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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인배 Dec 25. 2023

알 수 없던 두근거림

일에 대한 열정과 설렘이 있을 때도 느끼던 두근거림... 이번엔 달랐다.

평소와 다름없는 밤 11시, 퇴근길에 남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약을 먹어도 뭐가 나아지는 게 없어... 힘들어, 토할 거 같아.]


정신의학과에 주기적으로 방문하고 약을 먹기 시작한 지 한 달, 나는 감기약처럼 바로 효과가 나타나길 기대했던 것 같다.

약을 받고부터는 빨리 나아야지, 빨리 마음이 건강해져야지, 빨리 이 기분과 불안에서 벗어나야지 하는 마음에 더 조급해졌다.


약을 먹기 시작하고, 잠에 드는 것은 쉬워졌지만 일어나기가 어려워졌다.

약을 먹기 시작하고, 불안을 잠재울 수는 있었지만 마음의 불편함은 없어지지 않았다.

약을 먹기 시작하고, 이제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생겼지만 내가 제자리에 멈춰버릴까 봐 겁이 났다.


'나아지긴 하는 건가, 이대로 계속 바뀌는 것이 없으면 어떻게 하지...'


약을 먹는다고 한들, 이미 발생한 팀원과의 트러블이 잦아지거나 약해지진 않았다.

약을 먹는다고 한들, 맡은 일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지 못하던 옆 팀이 갑자기 맡은 일을 잘해오진 않았다.

약을 먹는다고 한들, 계속 대기 상태가 되어있던 사업 계획서가 승인되진 않았다.



병원에 가서 한 첫마디의 시작은 팀원과의 트러블에 대한 것이었다.


"저희 팀에 새로 합류하신 분이 있는데요. 이상하게 그분이랑은 자꾸 이야기가 틀어지고 불편해요.

그분이 무엇을 바라고 희망하는 지도 알겠지만, 지금 저희가 가는 방향이 그렇게 가긴 어려운 방향이라는 걸 설득하기가 어렵네요.

그걸 뭔가 제가 자신의 의지를 막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 같은데, 가능하면 저도 서로 좋다고 생각하는 협의점을 찾아가고 싶지만... 저 혼자만의 의지로 되는 일이 아니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고 그냥 답답하고 속상하고 서운해요. 저를 믿지 못하는 거 같기도 하고..."


해당 팀원이랑 이야기 나눌 때는 내가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나도 저 심정이 뭔지 알아서, 지금의 내가 얼마나 답답하고 이해 안 될까, 내가 얼마나 바보 같을까 하는 속상함이 컸던 것 같다.

그래서 긴장했을까.

그 팀원과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는 꼭 가슴이 두근거렸다.

일에 대한 열정과 설렘이 있을 때도 느끼던 두근거림... 이번엔 달랐다.


내 이야기를 들은 의사 선생님은 스스로 '이상적인 팀', '이상적인 팀장'의 모습을 그려놓고 그에 맞지 않는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하고 있다고 하셨다.

스스로 기준을 높이고, '내가 생각하는 완벽'에 가까워지도록 자신을 압박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완벽'을 '목표'라고 불렀다.

목표를 향해 달리고, 목표를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이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내가 목표를 바꾸고, 목표를 잃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병원에서 처방된 약을 성실히 먹는 것뿐이었다.

그저, 설렘과 다른 그 이질적인 두근거림이 올 때마다 항불안제를 입에 넣었다.



그렇게 병원에서 준 약만 먹으며 하루하루 버텨가던 중, 회사에서 이상한 소문이 들려왔다.


"실장 되려고 그렇게 나선다고 하더라고요."


협업하고 있던 다른 팀 구성원들로부터 내가 팀장으로 만족하지 못해서, 실장 자리를 꿰차려고 저렇게 일에 나서는 거라는 추측 섞인 험담들이 나왔다고 했다.

내가 속한 조직의 실장 자리는 비어있었다.

그래서 더 윗 직급인 상무가 해당 실장을 겸직하고 계셨는데, 그 실장 자리를 내가 차지하기 위해서 저렇게 이렇게 일에 나서고 있다는 것이었다.


'지겹다...'


처음 든 감정은 지겨움이었다.

상처를 받는다거나 화가 날 새도 없이, 지겨웠다.


좋은 프로덕트를 만들어내고 싶었을 뿐인데,

좋은 팀을 꾸리고 싶었을 뿐인데,

모두가 함께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을 뿐인데,

나 혼자 진심이었나 보다.


내 일에 대한 욕심은 권력욕으로 비치고, 내 진심이 영전을 위한 관리로 비치고, 내 열정은 가식으로 비쳤다는 생각에 빠졌다.

그 수렁 속에서 스스로 자기 연민에 빠져드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일이 이렇게 재미없었던 시기가 있었나 할 정도로 재미없는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이후로는 설렘과 다른 그 두근거림이 아무 때나 찾아왔다.

열정과 설렘의 두근거림이 느껴지지 않은 지는 오래였다.

다른 종류의 두근거림을 느끼며, 그저 기계적으로 해야 할 일을 수행해 내고 있기에 지나지 않았다.


어느 날 밤에도 갑자기 두근거림은 찾아왔다.

약을 먹을까? 그냥 누워있을까? 고민하던 중에 숨이 막혀왔다.

호흡이 점차 가빠지면서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옆에서 자려던 신랑이 헉헉 대는 내 숨소리에 놀라서 내 어깨를 잡았다.

점점 호흡이 부족해졌다. 가슴이 답답했다.

아무리 가슴을 두들겨도 답답함이 풀리지 않고 숨쉬기는 자꾸만 어려워졌다.

그때 처음으로 느꼈던 것 같다.


'아, 나 진짜 뭔가 잘못되었다. 뭔가 안 좋아도 단단히 안 좋다. 나는 변해야 한다. 그래야 살 수 있겠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느꼈던 공황 증세였다.



일에 대한 열정과 설렘이 있을 때도 느끼던 두근거림... 그때의 두근거림은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불안으로 인한 두근거림은 나의 숨을 막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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