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24일.
오늘은 눈이 오는 크리스마스이브다.
나는 지금 신촌역 오거리 앞에서 내가 사랑하는 윤슬을 기다리고 있다.
슬이가 이제 슬슬 올 때가 되었는데…. 오늘 아침에 통화했을 때 슬이는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니까 내가 기분 좋게 해 줘야지 생각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슬이는 약속장소에 20분째 오지 않고 있다. 시간 약속을 칼같이 지키는 그녀는 실수로도 이렇게 늦은 적이 없었는데….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핸드폰을 꺼내 슬이에게 전화를 해본다. 통화연결음이 길게 이어지다 슬이가 전화를 받았다.
“슬아! 어디쯤이야? 오고 있어?”
“도윤아… 나 오늘은 못 갈 것 같아. 그게 사실 나..”
“어? 오늘 못 와? 내가 자기 기분 좋게 해 주려고 데이트 계획 이만큼 세웠는데.”
“어……. 그게… 사실… 나… 더 이상 너 못 만날 것 같아. 미안해.”
“슬아….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못 만날 것 같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도윤아. 우리 오래 만났잖아. 사실 많이 지쳤어. 우리 여기까지만 하자. 내가 힘들어서 못하겠어.”
“슬아. 무슨 일 있어? 갑자기 왜 그러는데.”
“꽤 오랫동안 생각 해봤는데 더 이상 널 만날 수 있는 상황도 안되고 마음도 그렇지 않은 것 같아.”
“알았어 슬아. 근데 우리 만나서 이야기하자. 꼭 오늘 아니어도 되니까 이야기하자.”
“아니. 도윤아. 그냥. 그냥 나랑 헤어져주라….”
“슬아. 너 무슨 일 있지? 나한테는 이야기할 수 있잖아. 네가 갑자기 이렇게 헤어지자고 하는 건 말이 안 되잖아.”
“그래. 나 무슨 일 있어. 그게 뭔지 모르겠어? 나 너 사랑 안 해. 이제 너 사랑 안 한다고.”
“……너 그거 진심이야?”
“어. 진심이야. 그러니까 그만해 이제.”
“너 나 사랑 안 하는 거. 진심이냐고. 다시 말해봐.”
“미안해. 끊을게.”
“끊지 마, 슬아. 내가 이해할 수 있게 말을…”
통화가 끊겼다.
슬이는 내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전하고 전화를 끊었다. 오른쪽 귀에 갖다 댄 핸드폰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정말 통화가 끊겼다. 그 뜻은 통화 내용처럼 슬이가 내게 이별 통보를 했다는 것이다.
날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다면서.
슬프지 않았다.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받아 들일수가 없었다. 머리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멈춰 있었다. 이게 말이 되는 건가…. 우리가 어떤 사랑을 했고 추억을 가졌는데, 지금까지 행복하게 잘 만났는데 갑자기 날 사랑하지 않는 다면서 헤어지는 게 말이 되나?
나는 눈 내리를 신촌역 4거리에 어떠한 생각도 할 수 없이 서 있었다.
이내 답답한 마음에 다시 윤슬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그녀의 핸드폰은 꺼져있었다. 메시지를 보냈지만 읽지 않았다. 벌써 나를 차단해 버린 건가? 헤어진 게 현실이란 생각이 스며들었다. 정말 그녀는 더 이상 날 사랑하지 않고 나를 그녀의 삶에서 나를 도려내고 싶은 게 사실이라 느껴졌다. 그제야 가슴이 저릿하면서 눈에 물이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이내 곧 눈물이 펑펑 흘렀다. 아직도 우리가 헤어진다는 게 말이 안 되는데 이게 진짜일리 없다고 믿으면서도, 내 전화를 받지 않는 그녀의 말들은 사실이라고 믿어졌다. 그녀가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음으로 나의 미래에 그녀와 함께하는 건 없는 것인가. 내가 그녀와 꿈꿔왔던 앞날은 거품이었을까?
그녀가 도려낸 내 마음이 아렸다. 아플수록 더 많은 눈물이 흘렀다.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이브에 신촌역 오거리에서 펑펑 우는 사람은 나 밖에 없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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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신촌의 한 노래방.
“신촌을 못 가~ 한 번을 못 가~ 혹시 너와 마주칠 까봐~”
“아니. 신촌에서 저 노래를 부르면 어뜩하냐. 신촌에 왔는데 신촌을 못 간다니.”
“야 저거 쟤 이별 OST 아니냐. 노래방만 오면 주구장창 저것만 불러댄다니까.”
“도윤이가 이별 한 번 심하게 했잖아. 전여친이 잠수했다던데.”
“이유도 없이 크리스마스이브에 헤어지자고 해서 연락두절 됐다는데 노래 좀 부를 수도 있지. 부르게 냅둬. 저번에는 술 먹고 저거 부르다가 펑펑 울었어.”
“징하게 좋아했나 보다. 하— 나도 연애하고 싶다. 진짜 군대 갔다 오고 알바하고 과제하고 이게 뭐냐 인생.”
“야 됐고. 쟤 저거 끝까지 다 부르면 울 수도 있으니까 끌어내서 술이나 먹으러 가자.”
“친구들 한 잔 하자고 또 꼬시며 불러내도 난 안가~ 아니 죽어도 못 가~”
“너 신촌 잘 왔고 잘 살고 있어. 야. 인마. 울지 마! 울지 마!”
요즘 나는 <신촌을 못 가>를 노래방만 가면 부른다. 부를 때마다 울컥울컥 하는 게 감정을 건드리는데, 신기하게 부르고 나면 조금 괜찮아진다. 하필 후렴을 열심히 부르고 있는데 친구 놈들이 내 등짝을 때리며 나를 끌고 나와 근처 고깃집에 갔다.
“야 저것 좀 뒤집어봐. 탄다. 탄다. 사장님! 여기 이슬 한 병 주세요!”
친구들이랑 고기를 구워 먹으니까 노래방에서 울컥하던 감정이 잠잠해졌다. 친구들과 술을 나눠 마시며 교수님 욕도 하고 복학생으로 돌아온 동기의 학교 적응기도 듣고 오늘 이 자리가 재미있다. 이슬같이 맑은 술도 들어가니 기분도 들뜬다.
“야! 한도윤. 한 잔 더 해.”
“그래. 다 같이 짠 할까?”
소주잔에 가득 담긴 이슬 같은 소주가 목을 타고 내려간다.
“캬. 원래 소주가 이렇게 맛있었냐? 오늘따라 달다. 오늘 함 달려볼까?”
옆에 앉아있던 친구가 고개를 저으며 이야기한다.
“인마. 그러다가 또 질질 짜면서 울려고.”
“아니 내가 언제 울었다 그래. 오늘은 안 울어. 오늘 기분 완전 좋다니까? 약속한다 진짜.”
“그래. 마셔라. 마시고 죽자.”
오늘따라 소주는 왜 이리 맛있는지 술이 쑥쑥 들어갔다. 중간중간 친구들이 적당히 마시라고 한 것 같은데…. 그런 말 해주던 사람은 주변에 슬이밖에 없었는데 오늘은 슬이가 내 삶에 없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그랬네. 슬이가 없었네. 그렇게 헤어진 지도 반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그립다. 슬이가 보고 싶다. 지금 이 순간, 슬이 얼굴을 마지막으로 딱 한번 보고 싶다.
“윤! 슬! 보! 고! 싶! 다!”
나도 모르게 윤슬이 보고 싶다 소리쳤는데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다. 주위를 둘러보니 어두 껌껌한 친구 자취방이었다. 가로등 불빛만 들어오는 이곳에 내가 누워있다니 고깃집에서부터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갑자기 옆에 있던 친구가 뒤통수를 치며 소리친다.
“새꺄. 조용히 하고 자! 지금 몇 신데 큰소리로 소리를 치냐고!!!”
“아… 미안…. 나 너네 집엔 어떻게 왔어? 다른 애들은?”
“몰라. 그냥 닥치고 자라. 나 내일 아침 9시 수업이라 일찍 일어나야 돼.”
나는 다시 누워 눈을 감고 배개위에 빙글빙글 돌아가는 머리를 부여잡고 잠을 청했다. 술자리의 기억은 잃었지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기분이 좋았다. 꿈에도 슬이가 나오지 않았다. 술을 이렇게 먹었는데 슬이가 안 나온 것도 다행이었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것 같아서. 조금씩 아무는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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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말. 서울 한남동에 위치한 한 광고 회사.
내 이름은 한도윤. 광고 회사에 다니는 5년 차 회사원. 대리 직급이긴 하지만 우리 회사는 ‘프로’라는 직급으로 통일해서 쓴다. 나는 팀에서 업무도 분위기도 부드럽게 하는 윤활제 역할을 하며 고된 사회생활을 이어가는 중이다. 20대 후반에 이 회사에 들어와 나름 막내 생활도 오래 했는데, 올해는 신입사원 바다 프로가 들어와 막내를 벗어났다. 거기에 바다 프로와 업무 합도 잘 맞아서 회사생활이 그나마 편해졌다. 이제는 5년이라는 경력이 쌓여 어엿한 사회인으로 거듭나버렸을지도.
오늘은 햇빛이 좋다. 여름이 온 것 같기도 했지만 아직은 봄기운이 남아 시원했다. 사무실에 가는 길에 테이크아웃 카페에 들러 아이스 라떼를 한잔을 사들고 출근한다. 직장인이 된 후로는 카페인이 없으면 일을 시작할 수 없는 병에 걸린 것도 있지만 오늘은 그것과 상관없이 날씨가 좋아 라떼를 마시며 출근길을 즐기고 싶었다. 회사에 도착해 기분 좋게 출근 지문을 찍고 내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컴퓨터를 켜면 자동으로 켜지는 사내 메신저에 메시지가 왔다.
— 최후 프로 : 출근했어?
— 한도윤 프로 : 어ㅋㅋ 나 방금 왔다. 오늘 날씨 좋은데?
— 최후 프로 : 아니 형 말고. 바다 프로님 왔냐고.
— 한도윤 프로 : 바다 프로? 아니 아침부터 바다 프로님은 왜 찾는데 ㅡㅡ;
— 최후 프로 : 아니 그게 바다님도 계시면 놀러 가려고 했지.
한도윤 프로 : 그러니까 바다 프로가 있는데 왜 오냐고 ㅋㅋㅋㅋ 솔직히 말해봐 ㅋㅋㅋ 너 바다 프로 관심 있냐?
— 최후 프로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한도윤 프로 : 진지하게 바다 프로한테 관심 있으면 내가 한번 남자친구 있냐고 물어볼까?
— 최후 프로 : 아 진짜?? 진심??
— 한도윤 프로 : 응응. 진짜로 내가 한번 물어볼겤ㅋㅋㅋ
— 최후 프로 : 그럼 남자친구만 있는지만 물어봐줘ㅎㅎ
— 한도윤 프로 : 그래 ㅋㅋㅋ 이따 오후에 커피나 한 잔 하자.
— 최후 프로 : 오키도키!
최후는 나와 공채로 같이 입사한 동기이자 친한 동생이다. 최후가 바다 프로에게 관심이 있었다니. 구릿빛 피부에 짙은 인상을 가진, 마치 잘생긴 셰퍼드 같은 최후와 똘망똘망하게 큰 눈과 어깨까지 내려오는 단발머리에 밝은 미소를 가진 바다님의 비주얼 합을 생각해 보니 둘은 잘 어울리는 한 쌍 같았다. 또 나 빼고 다 연애하겠네.
그나저나 오늘은 팀장님이 새로운 경력직이 온다고 하셨는데 어떤 분이 오실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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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시간이 조금 넘어서 팀장님이 사무실로 들어오셨다. 새로운 경력직 분이 뒤따라 들어왔다. 사무실 입구에 있는 경력직분의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컬이 들어간 검고 긴 머리에 하얗고 갸름한 얼굴형을 가지고 있었다. 출근 첫날에 적합한 하얀 셔츠에 발목까지 오는 검은색 롱스커트를 입고 걸어오는 모습이 어찌 내 이상형과 가깝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묘한 마음으로 팀장님과 경력직 분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우리 팀 자리에 가까이 오자 그녀의 모습이 또렷해졌다. 그녀의 얼굴을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나에게 얼굴을 보여주기라도 하겠다는 듯 그녀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검은색 긴 머리를 휙 하고 넘겼다. 아는 얼굴이 나타났다. 그리고 내 마음은 철렁하면서 바닥까지 내려가버렸다.
마치 보면 안 되는 사람을 본 거 같았다.
윤…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