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재경 Oct 14. 2024

혼자 우버를 타고 집에 들어온다. 기사님에게 집 앞이 아니라 한 블록 정도 전에 세워달라고 부탁한다. 길에 내려 골목길로 들어가면 내가 좋아하는 가로등이 있다. 밤에 돌아오면 이 가로등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운다. 영원했으면 좋겠는 순간들이 있고 가로등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는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와 동시에 만약 이 순간이 영원했다면 나는 그렇게 그 순간을 붙잡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 집에 들어와 라면을 끓인다. 원래는 탄수화물은 조심해야 하기에 라면에 밥을 말아먹지는 않지만 오늘은 밥을 말아먹고 싶었다. 라면을 먹자마자 대충 싱크대에 던져두고 침대에 누워 불을 끈다. 방에 라면냄새가 진동하는 것이 싫어 창문을 연다. 창문 밖에서 이제는 제법 쌀쌀한 가을공기가 방에 들이닥친다. 이불을 가만히 덮고 있다가 라면 때문인 것인지 어딘가 불쾌한 피곤함 같은 것이 나를 덮쳐오며 나는 천장을 바라보며 나의 천장엔 정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옆의 벽을 바라보고 영화 포스터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나의 책상을 바라보고 아 저 영화 좋아하지도 않는데, 저건 내 영화가 아니다. 고개를 드니 로봇청소기가 방전된 채로 방치되어 있었고 내 방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의 방은 백지. 침대도 백지 포스터도 백지 블라인드도 백지 문도 백지 거울을 보니까 흑지 어두워서 아무것도 없었고 백지 그러자 세탁기가 요란하게 사이렌 소리를 내고 나는 내가 빨래를 돌렸다는 것을 깨닫는다. 건조기에 빨래를 넣고 침대에 다시 눕는다. 나는 매트리스 받침대만 사고 프레임은 사지 않았는데 지난 두 달 동안엔 매트리스를 뒤집어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다고 뒤집어 보기에는 나는 이미 침대에 누워있는걸, 아, 나의 방바닥에 곰팡이가 슬었을까. 내 방은 백지가 아닐 수도 있고 흰색과 초록색일 수도, 그저께 간 모임에서는 나를 한 세 번째 정도 본 사람이 나는 고통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게, 나는 고통을 좋아하는 것 같아? 응, 고통을 좋아하는 것 같아, 마치 홍상수 영화 대사를 뱉듯이 고통을 좋아하는 것 같아, 나는 왜 고통을 좋아하는 것 같아? 음, 그러게, 고통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 아니야? 음, 아름다움? 고통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고? 하하, 나는 웃었다. 고통이 아름다워? 세상엔 고통스러운 사람들이 너무 많다. 고통이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 그건 너무 이기적이야. 아, 그런가, 하하. 너는 왜 고통스러운데? 아니, 나는 고통스럽지 않아, 너는 정확히 틀렸어. 하하, 정확히 틀렸어? 누가 봐도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은데? 나는 고통스럽지 않아! 나는 고통스럽지 않다. 시간은 새벽 두 시였고 나는 이곳에 더 이상 있으면 안 될 것 같았고 잠깐만, 내가 있으면 안 되는 이곳이라는 장소가 이 아파트인지 이 구역인지 이 도시인지, 갑자기 나의 뇌가 죽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나의 뇌는 부패하듯이 비대해졌고 나는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수 없었다. 나는 고통에서 자유롭기 위해 그곳을 떠났고 이곳을 떠났다. 아니야 그건 거짓말이야 나는 아직 이곳에 있어. 어제는 나를 처음 만난 사람이랑 하루종일 시간을 보냈는데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인생을 왜 사는가? 이제는 질문을 듣기만 해도 뻔해서 뻔한 만큼 도저히 진심일 수 없어 웃음이 나오는 그런 질문을 직접적으로 할 수는 없어 왜 죽지 않는가? 이건 다른 질문인가? 왜 죽지 않는가. 초등학교 이학년 때 한창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고 아파트 난간을 바라보며 나를 키워주시던 이모할머니에게 홧김에 자살할 거예요!라고 소리치면 이모할머니는 피식 웃으시며 할 수 있어? 하면 나도 엥—무안해서 웃으면서 ㅋㅋ, 그래, 지금 침대에 누워 생각해 보니까 나는 왜 그렇게 자살이라는 것에 관심이 많았던 것인지, 아 맞아, 나는 자살할 수 없어. 나는 사실 진심으로 죽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 사실 삶을 사랑했던 것이다. 세상에 사랑할 것들은 많고 나는 아직 세상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 나는 죽을 수 없어. 나는 살 거야. 나는 고통스럽지 않다. 여름에는 친구와 만나 자신을 힘들게 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는 나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더 힘들었던 그 친구는 나에게 네가 고통을 알아? 내가 고통을 아냐고? 아냐, 나는 고통을 몰라. 맞는 말이다, 속으로 아니 나도 고통 아는데, 집에 돌아오는 길에 곱씹어 생각해 보니 나는 행복한 가족과 행복하게 자랐고 공부도 열심히 했고 그래, 나는 고통을 모르는 거야. 고통이 아름답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부르주아의 고통일 뿐인걸. 진정한 고통은 예술을 동반하지 않는다. 너 굶어서 죽어가는데 영화 찍을 수 있을 것 같아? 당장 다음 끼니 걱정을 해야 하는데 글이나 쓰고 있을 것 같아? 고통을 아름답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이기적인 것인지 알아? 나는 고통스럽지 않다. 나는 고통스럽지 않다. 나는 고통스럽지 않—찬바람이 들이닥치고 나의 방은 이제 바깥과 동일해졌다. 바람의 힘은 이렇게 강하고 나의 방에는 이제 아무것도 없지 않고 고층 아파트 바깥에 존재하는 무언가로 가득 차 있다.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하얀색 블라인드가 쳐져 있는 곳 뒤에 있는 창문에는 나는 모르는 미지의 세계가 있고 우주가 있다. 나의 방은 우주가 되었고 나는 드디어 우주에서 떠다닐 수 있었고 맞다, 우주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 나는 다시 백지에 가라앉았다. 나는 삶을 사랑한다. 나는 삶을 사랑한다. 나는 삶을 사랑하—진심으로 죽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는 것을 되새기자 문득 나는 정말로 고통스럽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 나는 고통스럽지 않다. 이 심장인지 가슴인지 폐인지 팔인지 어디선가 뭉쳐있는 이 느낌, 그래, 이건 고통은 아닌 것 같아, 이건 삶인가 인생인가 이 뭉쳐있는 이거 좀 펼쳐주었으면, 나는 고통을 원하는 것이 아닐까? 나를 세 번째 본 사람이 나에게 너는 고통을 좋아하는 것 같아, 음 아니, 나는 고통을 느껴본 적이 없는걸. 나를 깨워줘.

이전 10화 변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