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꾼다
1) 금요일 밤
졸리다. 이대로 잠에 들면 꿈을 꿀 것이다.
어렸을 적에 사람들이 나에게 꿈이 무엇이냐고 물어오면 나는 영화감독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요즘엔 나에게 나의 꿈이 무엇이냐고 물어봐주는 사람은 없고 내일 무엇을 할 계획이냐고 물어봐주는 사람은 많다. 어렸을 적에 난 꿈이 없었는데 사람들은 꿈을 정하라 했고 사실 나는 영화감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고 그냥 영화 보는 것이 좋을 뿐이었다. 요즘 영화감독이 되는 꿈을 꾸고 화창한 날 공원에 누워서 강아지들 구경하는 꿈을 꾸지만 사람들은 나의 꿈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꿈은 스무 살 때까지만 꿀 수 있었고 이제 나는 꿈을 꿀 수 없다.
졸리다. 깊게 잠들면 꿈을 꿀 수 없다.
요즘엔 꿈을 꾸지 않는다. 밤에 자려 누우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함 방과 이상하리만큼 적막한 나의 방이 두렵다. 고요하면 평화로워야 하지만 고요해서 공포스러워하는 나의 두뇌는 잠들기 직전에 꿈을 꾸고 항상 악몽을 꾼다. 나에게 악몽은 판타지가 아닌 현실이다. 아니다 사실 그것은 거짓말이다. 나에게 악몽은 현실이라기보다는 잠들기 전 나의 두뇌가 되뇌는 나의 오늘 하루이자 내일 아침이고 나는 그렇게 나 자신에게 속삭이는 나 자신이 싫어서 악몽에서 깨어나기 위해 귀에다 에어팟을 꽂고 조용한 음악을 튼다. 그렇게 나 자신과 거리를 두고 잠에 들면 나는 꿈을 꾸지 않는다. 꿈이란 것은 나 자신과의 대화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고 나는 내 자신과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고 할 말도 없다. 나는 사실 꿈을 꾸지 않는 사람이다. 에어팟을 다시 꽂은 나의 귀에서는 톰요크의 <Dawn Chorus>가 나오고 있다. 톰요크는 나에게 다시 할 수 있다면 할 것이냐고 물어와 온다.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거 같다는데 왜인지는 잘 모르겠다고 한다. 소용돌이의 중앙에 있다고 한다. 그다음에는 무엇이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다. 나는 다시 잠에 든다. 해가 지고 뜬다.
2) 토요일 아침
오늘은 토요일 아침이다. 의외로 평화로운 오늘 나는 오랜만의 휴일인데 밖에라도 나가보아야겠다 싶어서 옷을 대충 입고 현관을 나섰다. 우리 집에서 십오 분 정도 걸어가면 파트리샤 그린이라고 하는 조그마한 공원이 있고, 그 옆에는 실내인지 야외인지 모호하게 간이로 건물을 지어놓은 듯한 커피숍이 하나 있는데 그곳은 12온스짜리 커피를 16온스짜리를 파는 것 마냥 가격을 책정해서 판매한다. 가격에서 묻어 나오는 자신감이 어딘가 마음에 들어서 나는 매 주말 시간이 나면 공원으로 걸어가서 그들이 부르는 값에 집에서 내릴 수 있을 법한 맛의 커피를 구매한다. 설탕이 들어간 토닉을 시킬까 한국인답게 그냥 아메리카노나 시킬까라고 고민 중이던 나는 이분법적인 사고에 갇히지 말아야 하기에 콜드브루를 시켰다. 뒤에 있는 한국인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키는 것 같았는데 나는 그 순간 내가 미국인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특별해진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질 무렵, 바리스타는 나를 불렀고 나는 커피를 받아 들고 앞에 보이는 벤치에 앉아서 담뱃불을 켜고 이제는 너무나도 유명해져 버린 커피와 담배의 실제 조합은 어떤지 실험해 보았다. 담배를 한 모금 빨고 숨을 머금은 채로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니 둘을 같이 들이키면 무슨 차이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순간 <커피와 담배> 영화가 생각나고 나는 행복해졌다.
벤치에 앉아서 앞을 바라보면 약 이십 평 정도 되는, 풀들이 듬성듬성 자라 있는 작은 초원 같은 공간이 있다. 스크린을 보는 것이 너무나도 지겨워진 나는 벤치에 앉아서 내 앞에 보이는 광경을 영화를 보는 것 마냥 지켜보았다. 이 벤치에 앉는 것은 용산 아이맥스 I열 정도에 앉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데, 문제는 그날마다 앞에 보이는 영화가 무슨 장르일지 누가 등장할지 아니면 그냥 옆에 누가 앉을지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저번주에는 일을 하다가 한 시간 정도 시간이 비어 어김없이 공원으로 향했는데, 의자에 앉아서 커피 한 모금을 들이켜니 웬 노숙자 한 명이 다가와서 담배 한 대만 빌려줄 수 없겠냐고 물어보았다. 빌려준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러면 내가 빌려주면 담배 한 대 돌려줄 거냐,라고 혼자 생각하던 도중에 나는 그래도 파워포인트 만들어서 상사한테 제출하려면 적어도 오후 네시까지는 살아있어야 하기에 웃음을 지어 보이며 담배 한 대를 빌려주었고, 그러려는 순간 라이터가 필요했는지 라이터를 주면 안 되겠냐고 배시시 웃으며 물어보았다. 왜 담배는 빌려달라고 하고 라이터는 그냥 달라고 하는지, 그 모순적임에 대해 생각하며 나는 나의 삶이 어딘가 웃기다고 생각했고 나는 그래도 젊은 프티 부르주아 정도는 된다는 생각에 그냥 담뱃갑도 가져라고 하면서 내 모든 것을 다 주었다. 그때 이참에 담배 끊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노숙자는 굉장히 행복해하며 여러 번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였고 나와 그 둘 다 행복해졌다.
오늘은 무엇을 볼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면서 벤치에 앉아있던 나는 강아지들이 등장하는 것을 보고 행복해졌다. 오늘 초원에는 강아지 세 마리가 뛰어놀고 있었는데, 주인이 모두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세 마리 모두 저먼 셰퍼드였다. 변두리에는 조그만 강아지들이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는데 강아지들마다 성격이 다르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다양한 강아지들이 있는 미국이라는 나라는 사람도 다양하고 강아지도 다양해서 어찌 그리 다양한지, 이 나라가 존재한다는 것이 기적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 오늘 장르는 마치 고레이다 히로카즈 영화를 보는 것 마냥 그냥 잔잔하게 흘러가는구나. 고레이다 히로카즈 생각이 날 즈음에 나는 일을 시작하기 전에 무조건 주말에는 영화를 하나는 보러 가야지,라는 다짐을 하면서 샌프란시스코의 아티스트들과 본인이 아티스트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사는 미션 디스트릭트에 있는 록시 시어터의 연간 회원권을 백오십 불 주고 구매한 것이 생각이 났다. 나는 메타인지 능력은 어느 정도 되어서 내가 아티스트라고 착각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니지만 사실 속으로는 피식, 그래 나는 아티스트야,라고 착각은 가끔 하고 살아서 미션 디스트릭트라고 부를 수 있을지 없을지, 여기 산다고 하면 다들 조금은 애매해하는 그런 변두리에 있는 고층 아파트에서 살기로 결심했었다. 아무튼 나는 지난 한 달 동안 영화를 한 편도 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고 나에게 스크린을 본다는 것은 엑셀이나 파워포인트를 보고 있다는 것과 동일시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 슬퍼져 오늘은 영화 한편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핸드폰을 들고 록시 시어터 웹사이트에 들어가서 오늘은 무슨 영화 하나, 하고 생각하면서 리스트를 뒤져보고 있는데 오늘 저녁 여덟 시 오십 분에 중경삼림을 보여준다고 했다. 나는 왕가위의 영화를 좋아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니 왕가위 영화들은 죄다 군대에서 보았다는 것이 떠올랐고 그렇기에 오인치 짜리 아이폰으로 홍콩감성을 느껴본 셈이었고 왕가위가 내가 본인의 영화를 오인치 짜리 핸드폰으로 보고 너무 잘 보았다고, 너무 존경한다고 말하는 소리를 들으면 무덤에서 일어나서 나를 때릴 것이 분명했다. 근데 중경삼림을 보러 가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왜 내가 유일하게 시간이 비는 토요일 저녁에 중경삼림을 보여주는 것일까, 신은 나에게 이 영화를 보러 가라는 것일까 보러 가지 말라는 것일까 등과 같은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고 그렇다, 나는 꽤나 이기적인 사람이어서 내가 하는 일과 당하는 일과 주체적으로 하는 일들도 신이 어떠한 의미로 나에게 부여했다고 믿는다. 그렇게 믿으니 행복해졌고 나는 결국 티켓을 구매하지 못하고 저녁 일곱 시쯤 신에게 중경삼림을 보지 말지 결정해 달라고 부탁했다.
햇빛이 나를 쏘았고 나는 오늘 선크림을 바르지 않고 나왔다는 것이 떠올랐다. 나의 피부 노화가 가속화되면 안 되지만, 주중에는 항상 실내에 앉아있다 보니 오히려 자외선 좀 받는 것이 건강에 좋은 것이 아닐까. 담뱃불을 끄고 나의 신발을 바라보니 동그란 모양으로 햇빛이 쏘여지고 있었는데 순간 이창동 영화 <밀양>의 마지막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 햇빛을 그렇게 사랑하는 이창동 감독은 나의 삶에게도 영향을 끼쳤고, 그렇게 신발을 바라보고 있을 무렵에 이렇게 나의 발에 쏘여지는 햇빛을 바라보면서 이창동 영화를 떠올리는 나의 모습은 분명 전에도 이랬던 적이 있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어디서 내가 이런 기분을 느껴보았는가, 돌이켜 생각해 보았더니 나와 꽤나 친했던 나의 맞선임이 전역하기 이 주 전쯤인가, 나는 전역이 육 개월인가 남아서 미래가 보이지 않을 무렵에 부대원들과 같이 주말에 물놀이를 하러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렇게 힘들고 매일같이 시간이 흐르지 않던 군대였지만 그렇게 가지 않을 것만 같던 A병장도 전역을 한다는 생각에 씁쓸해하면서, 밑의 계곡에서 물놀이를 마치고 계단을 타고 위로 올라와보니 간이 다리에 가만히 서서 아래에 있는 계곡물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A병장님 뭐 하십니까, 하고 옆에 다가가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보니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는 그냥 햇빛 보고 있었다,라고 답했고 나는 다시 바라보니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그곳에는 햇빛이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었고 나는 그때부터 햇빛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이 주 뒤에 전역했고 나는 그가 추천해 준 대로 그가 전역하던 날에 이창동의 <밀양>을 보았다.
밀양은 우리나라 도시 이름이기도 하지만 영제는 <Secret Sunshine>이다. 밀양이라는 제목도, 시크릿 선샤인이라는 제목도 각자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내가 미국의 왓챠 정도라고 여길 수 있는 크라이티리언 채널에 들어가서 밀양을 검색했을 때 시크릿 선샤인이라는 제목을 처음 보았고 그때 심장이 쿵 가라앉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영제가 <밀양>이라는 영화를 해석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창동 감독은 햇빛을 정말 좋아해서 <시>에서 잠깐의 아름다움이 나타나는 장면에서도 할머니가 사과를 들고 정말 작게 들이치는 햇빛에 사과를 내밀고, <밀양>의 마지막 장면도 카메라가 천천히 움직이며 그림자가 있던 곳에 작게, 정말 아주 작게 햇빛이 들어오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주인공은 너무나도 고달픈 인생을 살아가고, 정말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행복은 무엇일까 존재는 하는 것인가, 우리는 왜 태어나서 그렇게 자신을 자해하며 살아가는가, 나는 군대에 있고 이곳에는 행복이 없는 것 같은데 그러면 아름다움은 존재하는 것인가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이렇게 아무 연관 없고 비관적이라고도 할 수 없는 건조한 생각들이 매일같이 떠오른 즈음에 햇빛을 보았던 맞선임은 전역했고 나 역시 햇빛을 볼 수 있었다.
내가 천주교라고 하기에는 솔직히 성당에 간지 정말 오래되었기에 함부로 말하기에는 조금 애매하고, 그럼 한발 물러서서 신의 존재를 믿는다고 하기에도 조금은 애매하지만 나는 햇빛의 존재를 믿는다. 고층 아파트의 24층에서 살아가고 있는 나는 매일같이 해가 뜬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햇빛을 볼 수 있는 순간들은 매일이 아니다. 그래도 그렇게 벤치에 앉아서 나의 신발을 보고 전날 밤이 떠오르고 군대에서 햇빛을 처음 보았을 때의 순간을 떠올리니 나는 신이든 햇빛이든 무언가에 나의 운명을 맡겨볼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고 다시 구름이 들어와 햇빛이 사라질 무렵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나의 집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