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슬?”
너무 당황하고 황당한 나머지 입 밖으로 보고 싶지 않았던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말았다.
불편감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꺼내어 열어보지 말아야 할 상자가 스스로 열린듯한 느낌. 내가 윤슬을 회사에서 다시 만날 거라고는 상상해 본 적도 없다. 하필 우리 회사, 우리 팀으로 온다는 게 말이 안 되었지만 그렇다고 눈앞의 현실을 바꿀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빠르게 고민해야 했다.
팀장님과 윤슬은 마치 나에게 고민의 시간조차 주지 않겠다는 듯이 빠르게 걸어왔다. 살짝살짝 흔들리는 컬이 들어간 검은색 머리. 나랑 사귈 때와 달라져 더 잘 어울리는 화장법. 여전히 갸름한 얼굴. 스타일이 성숙해졌을 뿐이지 그대로였다.
나는 짧은 시간, 마땅히 어떤 대책을 세울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일단은 모른 척을 해야겠다. 그게 일단은 최선이겠다.
“우리 팀에 자리가 생겨서 새로운 팀원이 왔습니다. 오늘부터 우리 팀에서 일하게 될 윤슬 프로입니다.”
“안녕하세요. 윤. 슬.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윤슬은 또렷한 딕션으로 그녀의 이름을 말했다. 2014년 크리스마스이브에 나를 떠나간 그 윤슬이 맞다.
그녀와 헤어지고 하염없이 슬픈 날들을 보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정말이지 드라마로 만들어도 손색이 없을 한 남자의 가슴 아픈 이별 스토리였다. 이별 직후에는 3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방 안에 틀어박혀 울기만 했다. 울다가 잠들고 깨어나면 그녀 생각에 또 눈물이 났다. 숱하게 그녀에게 문자를 보내고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는 나를 차단한 듯했다. 그렇게 나를 한 순간에 끊어버린 그녀가 미운데 보고 싶었다. 그럴수록 내 일상과 건강은 망가졌다. 한 동안 집에서 히키코모리 생활을 이어갔고 시간이 좀 지나서 나는 인간에 걸맞은 정신을 되찾았다.
정신을 차린 후에도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술에 취하면 윤슬이 생각나 펑펑 울었다. 노래방에라도 가면 매번 윤종신 같은 가수들의 찌질한 이별노래를 부르곤 했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감정을 쏟아붓는 노래를 부르고 나면 마음이 후련하기도 했다. 그리고 술을 먹으면 또 윤슬 생각나 울고는 했다. 그렇게 한 달, 두 달, 반년, 일 년을 버티다 보니 조금씩 그녀가 없는 삶이 당연해졌고 그녀를 마음에서도 떠나보낼 수 있었다.
감히 나는 윤슬과의 이별이 지금 다니는 회사에 취업하는 것보다 어려웠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상처를 남긴 그녀가 내가 공채로 취업해 다니는 이 회사에. 하필 우리 팀에 오다니. 이왕 이렇게 모른 척하기로 한 거 앞으로 쌀쌀맞게라도 굴어서 일적인 관계로만 남아야겠다. 절대로 그녀를 살갑게 대할 수 없다.
“도윤 프로가 윤슬 프로 새로 왔으니까 옆자리에서 잘 도와주세요. 허허. 그리고 여기는 우리 팀 신입사원 바다 프로고 여기는…”
팀장님은 윤슬을 나에게 맡긴다는 말을 하고 이어서 팀원들을 소개해주고 있었다. 윤슬은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고 모든 팀원에서 밝게 인사했다. 그녀의 밝은 성격은 여전했다. 미소를 지을 때 입꼬리가 아주 이쁘게 올라가는 것까지도.
그러는 순간 윤슬과 눈이 마주쳤다.
10년 만에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에 순간 얼어버려서 말이 튀어나오지 않았는데, 순간 일시정지된 내 모습과 다르게 그녀는 나를 다른 팀원들 대하듯 똑같이 밝은 미소로 웃어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도. 윤. 프로 님이시죠? 반가워요.”
윤슬은 내 이름을 역시나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반갑다는 말을 마치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다는 듯 내게 건넸다. 미안하지만 나는 모른 척을 좀 해봐야겠다.
“처. 음. 뵙겠습니다, 윤슬 프로님. 저도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하하.”
“마침 제가 옆자리네요?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 우. 리.”
윤슬은 ‘우리’라는 단어는 아주 또박또박 말했다. 내가 그녀를 모른 척했지만 그녀는 이미 내가 그녀를 알아보고도 모른 척한다는 것까지 간파해 버린 것 같다. 그렇게 나를 당황시킨 윤슬은 밝은 미소로 나를 바라봤다. 나도 지지 않으려고 (제삼자가 봤다면 무척이나 어색하고 뚝딱거리는) 밝은 웃음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아 맞다. 쌀쌀맞게 대하기로 했지. 그래 무표정 짓자. 나는 이내 입꼬리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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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 윤슬은 기본적이 자리 세팅을 했다. 나는 내가 직접 나서는 대신 신입사원인 바다 프로에게 이것저것 챙겨주라고 부탁했다. 나는 1도 그녀를 도와주지 않고 있었다. 윤슬이 뭐라도 물어보면 짧게 ‘네’ 혹은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이 정도면 윤슬도 내가 거리를 둘 거라는 걸 제대로 알겠지?
“도윤 프로님?”
내 옆자리. 그러니까 오른쪽 옆자리에 앉아있던 바다님이 나를 불렀다.
“저희 점심 어디서 먹을까요? 오늘 윤슬 프로님도 새로 왔으니까 근처 맛집으로 갈까요? 구내식당말고 맛있는 거 먹어요 우리!”
“그… 저는 구내식당 먹어도 괜찮… 아니 윤슬 프로님도 새로 오셨으니까 팀 전원이 다 같이 갈 수 있는 식당으로 갈까요?”
“근데 팀장님이랑 다른 프로님들은 오늘 클라이언트 만나러 외근 나가셔서 저희 셋밖에 없는데요?”
“외근 나가셨다고요? 언제 나가셨지? 진짜 자리에 안 계시네.”
“아까 나가신다고 했는데 못 들으셨나 봐요. 오늘 프로님 조금 이상한데요? 평소에 그런 거 잘 챙기시잖아요.”
“아…. 어제 늦게 자는 바람에 좀 피곤해서요. 하하. 그럼 셋이서 파스타 집 갈까요?”
“좋아요! 근데 오늘 프로님 컨디션 안 좋으신가 보다. 제가 생일 선물로 받은 비타민이 있는데 하나 드실래요?”
“전 괜찮아요. 어제 그냥 잠을 잘 못 자서 조금 피곤한 거예요.”
“에이. 그래도 건강에 좋은 거니까 하나 드셔보세요. 어서요.”
바다 프로는 나에게 건강을 챙기라며 비타민은 건넸다. 하는 수 없이 받아보니 비싼 브랜드의 비타민이었다. 웃으면서 바다 프로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이번에 내 왼쪽에 앉아있는 윤슬에게로 방향을 틀었다.
“윤슬 프로님. 저희 이야기 들으셨죠?”
“네? 아 제가 지금 세팅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못 들었는데 바다님과 무슨 이야기 나누셨어요?”
“오늘 새로 오셨으니까 바. 다. 프로가 같이 점심 먹자고 제안해 주셨습니다. 불편하시면 같이 안 드셔도 돼요.”
“불편하긴요. 너무 좋은데요? 바다 프로님. 너무 고마워요.”
윤슬은 나를 중간에 두고 건너편에 앉아있는 바다 프로에게 손을 흔들며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바다 프로도 윤슬에게 손을 흔들었다. 뭐지 두 사람. 그새 친해졌나? 나는 무심한 듯 차가워보이게 곧바로 고개를 돌려 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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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
셋은 함께 근처 파스타 집으로 향했다. 오늘따라 바다 프로가 기분이 좋아 보인다.
“근데 슬 프로님은 오늘 첫날이라서 엄청 이쁘게 하고 오신 거죠? 오늘 딱 머리 넘기면서 들어오시는데 너무 이뻐서 저 반했잖아요. 호호호”
“하하하. 아니에요. 저 오늘 신경 써서 오기는 했는데 그렇게 이쁘다고 해주면 너무 고맙잖아요. 근데 저도 딱 들어왔는데 바다 프로님 보고 연예인 앉아있는 줄 알고 놀랐잖아요. 배우 김지원 닮으셨어요. 호호호.”
“호호호. 감사합니다. 요 앞이 파스타 집이에요. 근처에서는 점심시간에 가서 파스타 먹기 딱 좋은 곳이랍니다.”
벌써 친해진 것 같은 둘은 보고 나는 아무 말도 없이 걷기만 했다. 윤슬과 초여름의 골목을 같이 걷는 게 조금 이상하기는 했다. 익숙한 기분인데 너무 오랜만에 느껴 어색한 기분. 나는 제일 앞장서서 걸으며 파스타 가게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몇 분이실까요?”
“저희 세 명이요. 창가 쪽에 앉아도 될까요?”
“네. 편하신 자리에 앉으시면 됩니다.”
다행히 일찍 나와서 파스타 가게에는 사람이 많이 없었다. 나는 창가자리로 자리를 잡아 앉았다.
뒤따라 윤슬과 바다 프로가 들어왔다.
아뿔싸. 생각해 보니 셋이서 밥을 먹는 건 좋은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4인용 테이블에 내가 앉아있는데 옆자리로 윤슬이 와도 불편하고. 또한 나와 마주 보면 앉아서 불편할게 뻔했다. 이럴 거면 차라리 구내식당에서 내가 혼자 먹지! 후회하는 와중에 바다 프로가 먼저 내 옆에 앉았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윤슬이 내 맞은편에 앉아야 하는데….
내 예상과 다르게 윤슬은 내 자리에서 대각선. 즉 바다 프로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자리에 앉았다. 혹시 윤슬도 나를 의식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슬이 프로님 여기 와보셨어요? 여기 한남동 맛집인데, 이탈리안 클래식 까르보나라랑 냉파스타 종류가 진짜 맛있어요. 바질 페스토나 브리치즈 들어간 거 완전 추천이요!”
“저는 그럼 클래식 까르보나라 먹어봐야겠어요. 근데 여기 진짜 이쁘네요. 완전 데이트 장소인데요? 여기 회사 사람들이랑 자주 와요?”
“아 여기는 팀 전체는 못 오고 저랑 도윤 프로님이랑 같이 자주 와요. 둘만 파스타를 좋아해서 여기 와서 정말 맛있게 먹고 가요. 데이트라는 생각은 못했는데 누가 보면 그럴 수도 있겠네요. 호호호.”
사실 이 파스타 가게는 구내식당이 질릴 때마다 바다 프로와 오는 파스타 가게였다. 정말이지 사심 1도 없이 파스타를 먹고 싶어서 오는 곳이었다. 바다 프로와는 서로 편한 사이라서 파스타 메이트로 이곳에 오는데 윤슬이 이곳을 나와 바다님의 데이트 장소로 만들어버린 것 같아 느낌이 이상했다. 전 여자 친구랑 헤어지고 <환승연애>를 찍다 들킨 느낌 같은 어쩔 줄 모르겠는 기분이 들었다.
“데이트는 아니고 우리는 파스타를 찐으로 좋아하는 파스타 메이트라서 여기 오는 거예요.”
“맞아요. 데이트라기보다는 우리는 둘 다 파스타를 정말 좋아해서 여기 와요. 슬이 프로님은 그럼 까르보나라, 도윤 프로님은 브리치즈 파스타? 그럼 저도 오늘 브리치즈 파스타 먹어야겠다. 여기 주문할게요—”
지금 앉은 구도도 이상하고 윤슬에게 바람피우다 걸린 것 같은 기분도 이상하고 헤어진 지 10년이 지나 내가 윤슬이랑 다시 밥을 먹으러 온 것도 너무 이상하다.
제일 이상하고 나를 불안하게 만든 건 노래였다.
오늘은 이 파스타 집이랑 안 어울리는 배경음악이 파스타 집 스피커에서 나오고 있었다. 알바가 바뀌었나? 아니면 실수를 한 건가? 배경음악으로 휘성의 <사랑은 맛있다>가 나오고 있었다. 파스타 가게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 노래가 왜 나오는 거지? 심지어 이건 무려 2000년대 노래인데. 아무리 Y2K가 유행이라고 해도 파스타 가게에서 이걸 틀다니.
그렇다면 다른 2000년대 노래가 나올 수도 있다는 건가? 안되는데… 그러면 정말 큰일 날 수도 있는데.
그것도 윤슬이 앞에 있는데 그 노래들이 나오면
정말 울어버릴 수도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