살 언저리의 ‘독립'과는 또 다른, 집과의 이별이 그 무렵 왜인지 찾아왔다. 우리집은 인천 외곽의 20년된 아파트 13층. 엘리베이터가 또 하필 점검을 하겠다고 멈춰선, 지긋지긋한 '그 날’이었다.
코로나 3년, 집의 낌새가 심상찮다. 물론 우리 동네 아파트의 ‘수선한 이사 풍경'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숙박객을 잃은 호텔들이 빈 방을 ‘단기 거주'용으로 전환 장사에 나서고, 최근 일본에선 14일 자가 격리 기간 전용 호텔마저 등장해버렸다. 돌연 집이 ‘사무실'이 되어버린 탓에 ‘재택근무 난민’이 되어버린 이들을 위한 ‘호텔같은 오피스', 오피스 같은 호텔' 플랜도 심심찮게 팔리는 모양이다. 나는 지난 봄 끝무렵 동교동 언저리에 작은 테이블 자리 하나를 얻어 종종 ‘출근 아닌 출근'을 하기 시작했는데, 새삼 집은 ‘무엇을 위한 공간'인가. 엄마 소유 50평짜리 아파트의 널찍한 방, 원하면 부엌(식탁)이나 거실(소파)에 앉아 해도 될 ‘것'들을 난 왜 굳이 밖에 나와 하려하(고있)는 걸까. 그것도 돈까지 써가며.
그러니까 집은 내게 어떻게 필요하고 또 필요하지 않은가. 의식주를 포함 생활 대부분을 소화해내면서도 집은 정작 일을 하려면 잘 손에 잡히지 않는 '미스테리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묘한 삐걱거림'은 과연 너 때문인가, 나 때문인가. 지난 가을 나와 랜선으로 인터뷰를 했던, 디자이너 나가오카 켄메이는 ‘집은 애초 업무에 적합하게 설계된 곳이 아니에요.’라 말하기도 했는데, 우리의 일상은 사실 울트라 B형 만큼 예민하고 섬세하게 설계되어 있는걸까. 일과는 물론 감정과 기분에 따라 제각각의 ‘공간'을 필요로 할 만큼. 그런데 ‘일과'는 또 무엇인가. 기분이 하염없이 바닥을 치던 오후. 난 카페 비하인드가 몹시도 그리웠다.
코로나가 시작하고 반 년, 의도치 않게 두 명의 건축가, 한 명의 공간 디렉터와 디자이너 (활동가)를 인터뷰했다. 그저 ‘안나가는’ 프리랜서의 편향된 업무 내역에 불과하기도 하지만, 근래들어 유독 ‘공간'을 생각할 때가 많다. 아무일도 없는 화요일 오전 어디에서 무엇을 해야하나와 같이, ‘아무런 문제가 없어 문제가 되는' 것들. 혹은 지금 내가 하고있는 일들은 ‘어디에서 이뤄져야 하는가'와 같은 조금은 문제같은 문제들. 그래서 세상엔 ‘시간표'라는 게 있고, 어느새 ‘다이어리'는 ‘플래너'란 이름으로 팔려나가고 있는걸까. 집에서 (본격적으로) 일도 하고, 호텔이 자못 ‘사무실'을 자처하고 나서는 지금, 모이지 말라면서 자꾸만 ‘공유 스페이스'들까지 생겨나고 있는 요즘, 어쩌면 이건 보다 커다란 이야기를 하고있는지 모르겠다. 기분 전환용 인테리어나 집에 꽃을 몇 가지 들이는 구색 맞추기 정도의 하루가 아니라, 재개발이거나 리노베이션, 혹은 전환의 순간이거나 해체와 재구성을 위한 ‘전초'의 증상들. 하물며 지하철이나 버스도 배차를 조정하는 시절에, 난 여전히 잘 알지 못하는 ‘나의 내일'은 접어두고, 공간의 미래를 생각하자고 생각했다. 30년 넘게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나의 ‘등짝같은 이야기’를.
집과 회사, 회사와 집. 어쩌면 그저 고정적인 ‘루틴의 장소’가 없는 탓인지도 모른다. 회사에 다닐 땐 늦어도 오전엔 일어나 회사에 가고 일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오는 약속된 ‘일과의 노선'이 있었지만, 지금의 나는, 다시 말해 코로나 이후 나의 하루는 일어나는 시간이 아침, 침대에 눕는 시간이 저녁 무렵에 잠에 드는 순간이 하루의 마지막에 다름없다. 매우 부끄러운 이야기이기도 한데, 그런 뒤틀린 일과 속에 이상하게 떠오르는 ‘공간 (감각)’이 있다. 그리고 내게 이건 코로나 이후 더 선명해졌다는 '확신의 가설'도 있다. 풀어보면 정해진 시간에서 ‘공간'은 새삼 돌아볼 여지(필요)가 없지만, 매일이 매일같이 변하고 불규칙한 하루에 공간은 시간보다 더 뚜렷한 ‘기척'을 낸다는 것. 돌려말하면 공간이 만들어내는 하루, 그런 일과가 엄연히 발생하고 흘러간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편도 2시간 동네 카페' 비하인드를 가던 날의 나의 주관적이고 비효율적인 시간표 같은.
그렇다면 나는 이걸 왜 굳이 코로나 이후 알아차렸을까. 일본에서 수 십 곳의 스타벅스 매장을 만들어왔던 공간 디렉터 타카시마 마유는 “마스크를 쓰고 거리 두기를 이야기하지만, 그렇기에 더욱더 (사람과) 함께라는 의식이 강해졌다고 생각해요”란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이를 나의 ‘처지’에 대입해보면 ‘이름없던 하루’가 이제야 이름을 알게된 것 같은 발견의 순간들이 지금 비어버린 2m, 그 거리를 채우고 있다. 그러니까 집은 왜 집이고, 직장은 왜 직장이며 카페는 왜 카페인지 새삼 돌아보게 하는 ‘시간'이 어쩌면 찾아왔다. 돌연 나타난 코로나는 세상을 어떻게 뒤집어 놓았는지 (아직 잘) 모르지만, 카페가 사라진 자리에 카페의 일상이 드러나고, 사무실을 벗어나 ‘자유로운 일의 환경'을 만나고, 집에 (더) 머물며 보이지 않던 ‘머뭄의 하루'를 만난다. 하나의 부정은 곧 다른 하나의 긍정. 올림픽 경기장을 설계한 쿠마 켄고는 ‘재택 근무는 인류가 처음으로 일에 있어 자유를 부여받은 사건'이라 이야기했다.
단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도쿄의 30대 남자 하마마즈 신지는 얼마 전 ‘NOT A HOTEL’이란 걸 만들었다. 이름 그대로 호텔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부정형의 호텔인 셈인데, 이는 이동이 불안해진 시절 여행과 일상을 포개놓으려는 ‘더함'의 부정이기도 하다. 하마마즈는 자신의 블로그 ‘노트'에 ‘NOT A HOTEL’은 주택과 호텔, 오피스의 교집합에 해당하는 형태라 설명하고 있다. 조금 풀어보면 'NOT A HOTEL’은 ‘주택'을 온라인에서 사고 팔 수 있는 (일상의) 물건(상품)으로 간주하며 설계되어 있다. 여행이 멀어졌다 이야기하지만 어쩌면 그건 일상이 멀어진 일이고, 그렇게 불안해진, 동시에 자유를 얻은 일상에 기존의 카테고리는 이미 구태의연, 별 의미를 갖지 않을지 모르겠다. 우리가 오피스를 떠나 데스크를 펴는 것처럼, 내가 집을 떠나 집을 생각하는 것처럼.
‘NOT A HOTEL’은 집을 비울 때 단기간 렌트를 할 수있는 구조를 취하고 있고, Airbnb의 포맷을 가져온 듯한 이 형태는 일과 여행, 그리고 일상을 ‘하나의 공간' 안에 버무리며, 전체적 ‘일상의 반경'을 확대한다. 회사가 아닌 집에서 일을 하고, 집 안에 집을 들이기도 하고, 집 밖에서 집을 꿈꾸는 시절, 우리가 잃은(찾은) 건 어쩌면 ‘갇혀있던 공간(에서)의 자유'가 아닐까. 사람이 아닌 공간이 이동을 하기 시작한 시절, ‘약관'을 지난 아파트는 어쩌면 새로운 시대의 아침을 맞으려 한다. 공간을 지워낸 자리에 우리의 일상을 닮은 공간이 태어나고, 난 그곳에서 그저 조용히 노트북의 스위치를 켜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