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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르군 Feb 06. 2022

집사의서평 #25 빛을 두려워하는

감았던 눈을 뜨자


들어가는 말


소설에서 자극적인 소재를 사용하는 것은 대단하다. 특히나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인 문제는 더욱 대단하다. 문학이나 예술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바가 잘 드러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유명한 말 중에 달을 가리키는데 왜 손가락을 보느냐란 말이 있다. 사람들의 확고한 신념이라는 것은 시야를 좁게 만든다. 늘 손가락을 본다. 

 그래서 이 소설은 일단 대단하다. 작가의 자신감일까, 혹은 신념일까. 작가가 의도한 바는 잘 드러났을까? 작가는 만족했을까. 독자는 만족했을까. 개인적으로 나는 만족했다. 일단 작가의 용기와 치밀한 인터뷰를 통한 현실감 넘치는 서사. 하지만 해피엔딩은, 역시나 아쉬웠달까. 



구조와 구원


 브렌던은 독실한 이민자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어릴 적 교회에서는 성추문이 불거졌지만, 그럼에도 교회는 계속 다닌다. 아버지의 꿈을 따라 전기공학과에 진학하고, 처음으로 아버지의 뜻과 다르게 세쿼이어 국립공원 전신주에 오르는 일을 선택하고 해방감과 삶의 만족을 느낀다. 하지만 결국 아버지의 요구에 돌아와 전선회사 영업직으로 들어가고, 끝내는 정리해고 당해 생계를 위해 우버를 몬다. 

 하루 16시간씩 운전을 하며 생계를 책임지지만, 첫째 아이를 잃었던 아내는 종교에 매몰되어 중절 반대 운동에 빠져 일을 그만둔다. 몇 번 이혼을 고민하지만 친구 토더 신부의 조언을 받아 참는다. 어렵게 얻은 딸 클라라는 자신과 다른 삶을 살기를 원한다. 늘 딸의 편에 서있는 자상한 아빠인 브렌던은 엄마와 극렬히 대립하는 클라라를 옹호한다. 

 브렌던은 유년시절 가정환경과 본인의 신념의 충돌을 지속적으로 겪으면서 조금은 회피적 성향의 사람이 되었고, 아내와 딸 사이에서 중절 문제에 대한 생각도 극명히 갈리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딸 클라라는 브렌던이 늘 감정을 너무 잘 숨긴다며 타박한다.

 그러던 중 우버에 중절하려는 여성들을 돕는 엘리스를 태운 브렌던은, 방금 엘리스가 들어간 중절 수술 병원에 어떠 괴한이 화염병을 던지는 것을 목격한다. 오랜만에 자신을 존중해줬던 엘리스의 위험을 두고 볼 수 없던 브렌던은 그녀를 구하기 위해 병원에 달려들고, 그렇게 인연을 맺게 된다.

 엘리스는 브렌던의 모습에 호감을 느껴, 지정 우버처럼 계속 이용하게 되고 브렌던은 엘리스와 대화를 나누면서 인간적 호감을 갖게 된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 대해 중절 반대 운동 단체에서 알게 되고, 아내와의 갈등은 극에 달한다. 

 점점 자신의 신념을 감추지 않게 된 브렌던. 조금씩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야겠다는 생각과 아내의 맹신적인 모습에 분노가 커지던 중 클라라가 권력자의 성폭력을 당한 미성년 임산부를 구조하게 된다. 돈과 권력으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범죄자의 타깃이 된 클라라와 미성년 임산부를 구하기 위해 둘은 무모히 움직이기 시작하고... 사건은 꽉꽉 막힌 러시아워 속에서 숨 가쁘게 흘러간다. 



감았던 눈을 뜨자


 종교적 신념과 별개로, 중절 문제에 대한 문제는 양측이 첨예하게 대립한다. 이런 대립이 문제가 되는 것은 양측의 의견에 합의점이 없기 때문이다. 단순히 잉태된 생명의 인격을 어느 시점에서 볼 것인가와 여성의 결정권이 타인의 생명까지 좌지우지할 권리인가라는 문제. 

 둘 사이에서 쉽게 중점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여성의 결정권은 당연히 인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잉태된 태아의 권리는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이렇게 첨예된 문제를 소설로 가져온 작가의 용기에 다시 한번 박수를 보낸다. 게다가 아무래도 작가의 생각이 들어있겠지만, 약간 한쪽으로 치우친 서사에서 반대편의 비난을 감수할 용기는 대단하다. 분명. 

 하지만 이 소설에서 내가 더 집중한 것은, 브렌던의 변화다. (아, 내가 위의 문제에 대해 회피하려는 것은 아니다. 난 확실히 엘리스와 같은 의견이다. 심지어 엘리스보다 더하다. 무교니까.) 우리가 흔히, '중도'라고 부르는 (나 역시 중도를 표방하기는 한다만.) 사람들은 브렌던과 얼마나 다른가. 쟁점의 문제에 대해 본인의 생각은 감추고 흔히 '양시론'적인 위치를 가진 사람들. 브렌던은 분명 양시론적인 인간이다. 아니, '었다.'

 소설에서 브렌던은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엘리스의 됨됨이에 감화되고 클라라의 위험에 용기를 내어 자신의 신념을 표출한다. 

 작 중 엘리스는 분명, 빛을 찾은 자들을 두려워한다. 그 맹목적인 신념에 혀를 찬다. 나 역시 같은 의견이다. 스스로 빛을 봤다고 믿는 자들은 타인들을 어둠으로 몰아 놓는다. 엘리스의 말처럼 자신들의 확신에 벗어난 사람들을 어둠으로, 악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모두가 빛을 본 뒤다. 세상이 모두 빛으로만 가득 차있다면, 어디에도 어둠이 지지 않는다면 우리 인간들은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눈이 부시다고 등을 돌리면 우리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결국 자신의 그림자뿐이다. 그대로 쳐다봤다가는 눈이 멀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눈을 감을 것인가. 그렇게는 어디에도 갈 수 없다. 한 발짝도 내딛을 수 없다. 

 브렌던처럼, 우리도 감았던 눈을 뜨자. 앞으로 가자.




개인 블로그 : https://blog.naver.com/uyuni-sol

※ 블로그 셋방살이 중입니다. '작가의 서재' 방만 제 관할입니다. ㅠㅅ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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