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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민 Aug 04. 2024

재회 2

나는 병이 있다. 


발병의 이유 혹은 실제로 학계에서 연구가 되는 병인지 모르겠는 병이 있다. 매일 안고 살아야 하는 병은 아니지만 언제든지 나를 찾아올 수 있는 병이다. 고치는 방법을 스스로 연구해 봤지만 방법이 없었다. 병원에서는 일종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고 하지만 실제로 그런 건지도 잘 모르겠다.


병 때문에 내 삶이 암울하지는 않았다. 이 병으로 여자친구를 두어 명 사귀기도 했으니 고마운 병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 두 명 모두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에라이 몹쓸 병.


좋든 싫든 나에게서 똑하고 떨어져 나가지 않는 이 병은 어디에다 말하기도 부끄럽다. 회사 동기들, 대학교 친구들은 물론이고 부모님도 다른 가족도 이 병을 모른다.




나는 특정 노래를 들으면 그 노래와 연결된 예전의 감정을 격하게 느껴버리게 되는 병이 있다. 뭐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평범한 사람은 어떤 노래를 듣고 옛날의 기억을 회상하거나 추억하는 그런 즐거운 경험이 나에게는 병적 수준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물론 아무 노래나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처음에는 그 패턴을 잘 몰랐는데 나중에 분석해 보니 윤슬과 사귈 때 특별하게 생각했던 몇몇 노래가 그런 증상을 일으켰다. 그래서 어떤 노래를 들으면 설레거나 화가 나기도 하고, 애틋해지거나 서운해지기도 한다. 문제는 그 감정들이 너무 강력하게 다가와 컨트롤이 안 되는 것이다. 그 감정들은 제야의 종을 타종하는 것처럼 내 가슴을 아주 세게 때린다. 그러면 감정이 울리고 울림이 모두 퍼져 사라질 때까지(가끔은 일주일씩 감정이 이어지기도 한다) 감정이 남아있는 그런 느낌이다.


아까 말했듯이 이게 나쁜 작용만 있는 게 아니다. 처음에 이 증상을 몰랐을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대학교 4학년 때 취업 스터디를 하는데 어떤 노래가 나오자 설레는 마음이 들었는데 바로 옆에 있는 여자 동기를 보고 좋아하게 되어버렸다. 물론 내가 키 185에 쌍꺼풀 없이 길게 꼬리가 빠진 눈과 새하얀 피부를 가졌기 때문에 그 친구는 쉽게 내 고백을 받아주었던 것도 있고. 아무튼 이 병 때문에 여자친구를 사귄 경험이 있다.


그래서 걱정되고 무서웠다. 혹여나 2000년대 노래가 흘러나오는 파스타 가게에서 내 감정의 트리거가 되는 노래가 나올까 봐. 그것도 나에게 병을 쥐어준 (그렇게 의심되는) 윤슬 앞에서….


다행히 아르바이트생이 노래를 카페에서 들릴법한 재즈 플레이리스트로 바꿔주어서 그런 재난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파스타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구분이 된 건 아니었다. 나에게 불편감을 주는 윤슬을 앞에 두니 그 맛있는 파스타가 잘 넘어가지 않았다.



-


윤슬이 새로 오고 팀 전체 회식을 하게 되었다. 팀원들의 스케줄을 맞추다 보니 윤슬이 입사하고 일주일 후가 되었다. 그사이에 바다님과 윤슬은 많이 친해졌다. 물론 나는 윤슬과 계속 거리를 두며 차갑게 대하고 있다. 그런데 윤슬은 나에게 어떠한 감정도 없어서 오히려 친해질 수 있다는 듯이 나에게 다가왔다. 가끔은




“도윤 프로님. 우리 커피 마시러 갈래요? 여기 회사 근처에 엄청 맛있는 로스터리 카페 있다던데? 바다님이랑 셋이 같이 갔다 올래요?”




라던지. 혹은




“이 프로젝트 담당한 거 도윤 프로님이에요? 저 이거 인상 깊게 생각했는데. 대단하다. 나중에 우리도 같이 합 맞춰봐요. 하하하.”




라며 너스레까지 떨기도 했다. 원래도 성격이 밝고 시원시원했는데 (사회에 찌들고도 남는 세월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그 성격을 유지하는 윤슬이 나는 신기했다. 그것보다도 전 남자친구인 나에게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대할 수 있나? 아니 내가 전 남자친구인걸 잊었나? 아니면 정말 회사 동료일 뿐이라서 그럴 수 있는 건가? 


나와 다르게 불편해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이 살짝 섭섭하기도 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어 넘어가야 했다.


퇴근 시간이 다 되어서 오른쪽 옆자리에 앉아있던 바다 프로가 자신이 회식 장소를 예약했다며 자기는 시간에 맞춰 가야 한다며 이야기를 했다.


“바다님 그럼 저랑 같이 가요. 저도 어차피 일 다 마무리해서 바로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아 정말요? 도윤 프로님이라 같이 가면 너무 좋죠. 가는 길이 즐겁거든요. 호호호.”


“저도 같이 가도 되죠? 우리 어디로 가요?”


내 왼쪽 옆자리에서 우리의 대화를 듣던 윤슬도 같이 가겠다며 제안했다.


“그럼요! 그럼 우리 얼른 마무리하고 가요. 제가 이번에 엄청 맛있는 일식집으로 예약했어요. 이태원 쪽인데 분위기 있어서 다들 좋아하실 것 같아요.”



-



회사 정문을 나와 거리를 걷는데  보도가 좁아 앞에는 나와 바다 프로, 뒤에는 윤슬이 따라왔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바다님과 나란히 걷고 있는데 오늘따라 묘하게 바다 프로의 손등이 내 손등과 몇 번 닿았다.


“아. 미안해요.”

“네? 뭐가요?”

“아… 아니에요. 그 일식집은 많이 멀어요? 다른 프로님들 잘 찾아오시려나. 하하하.”

왜인지 뒤에서 윤슬이 다 쳐다보고 있는 것만 같아서 신경 쓰였다. 신경이 쓰였다. 


바다 프로가 예약한 일식집에 도착했다. 고급스러운 젠 스타일 인테리어에 반원형 자작나무 원목 테이블이 자리 잡은 오마카세 집이었다. 팀 사람들을 모두를 만족시키는 회식장소에서 즐겁게 식사를 했다. 나는 술을 잘 못 마셔 얼그레이 하이볼을 시켜놓고 천천히 마셨고 다른 팀원들은 레몬 사와를 시키거나 사케를 따라 마셨다. 


식사가 끝나고 마지막으로 나온 끝내주는 유자 요거트 아이스크림을 다 비운뒤 모두가 식당 밖으로 나왔다. 평일 날 하는 회식이다 보니 다들 집에 가야 한다고 뿔뿔이 흩어졌다. 팀장님과 다른 프로, 마스터분들이 집에 가셨고 결국 나와 바다님, 윤슬이 남게 되었다.


“바다님. 오늘은 일찍 안 들어가세요?”


“오늘은 도윤 프로님이랑 더 놀다가 가려고요! 우리 2차 갔다가 갈까요? 슬이 프로님도 같이 가실 거죠!?”


“그럼요. 보통 회식 1차 하고 어디 가요?”


“우리는 회식 1차만 해서 2차는 안 가요.”


윤슬의 가벼운 질문에 나는 또 차갑게 대답했다.


“저희 팀이 1차만 보통 하는 편인데 오늘 우리 노래방 가실래요? 저 한번 회사 사람들이랑 가보고 싶었어요! 슬이 프로님 괜찮으시죠? 우리 같이 가요!”


“바다님 노래 엄청 잘 부르나 보다! 좋아요. 이렇게 헤어지기 아쉬우니까 우리 노래방도 갔다가 한 잔 더해요.”


“슬이 프로님 저랑 너무 잘 맞아요. 우리 얼른 가요.”


노래방은 살짝 불안한데 또 내 손을 끌어당기는 바다 프로에게 이끌려 어느덧 노래방에 와버렸다. 회사 사람들 중에는 동기들 외에는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는데 괜찮으려나. 그래도 하이볼을 두어 잔 마시고 나온 뒤라 취기가 올라와 기분이 알딸딸하니 좋아서 흔쾌히 노래방으로 들어갔다.


바다 프로가 요즘 뜨는 노래라며 투어스의 <첫 만남은 계획대로 되지 않아>를 부르며 스타트를 끊었고 연이어 나는 잔나비 노래를 불렀다(취기가 있다고 했지만 그럼에도 매우 부끄러웠다). 그리고 윤슬의 차례가 되었는데, 윤슬은 오랫동안  리모컨을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곧 결정을 했다는 듯이 리모컨을 꾹 눌렀다. 그러자 화면에 윤슬이 선택한 노래가 떴다.


Perhaps Love (duet with J) 


가수 하울 


작사 김이나


작곡 박근철




둥둥둥 둥—


곧바로 화면에 주지훈과 윤은혜의 투 샷이 나오며 간주가 흘러나왔다. 

순간 나는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노래는 안되는데….”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는 나를 바다님이 붙잡았다.


“프로님! 어디 가세요? 이것만 듣고 가요—”


“저 잠깐 화장실이 급해서요…”


“그래도 슬이 프로님 첫 곡인데 듣고 가시지….”


나와 바다님이 짧은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이미 윤슬은 첫 소절을 부르고 있었다.


“언제였던 건지 기억나진 않아 자꾸 내 머리가 너로 어지럽던 시작”



하아… 큰일 났다….


이미 노래를 시작되었고 내 마음의 종은 방망이로 세게 쳐진 듯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 감정의 파도는… 차마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그 감정은….




첫사랑이었다.


노래를 부르는 윤슬이 내 눈에 들어왔다.



사랑인가요.


그대 나와 같다면 시작인가요.


마음이 자꾸 그대를 사랑한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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