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히르군 Jan 25. 2022

집사의서평 #21 최소한의 선의

법수필 장르의 발견


들어가는 말


 난 어렸을 때부터 징그러운 것을 잘 보지 못했다. 특히 주삿바늘이 살갗을 뚫고 들어가는 것이 심했다. 마흔이 된 지금도 주사를 맞을 때는 고개를 돌린다. 그런 연유로, 어릴 때 꿈은 가능하면 피를 보지 않는, 과학자 혹은 변호사였다. 둘 다 매우 매혹적인 직업이었지만, 논리 정연하게 말로써 상대를 이기는 기술. 왠지 멋져 보이는 어려운 말을 쉽게 내뱉는 변호사가 더 멋있었다. 

 그런 내게 법조인이 쓴 책이란 매우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문유석 작가는 개인주의자 선언으로 구면이었다. 솔직히, 책 내용이 제대로 생각나진 않는다. 물론 책이 부실했다거나 재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개인적 성향인데, 철학적인 부분에 대해 쓸데없는 고집이 너무 강한 편이라서, 웬만해서는 동감하지를 못해서 기억에서 지운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역시 꽤나 흥미롭게 읽었지만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에는 기억에 남지 않을까 조금 걱정이다. 걱정이 된다는 것은, 그렇게도 고집스러운 내 사상에 어느 정도 균열을 준 책이기 때문이다. 



법보다는 철학


 서두에 작가는 이 책이 법에 대한 이야기임을 주지 시킨다. 하지만 실제 책의 내용은 법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철학적 이야기에 가까웠다. 인간 존엄성에 대한 고찰과 정의론, 공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특히 이런 현대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철학적 요소들이 제창된 시절에 대한 이야기와 봉건주의, 귀족주의에 이어 자본주의와 함께한 민주주의 시대를 거쳐오면서 확립된 헌법에 대해 서술한다. 

 기존 책들에서도 느낀 부분이지만, 이 작가는 매우 고리타분하고 재미없으며 원론적인 이야기에 대해서 현재 우리가 살면서 겪는 일들을 대입하는 것을 잘한다. 이 이야기는, 교과서처럼 재미없는 것을 예능처럼 풀어낸다는 것이다. 다큐멘터리로 치자면 그것이 알고 싶다나 궁금한 이야기 Y와 같은 느낌이랄까.

 하지만 아쉬움이 컸던 부분이 있다. 일전에 말한 적이 있었지만, 법의 지근거리에서 일을 하는 내가 서두에서 느낀 법에 대한 이야기와는 살짝 거리감이 컸다는 것. 전체적인 틀에서야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 공정 등이 헌법의 근간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작가가 애초에 그 어려운 법, 그것도 그 법들 중 최상위에 있는 헌법에 대한 이야기를 펴냈을 때에는 철학적인 부분보다는 조금 더 법 자체에 대해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땠을까. 수필이라고 작가 스스로 강조하기는 했지만, 법의학, 법영상, 법심리학의 뒤를 이어 법수필이라니. 게다가 실제로는 법보다는 철학 이론 인문서적에 가깝다.

 언젠가 서평을 했던, 우리 사회를 바꾼 결정과 판결이라는 책이 떠올랐다. 법이 대체 왜 그러는지, 우리를 경악에 빠지게 한 판결들이 대체 왜 그러는지 궁금하다면 이런 책이 되려 적합하다. 이 책은 차라리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던가 아니면 애초에 정의론 같은 책과 같은 분류에 들어갈 것 같다. 



법, 물이 흐르는 대로.


 작가는 인간의 천부인권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수많은 철학자들이 똑같이 했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인간의 존엄은, 자유는 누가 부여하는 것인가, 혹은 인간 서로가 서로에게 동등하게 주기로 약속한 것인가. 

 이 답은 그 누구도 알려주지 못할 것이다. 애초에 '천'이라는 명칭을 붙인 것 자체가 이미 인간의 지성으로는 판단할 수 없거나, 인간의 지성을 판단하면 부정되어버릴 얕은 논리라는 것의 방증 아니겠는가.

  염세적인 내 성향에 따라보자면, 인간에게 존엄과 자유를 준 절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것이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도 의아스럽다. 다만 그것은 지구 상에서 모든 생태계의 우위에 섰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이라는 종족이 오만방자하게 서로에게 부여한 '이념'일뿐이다. 

 그러나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 오롯이 홀로 서지 못하는 이유로, 우리는 서로에게 부여한 이 이념을 바탕으로 서로를 지키고 집단으로 살아간다. 혹은, 나를 지키고 집단을 유지하기 위해 이 이념을 부여한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렇게 부여해버린 개개인의 자유가 타인에게 위해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인간은 법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법 法. 물 수 변에 갈 거. 물이 흐르는 대로 하는 것. 어디선가 주워들은 한자 해석이다. 법은, 물이 흐르는 대로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물은, 흐르는 대로 두면 결국은 어디론가 흩어져 사라져 버리게 된다. 결국 원하는 곳으로 물길을 내고 저장할 곳에는 저수지를 만들어야 그 쓰임대로 쓸 수 있다. 법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그저 개인에게 자유가 주어졌다고 해서 마음대로 하는 것이라면 결국 인간의 존엄은 사라져 버릴 것이고, 자유 역시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런 사태가 벌어지지 않도록, 최소한의 관여로 인류의 방향을 조금은 옳은 쪽으로, 조금 더 존속이 가능하도록 조정하는 것. 그것이 법이 지닌 최소한의 선의가 아닐까 싶다.




개인 블로그 : https://blog.naver.com/uyuni-sol

※ 블로그 셋방살이 중입니다. '작가의 서재' 방만 제 관할입니다. ㅠㅅ ㅠ


개인 인스타 : https://instagram.com/jeakwangyun

매거진의 이전글 집사의서평 #20 지구 끝의 온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