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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민 Aug 15. 2024

고백 2

이런 사랑은 병이다.

유니버스가 커지고 마음이 커질수록 우리는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다. 야자가 끝난 후에는 학원을 가는 길에 같이 길거리 떡볶이를 사 먹는다거나, 동네 쇼핑센터에 새로 생긴 빵집에 들러 단팥빵을 사 먹는다거나, 스트레스를 받은 날에는 둘이서 아파트 단지 옆에 있던 천을 따라 산책을 하다 슬이를 집에 데려다주기도 했다. 슬이네 집 앞 놀이터에서 그네를 탔고 시내에 있는 성심당에 가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우리 둘은 꽤나 붙어 있는 시간이 많았는지 학교에서는 여러 가지 작은 소문들이 났다.


고등학교 1학년들이 할 수 있는 나름 착한 소문들은 나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대부분은 ‘슬이와 도윤이가 사귄다카더라’하는 내가 실제로 원하는 이야기들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궁금한 건 슬이도…… 슬이도 그런 루머가 괜찮았을까 하는 그녀의 마음이었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나도록 우리는 친구로 지냈다. 



“슬아. 그 소문 들었어?”


“어떤 소문? 근데 대부분 학교에 돌아다니는 소문은 카더라 아니야? 믿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어.”


“그런가? 아니 애들이 우리 둘이 사귄다고 하던데?”


“하하하하. 그렇게 오해할 수 있겠다. 매일 아침 이렇게 교실에 둘이 일찍 나와서 같이 있으니까.”


“다들 우리 단둘이 있는걸 떡볶이 집에서 봤다는 둥, 갑천에서 봤다는 둥 이야기한다던데.”


“그러고 보니 어느 정도 사실이긴 하다, 그치?”


“너는 애들이 그렇게 이야기해도 괜찮아?”


“뭐… 나쁠 게 있나? 너는?”


“나도.”


순간 나도 모르게 “나는 너무 좋아! 차라리 우리 루머가 사실이고 나랑 너랑 사귀는 사이였으면 좋겠어!”라고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턱끝까지 차오른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고백을 어떻게 하는 건지 몰랐지만 그래도 그렇게 호들갑 떨면서 말하면 안 된다는 것은 알았다. 


교실 문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웬일로 용준이가 들어왔다. 들어오면서 슬이와 나를 보았는지 능청스럽게 한마디 했다.


“한도윤. 윤슬. 너희들 왜 비밀 데이트를 학교에서 해.”


아무래도 슬이랑 나에 대한 소문의 근간은 용준이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럼에도 용준이에게 원망스러운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




초여름이었다.


하늘을 파랗다 못해 투명했고 아파트 단지의 나무와 풀들은 짙은 초록으로 물들고 있었다. 하루종일 풀잎들 사이로 햇빛을 부서져 내렸으며 바람이 풀잎을 흔들어 빛이 일렁였다.


고백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초여름의 계절감 때문도 있었다. 파랑과 초록이 적절히 섞인 계절은 나를 들뜨게 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고 이미 윤슬을 향한 마음은 확실했다.


우리는 그날 오후 해가 뉘엿뉘엿거릴 즘 윤슬의 집 앞 놀이터 그네를 타고 있었다. 동네 아이들은 어디를 갔는지 놀이터에는 우리 둘 밖에 없었다. 아무도 엿듣지 않고 지켜보지 않는 우리 둘만의 시간이었다. 나는 그네를 타다 고백하고 싶은 마음을 참지 못하고 그네를 멈춰 세우며 말했다.



“슬아. 나 하고 싶은 말이 있어.”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나… 사실… 슬이… 너를…”


“좋아하고 있었다고?”


“나… 너 좋아해.”


“바보야. 그걸 이제 말하면 어떡해.”


“알고 있었어?”


“이렇게 강아지 같은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그런데?”


“그런데, 뭐?”


“그런데 너는 어떻냐고.”


“아니, 뭐. 나도 좋지. 나도 좋은데…. 나도 좋아.”


그렇게 나는 어설픈 첫 고백을 했고 슬이는 받아주었다. 


슬이는 이미 내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녀도 그런 나를 멀리하지 않았던 이유는 같은 마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서로의 마음을 소리 내어 확인한 후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우리는 말없이 그네를 탔다. 그네가 올라갈 때마다 나는 하늘을 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우리는 해가 지고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같이 있다 그녀를 바래다주었다. 




-




나는 시끄러운 가족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내 방으로 들어가 가방을 내려놓고 침대에 누워 선풍기를 켰다. 그리고 곧장 핸드폰을 켜 슬이에게 잘 도착했다고 문자를 보냈다. 기분이 좋아 주머니에서 아이팟을 꺼내 귀에 이어폰을 꽂고 하울의 <Perhaps Love>를 틀었다.



사랑인가요.



그대 나와 같다면 시작인가요.



마음이 자꾸 그대를 사랑한대요.



맘이 자꾸 그댈 사랑한대요



온 세상이 듣도록 소리치네요



내 눈앞에서 윤슬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것도 <Perhaps Love>를. 


그 노래를 듣자마자 우리의 첫 만남과 고백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고 그때의 감정들이 미친 듯이 가슴속으로 물방울이 올라오듯 끓어 올라왔다. 서른이 넘어서 첫사랑의 감정을, 그것도 회식자리에서 느끼는 건 썩 유쾌하지 않다. 그 감정이 향하는 사람이 윤슬인 것도 징그럽도록 싫다. 싫다고 생각하는데 감정이 조절이 되지 않아 자꾸 윤슬이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며 입꼬리가 올라가려고 했다. 이 미친놈 같은 모습을 어떻게든 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윤슬이 직접 불러주는 <Perhaps Love>를 듣는 건 생각보다 타격이 더 심했다. 내 눈에 그녀는 남녀가 같이 부르는 이 노래를 어떻게 그렇게 잘 소화하는지 몰랐지만, 그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노래 잘하는 이상형을 만난 느낌. 그리고 고음을 올릴 때마다 찰랑거리는 컬이 들어간 긴 머리는 어찌나 그녀의 외모를 빛나게 해 주는지. 그녀의 눈은 매혹적인 흰 고양이를 닮았다고 느꼈고 오뚝한 코와 얇은 입술은 또 얼마나 내가 꿈꾸던 이상형의 모습인지. 


그녀에게 말을 걸고 싶었다. 그냥 회식이고 뭐고 그녀의 손을 잡고 나가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었다. 꼭 그게 다시 사귀는 게 아니더라도, 그냥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그간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 혹여나 내가 그립지는 않았는지. 내가 너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말하고 싶었다. 보고 싶었다고. 다시 너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꽉 안아 버리고 싶었다.


그댈 이렇게 많이.


사랑하고 있어요.


이미.


그녀는 마지막 소절까지 부르고 황급히 취소 버튼을 눌렀다. 노래방 스피커에서 나오던 반주 소리가 끊기고 정적이 흘렀다. 나는 열일곱 살에 느꼈던 첫사랑의 감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강아지처럼 그녀를 바라봤을 거다. 그리고 실제로 입 밖으로 그 마음이 튀어나왔다.


“슬아…”


예전에 부르던 그 음절과 억양으로 그녀를 이름으로 불렀다. 그녀는 순간 놀란 듯이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곧바로 내 옆자리에 있던 바다 프로를 쳐다봤다. 옆에 우리의 관계를 전혀 모르는 직장 동료가 있었고 나는 내가 큰 실수를 저질렀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노래방에서 뛰쳐나왔다.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




곧장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마음이 혼란스러워 샤워를 했다. 슬이 얼굴이 자꾸 떠올라 내가 어떻게 씻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샤워를 하고 예전에 의사 선생님이 처방해 주었던 신경안정제를 먹었다. 


침대에 누워 차분히 생각을 정리해 보기로 했다. 나는 앓고 있는 질병 때문에 첫사랑의 감정이 떠올랐고, 이를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느껴버렸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에 그녀를 몇 달 동안 짝사랑 한 것 같이 좋아했고 사랑에 빠져들었다. 이게 그 짧은 노래 한곡 동안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란 말인가…. 


그리고 10년 만에 내가 그녀를 사랑할 때 불렀던 말투와 음조로 그녀를 불렀다. 그 옆에 바다 프로가 있었다. 분명 윤슬과 나의 사이가 회사동료 이상인 것을 눈치챘을 거다. 바다 님은 눈치가 빨라서 일도 척척 잘하는 사람이니 말이다. 내일 만나면 어떻게 수습할지 벌써부터 걱정이 들었다. 혹시 윤슬에게 연락이 왔을까 싶어 핸드폰을 쳐다봤다. 아무 연락도 오지 않았다.


부재중 연락이 없는 게 내심 아쉬운 것 보니 아직 첫사랑의 감정이 가라앉지 않았나 보다. 


이런 사랑은 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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