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풍자와 해학은 특히나 고전에서 더욱 강렬하다. 왜 그럴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보면 아무래도 옛사람들이 체면치레에 더욱 몰두했기 때문이지 않나 싶다.
굳이 생각해보면, 현대의 사람들 역시 체면치레에 꽤나 목숨을 건다. 남들과 비슷한 크기의 자동차를 몰고 국평이라 불리는 균일한 면적의 집에 살고 남들 먹는 맛집 요리는 한 번씩 먹어야 하며 막상 주머니는 비어있는 비싼 옷을 입어야 한다.
그럼에도 고전으로 직면하는 풍자는 더욱 강렬한 느낌을 준다. 왜 그런고 하니, 그 시절 사람들은 풍자를 하면서도 체면치레를 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신예찬. 어리석음의 신이 스스로를 찬양하는 연설문. 15세기 철학자가 우신으로 빙의해 각종 신들의 위에 우신이 존재함을 말하고, 인간사의 모든 근본이 우신에게 닿아있음을 역설한다.
일견, 타당하다. 가끔 나 역시 '아, 그때 왜 그랬을까!'라며 탄식하다가 '오, 다행이다!'라며 안도할 때가 있으니까.
우신의 연설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처음에는 자신에 대한 소개로, 자신은 생명 탄생의 주역일 뿐만 아니라 인생에 쾌락을 주는 신으로서 모든 신 중에 으뜸임을 강조한다. 두 번째로 이성과 정념, 남자와 여자, 술자리, 우정, 결혼 등에서 어리석음이 어떤 역할을 하고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주어 인간 사회의 존속을 유지하는지 설명한다.
그리고 '철학자들'이라고 지칭하는, 흔히 현자라고 불리는 현명한 자들이 얼마나 쓸모없는 자들이며 어떻게 불행을 불러오는지 비난한다. 게다가 선생, 법률가, 수도사 등 어리석음의 반대 위치에 있는 자들 모두를 비난하거나 비꼬면서 어리석음에 대한 찬양을 이어간다.
마지막으로 성경의 여러 문구들과 신학적 지식들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기독교 신앙이 좋은 의미의 어리석음이라며 포장을 하는데서 극에 달한다.
풍자나 해학이란 것의 주요 포인트는 웃음이다. 단순히 웃기면 되느냐. 그것도 아닌 것이 배를 잡고 깔깔거리다가도 마지막 쓰디쓴 술을 마시다 흘려 입가를 쓱 닦아낼 때 살짝 코 끝으로 지나치는 그 쓴 향기가 배어있어야 한다. 풍자라는 것이 그렇다. 아무리 재밌으라고 하는 행위라고 하더라도 애초에 작자는 청중들에게 그냥 웃으라고 하는 일이 아니니까. 막상 또 이런 자들은 청중이 마냥 웃기만 하면 그걸 가지고 또 풍자할 것이 뻔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웃기는가. 솔직히 이 책을 읽으며 웃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애초에 에라스무스만큼 해박한 그리스-로마 신화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지 않다면 내용을 읽는 동안 한 페이지당 최소 두어 번 주석을 왔다 갔다 하느라 맥을 놓치기 쉽다. 맥을 놓치면 우는 것이라면 모를까 웃는 것은 매우 어렵다.
게다가 삶의 어리석음을 되려 찬양하고 어리석음이 삶에 얼마나 긍정적으로 작용하는가에 대한 소재는 너무 많았다. 어느 날 갑자기 바보가 돼서는 꽉꽉 막혔던 삶이 술술 풀리는 내용의 영화는 얼마나 많은가. 바보인 줄 알았던 사람들이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내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가. 그런 면에서 보면 이 책은 마치 오래전에 이미 본 데다가, 그때 배꼽을 잡고 웃었던 기억마저 아직 남아있는 개그 콩트를 다시 보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책이 빛나는 것은, 단순히 해학적 요소 때문이 아니다. 이 책은 고전에서 언제나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작가의 넘볼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한 지식의 양과 사상의 폭과 소유의 깊이를 주기 때문이다.
심지어 몇 백 년 전에 쓰인 이 글 속에서 현대 사회에도 여전히 일맥상통하는 '어리석음의 메커니즘'과 그런 사실을 비꼼으로 인해 진정한 현명함에 대해 재고하게 되는 힘. 그것이 아마 우리가 여전히 고전을 찾아 읽는 이유 아닐까 한다.
본 서평은 서평단 참여로 출판사로부터 서적을 증정받아 작성하였으며,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로 적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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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로그 셋방살이 중입니다. '작가의 서재' 방만 제 관할입니다. ㅠㅅ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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