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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르군 Jul 02. 2022

집사의서평 #57 어쩌다 가족

원인을 모르니 결과도 알 수 없지



들어가는 말


 '어쩌다'라는 말이 상당히 유행했다. 예능 프로그램의 제목이나 소설, 수필이나 각종 마케팅 카피라이트로도 쓰이거니와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 같은 소셜미디어에서도 거의 밈처럼 자주 쓰인다. 

 왜 이렇게 자주 쓰이나 싶었는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아마 어떤 일이나 현상에 대해서 인과관계를 깊이 파고들어 이해하려고 하는 행위에 대해 질려버린 것이 아닐까. 

 입시위주의 주입식 교육에서, 오로지 대학만을 위한 학습을 강요당하며 성장한 우리 세대(안타깝게도 고해성사를 하자면 내 세대는 아니고, 내 다음 세대이지 싶지만, 편의상 우리 세대라고 적겠다.)는 더 이상 의미 없는 탐구나 연구, 혹은 추상적인 추론에 싫증을 느껴버린 것이 아닐까. 

 어떤 일이든 그 일이 벌어지게 된 원인이 있건만, 그 뭔가 기나길고 복잡하며 고차원적인 과정들을 그저 '어쩌다'라는 단어 하나로 축약해서 지워버리고 현재를 그대로 보고 싶은 단순화의 욕구, 그것 아닐까. 

 위의 고해성사가 결국 이렇게 재차 드러나는 것이지만, 난 개인적으로 좀 알고 싶긴 하다. 하지만 반대로, 이해해보자면, 굳이 알 필요가 있을까. 결국 원인은 과거이고, 안다고 해서 그것이 변하는 것은 아닌데 말이다.



가족의 자화상


 시대에 따라 결국 모든 것은 변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가족이라는 굴레, 조직, 구성, 기타 등등의 의미에 대해서는 조금 더 보수적으로 접근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모두의 가족이란 없다. 나의 가족만이 존재하고, 타인의 가족은 다른 부족이나 진배없다. 부족 간의 만남은 원시시대에는 보통, 창이나 돌도끼 같은 것으로 대화가 이뤄졌을 테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가족이란 의미 자체로만 보자면 내 가족이나 남의 가족이나, 둘이나 셋이나, 혈연이나 법적 관계나, 결국은 비슷비슷할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보자면 '어쩌다' 가족이 된 것뿐이니까. 

 '어쩌다 가족'은 전세대란에 위장이혼과 결혼을 혼재한 이야기, '마더메이킹'은 호르몬제를 통한 모성애의 재해석.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는 흡혈귀가 선호하는 우리네 젊은이의 울분의 피에 대한 이야기를, '바통'에서는 취업전선에 서서 버티기도 힘겨운 젊음을, '판다가 부러워'에서는 출산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가족의 발견에서는 코피노를 통한 무책임한 가장에 대한 이야기를, '그녀의 이름을 보았다'에서는 자신을 지우고 어머니라는 이름으로만 희생하는 우리 부모의 모습을 그려낸다. 



원인을 모르니 결과도 알 수 없지


 전체적으로 약간 생뚱맞다. 우리가 가족을 보는 시각은 위에도 언급한 바와 같이 상당히 보수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역시 가족의 안에서 자란 결과다. 우리는 확실히 우리가 보고 느낀 것에 대해 맹신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면에서 소설에 등장하는 가족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것 같으면서도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 같다. 난 텔레비전이나 영화, 소설에서는 보았을지언정(일부 판타지적 요소를 포함한 단편은 제외하고라도) 위장이혼을 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이나 전세계약 직전에 임신이 밝혀지는 경우나 코피노와 이복자매가 그 부모를 살해하는 일, 뇌사상태인 할머니가 손주에게 심장을 이식해주기 직전에 깨어난다거나, 그 깨어난 사실을 그 딸이 숨긴다거나 하는 일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보지도 듣지도 못해야 맞다. 

 우리는 모두 '어쩌다' 가족이 되어버렸다. 진화론적 문제로 단세포와 다세포에서 합성과 변이와 핵분열의 절차를 거쳐서 발생하는 것이 가족은 아니다. 혹은, 종교론적 추론으로 신의 어여쁜 보살핌 덕에 만나고 사랑한 부모의 뱃속에 나를 넣어주거나 한 것도 가족이 아니다. 삼신할매가 빠지면 섭섭하겠다. 혹은, 커다란 보자기를 입에 문 홍학이라던지.(갈매기던가.)

 결국, 위에 말한 대로 굳이 추론할 것도 없이, 설명할 것도 없이, '어쩌다'라는 단어 하나면 설명이 되는 가족인데, 문제는 우리가 원인을 그저 '어쩌다'라고 설명해두었으니, 원인에 따른 결과를 추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고로, 누구도 원인을 모르는 문제에 대해 추리할 수 없거니와, 결과를 맞닥뜨렸을 때에도 그 상황에 대해 코멘트할 어떠한 근거가 없으므로 그저 함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보지도 듣지도 못했을 수밖에.

 즉, 가족의 일은 가족의 내부에서만 벌어지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본다.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변한다고 해도 결국 우리 모두는 어쩌다 가족이 되어버렸고, 가족의 일은 결국 가족의 내부에서만 벌어지는 일이니, 그 단단하고 소재를 알 수 없는 가족이라는 껍질 안이 쉬이 변하겠는가.

 '어쩌다' 가족이겠지만, '어쨌든' 가족이지 않겠냐, 이 말이다.




본 서평은 서평단 참여로 출판사로부터 서적을 증정받아 작성하였으며,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로 적었음을 밝힙니다.



개인 블로그 : https://blog.naver.com/uyuni-sol

※ 블로그 셋방살이 중입니다. '작가의 서재' 방만 제 관할입니다. ㅠㅅ ㅠ


개인 인스타 : https://instagram.com/jeakwang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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