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대인배 Dec 11. 2023

좋은 평가의 늪

스스로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도 못하면서도 자신에 대한 평가 기준은 높았다.

201N년 1월, 직전 해에 인턴으로 근무했던 회사에 공채 신입으로 입사했다.

서비스 기획자로 일할 수 있고, 부모님이 좋아하실만한 회사에 입사했음에 만족하고 안도했다.


나는 '진격의 신입 사원'이었다.

UX 관련 수업이 많은 학과를 졸업했던 덕에 상위/상세 기획서, 화면 설계서를 작성하는 것에 어색함이 없었고, 기획서와 설계서는 꼼꼼한 편이라 빠르게 실무에 투입/적응했다.

기획/개발/디자인 선배들과 무리 없이 커뮤니케이션을 시작했고 빠르게 조직에 녹아들었다.


하고 싶었던 일을 사회에 나와서 한다는 것은 매일매일이 긍정적인 자극이었고, 그 자극은 내가 더 열심히 일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당시의 팀장님은 늘 나에게 칭찬 일색이었다.

그 칭찬의 주제는 늘 신입 답지 않은 업무 역량이었다.


신입 사원이 아니야~이미 3년 차 같아! 3년 차!


원래도 기획자로서의 성장에 대한 욕구가 넘쳐흐르던 나에게 저 칭찬은 마치 하나의 지표 같았다.

'내 연차 수준으로 하면 안 된다. 더 잘해야지'

그래서 잘한다 소리를 들을수록 더 잘하기 위해 노력했다.

회사와 집의 거리가 멀었지만,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야근과 주말 출근을 반복하며 업무 퀄리티를 높여갔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당연히 긍정적인 피드백과 좋은 평가로 따라왔다.


그 좋은 평가 덕에 그 다음 해에도 다른 동기들보다 더 많은 업무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또, 내 주변에 여러 좋은 선배들이 있었고, 여러 가르침을 받아들이며 자만 없이 차근차근 성장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런 선배들을 만날 수 있었음은 운도 분명히 좋았던 것 같다.

그렇게 주변의 도움과 스스로의 의지로 성장하며, 좋은 평가를 받는 것에 익숙해져 갔다.


사회생활의 시작과 함께 지속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게 되면서, 스스로에 대한 기대 평가도 자연스럽게 높아져갔던 것 같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받은 피드백보다 더 나은 모습을 보여야, 그게 성장이니까.'

기획자로서 성장하고 싶은 욕심은 스스로에게 채찍질과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게 되었다.


더불어, 좋은 평가를 주던 사람들이 '아, 사실은 얘가 그 정도는 아니었구나'라고 평가를 바꿀까 봐 두려웠다.

스스로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도 못하면서도 자신에 대한 평가 기준은 자꾸만 높아져갔다.


그렇게 높아진 스스로에 대한 기대 평가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회사를 옮겨도 그대로 이어졌다.

몇 번의 이직에서도 운 좋게 성향이 잘 맞는 상사들을 만나서, 의도대로 프로덕트를 리딩하고 좋은 평가를 받고 신뢰를 얻어왔다.

그 결과로 8년 차라는 높지 않은 연차에, 규모가 작지 않은 회사의 기획팀을 맡게 된 참이었다.


지속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는 것에 익숙해지면서, 이 좋은 평가는 나의 성취를 가시화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계속 좋은 평가를 유지해야 하고 더 나아가 더 성장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원래도 완벽주의 경향이 있던 나의 완벽에 대한 강박의 시작이었던 것 아닐까.


완벽에 대한 강박
1.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함으로써 자신에게 돌아올지도 모르는 비난이나 비평을 면하려는 심리적 방어기제 ('완벽주의'에 대한 교육학 용어 사전)
2. 스스로 높은 기준이나 목표를 설정하고 그를 달성해야 한다고 자신을 채찍질하며, 실패에 대해 두려움을 크게 느끼는 것 (병원 상담 시 들은 이야기 요약)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완벽주의와 완벽에 대한 강박의 분리이다.

나에게 존재하는 완벽주의가 문제였던 것은 아니다. 더불어, 병원에서도 완벽주의를 고쳐야 한다고 한 적도 없다.


다만, 심리적으로 스스로를 강하게 압박했던 것이 문제가 되어 불안과 우울이 생겨났다.

완벽을 이루어 내고자 하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자책하고 엄격하게 조이며 괴롭히고 있었다.


그러나, 병원에 가기 시작하면서도 내가 나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했다.


내 방식이, 내 사고가 틀렸을 리 없어.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내 성과와 성취가 이어지지 않을 거야.

어느 정도는 괴로워야 성장도 따라오는 거지.
내가 지금 잠시 약해진 거야.


내 마음가짐을 바꿔야 한다는데, 그렇게 해서 어떻게 좋은 성과를 내고 역량을 성장시킬 수 있는 것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아직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스스로 느끼는 불안과 우울감을 '이 정도쯤이야'로 가볍게 치부했다.

'내가 지금 너무 안 좋은 일이 몰려서 잠시 약해진 거지 원래도 이 정도는 다 이겨냈다'라고.


병원에 간지 2주째에 나는 스스로 변화하기를 포기했다.

감기처럼 잠시 약을 먹고 나면 괜찮아질 테니까.



이전 01화 어떻게 오셨나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