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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인배 Dec 18. 2023

일잘러의 속내

성장은 할 수 있을 지 언정, 삶의 평온함과 충족감은 느끼지 못했다.

"언니가 일잘러라서 일을 계속 더 주는 거야, 적당히 해야 안 맡기지!"

학부 동기에게 줄어들지 않고 늘어만 나는 업무량에 대해 한탄하자, '일잘러'라서 자꾸만 일을 더 맡게 되는 것이라 했다.


회사 생활을 시작한 이래로 나는 줄곧 '일잘러'라 불리었다.

나는 그렇게 불릴 수 있었던 이유가 나의 마인드 때문이라 생각한다.

보통 일을 잘하는 사람들은 '마인드도 좋다'라는 이야기를 함께 듣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나는 여기서 '좋은 마인드'는 기획자에겐 '책임감과 자부심'을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서비스 기획자/프로덕트 매니저/프로덕트 오너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는 '책임감 있는 태도'가 중시된다.

다른 직무라고 아니겠냐만은, 그들이 갖는 책임감은 내 업무 퀄리티에 대한 것만이 아닌 '매니저로서 갖게 되는 책임감'까지 포함되는 것이다.


기획자는 연차가 얼마나 되었든 간에 '매니저로서의 책임감'을 요구 받는다.

내 기획 산출물에 대한 책임감을 넘어, 사용자에 대한 책임감, 서비스에 대한 책임감, 그리고 함께 작업하는 협업자들의 리소스에 대한 책임감까지.


협업자들의 작업에 대해 책임감을 갖는 다는 것은 이 프로젝트를 꼭 의미있는 것으로 만들어야 함을 의미했다.

그들에게 유의미한 작업물로 남기를, 성공한 프로덕트가 되기를.

그런 바람들은 책임감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업무에 몰입하는 엔진이 되게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업무에 몰입하게 하는 엔진은 주객이 전도되었다.

점차 타인의 평가가 중요하게 느껴졌다.

유의미한 프로덕트를 만드는 것에 대한 책임감의 무게보다, '일 잘하는 기획자'라는 수식어가 내게서 사라지는 것이 겁나기 시작했다.


연차가 쌓일 수록, 일을 잘하는 구성원으로 위의 총애를 받는 것이 당연하고 익숙해졌다.

그 총애에 대해 누군가는 납득을 하고 누군가는 시기를 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당시의 나는 모두를 납득 시켜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정말 잘해서, 아무도 그 총애에 대해 의문을 갖지 못하도록 증명하고자 했다.


그것은 자신감의 표현이라기보다는 나의 불안을 숨기기 위한 방어였지 않았을까, 뒤늦게 생각해본다.


연차 대비 빠른 팀장 진급은 그동안의 나의 노력에 대한 보상이면서도, 새로운 증명을 위한 검사대였다.

일잘러라고 불렸지만, 나 스스로에게 늘 아쉬운 점과 부족한 점만 보였기에 불안했다.

나는 완벽한 사람이 아닌데, 나의 불완전함이 드러날까봐 오랜 기간 가슴 졸였던 것 같다.

가면증후군 같은 것이 아닐었을까 싶다.


가면증후군
: 자신의 성공이 노력이 아니라 순전히 운으로 얻어졌다 생각하고 지금껏 주변 사람들을 속여 왔다고 생각하면서 불안해하는 심리 (네이버 지식 백과)


불완전함에 대한 불안이 나를 계속 채찍질했고, 계속 성장 시켰던 것은 물론 사실이다.

성장은 할 수 있을 지 언정, 삶의 평온함과 충족감은 느끼지 못했다.

아이러니하지만, 그래서 또 계속 불완전함을 느꼈다.

그렇게 스스로를 괴롭히는 순환 고리를 계속 이어왔다.


그렇게 밖에 성장하는 방법을 몰라서.


나의 삶을 위해, 나의 마음 건강을 위해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고 나의 에너지를 사용하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아니, 생각할 수 없었다.

방식을 바꾸었다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의사 선생님의 몇 마디 진단으로는 아직 그 동안의 방식을 바꿀 다짐은 생기지 않았다.

이 방식으로 나는 이 자리까지 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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