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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민 Aug 22. 2024

회피 1

사랑하는 게 내 맘처럼 되지 않는다고

오늘은 어떤 표정을 지으며 출근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제 윤슬과 바다 프로를 뒤로하고 노래방에서 뛰쳐나와 집으로 와 버렸기 때문에 내 양쪽 자리에 앉는 두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회사를 출근하지 않을 수는 없고, 그렇다고 내 병에 대해서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 수도 없었다. 조금 뻔뻔하게 능구렁이처럼 넘어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먼저 출근을 해 앉아 있는 나에게 바다 프로가 들어오면서 아침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입니다! 도윤 선배, 어제 잘 들어가셨어요?”


“바다님 좋은 아침이에요(방긋). 어제는 제가 좀 술에 취해서 급하게 회귀본능이 생겨서 집에 가버렸어요. 하하.”


“안 그래도 노래방에서 상태가 안 좋아 보이시더라고요. 저 커피 타러 갈 건데 탕비실에 같이 가실래요?”



바다 프로와 같이 탕비실에 갔다. 회사 탕비실은 공용의 공간이었으나 한편에 마련된 테이블에서는 사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게 칸막이가 되어 있었다. 나와 바다 프로는 캡슐커피를 한잔씩 내린 뒤 자리에 앉았다.


“도윤 프로님이 갑자기 집에 가셔서 어제 깜짝 놀랐어요. 어제 하이볼 두 잔 밖에 안 마시지 않으셨어요? 취하신 거 맞아요?”


“제가 술이 약하긴 한데…”


나는 거짓말을 해버렸다. 내가 말술은 아니었지만 나도 술을 적당히 마실줄 아는 사람인데 하이볼 두 잔에 만취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혹시 윤슬 프로님이 저에 대해서 이야기했어요?”


“어제 그렇게 가시고 저희 둘이서 3차 가서 한 잔씩 더했거든요. 윤슬 프로님이 특정지어서 뭐라고 말하시지 않았지만 앞뒤 상황상 뭔가가 있다고 생각하긴 했어요.”


“뭔가 대단한 사이는 아니었고 둘이 알던 사이가 맞긴 해요.”


“그럴 것 같았어요. 도윤 선배가 윤슬 프로님 대하는 것도 다른 팀원들 대하는 거랑 다르고, 노래방에서도….”


“막 그렇게 심오한 사이는 아니에요. 그냥 오랜만에 봐서.”


“혹시 두 분 썸 탄 사이 아니에요? 아니면 도윤 선배가 그렇게 차갑게 대하실리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썸... 이 아니라 나의 첫사랑에 첫 연애에 첫 애인이었고 꽤 오래 사귀었답니다. 그리고 말도 안 되게 상처받으면서 헤어지긴 했지만요.


“아무튼 지금은 회사에서 문제 있는 사이는 아니에요.”


“선배 불편하시면 말씀 안 하셔도 돼요. 더 캐묻지는 않을게요.”


바다 프로의 가벼운 말투에 비해 내가 너무 진지하게 대답하고 있었나 보다. 바다 프로는 더 묻지 않고 자리로 돌아갔다.



자리로 돌아오니 윤슬이 출근해 있었다. 그녀는 눈웃음을 지으면 나에게 인사했다.


“도윤 프로님. 어제 많이 취하셨나 봐요? 집에는 잘 돌아가셨어요? 안 그래도 갑자기 나가셔서 걱정했어요.”


“어제 집에는 잘 들어갔어요. 갑자기 회귀본능이 튀어나와서 저도 모르게 집에 가버렸네요. 하이볼 두 잔 먹고 취하는 사람은 아닌데.”


“그렇죠. 하이볼 먹고 취하실 분은 아닌 것 같은데. 아무튼 아무 일 없었다니 다행이네요.”


그녀의 웃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아진다. 걱정과 다르게 그녀와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나누니 마음이 편해진다. 오히려 그녀에게 말을 더 걸고 싶다. 업무를 시작하고도 무의식적으로 그녀에게 눈이 갔다. 아직 어제 <Perhaps Love>의 효력이 아직까지 가나보다. 그럼에도 병적인 감정에 휩쓸려 그녀를 다시 사랑하면 안 된다. 그녀가 나를 어떻게 버렸는지, 나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안겨주었는지 기억하면서 감정을 억눌렀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질 무렵 다른 부서 동기인 준형이 서류를 전달해 준다며 내 자리로 서류 더미를 들고 왔다.


“형. 근데 옆자리 새로 오신 분은 누구야?”


“윤슬 프로님이라고 우리 팀 경력직으로 오셨어.”

준형은 윤슬을 바라보며 (그의 필살기인) 눈웃음을 지었다. 그걸 의식한 윤슬은 자연스럽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저는 여기 도윤이형 동기 김준형이라고 합니다. 볼일도 있고 경력직분이 새로 오셨다고 해서 겸사겸사 왔어요.”


준형이 2차 눈웃음을 보냈다. 준형은 착하고 성실한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외로움이 많은 친구라 회사 안과 밖으로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는 걸 동기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이놈 자식이 윤슬에게도 눈빛을 보내는 걸 보니 가증스러웠다. 본능적으로 윤슬을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 썸 타는 분이랑 점심 약속 있다고 하지 않았어? 이제 곧 점심시간인데.”


“점심 약속? 나 오늘 없…”


“그래그래 점심 약속 있으니까 빨리 가봐.”


나는 준형의 등을 떠밀며 그를 데리고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형. 뭐야. 왜 그래? 마음에 드시는 분이야?”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아무튼 여기 와서 이러지 말고 썸타시는 분이랑 잘해보도록 해.”


“인사만 한 건데 왜 그래.”


“인사만 하는데 네 필살기인 눈웃음은 왜 치냐. 아무튼 우리 팀 와서 물 흐리지 말고 가세요.”


“이거 이거. 보니까 뭐가 있는데?”


“있긴 뭐가 있어.”


“그럼 형이 잘해봐. 그리고 오늘 저녁에 동기 회식 있는 거 알지?”


“맞네. 나 어제도 회식했는데.”


“어제 달렸어? 얼마나 마셨는데?”


“하이볼 두 잔 정도?”


“에이 그럼 안 마신 거나 다름없네. 오늘은 우리랑 달리자구.”


“이번에는 시끄러워서 술집에서 쫓겨나면 안 되니까 조신하게 먹자. 적당히 먹자고.”


“하하하하. 그때 진짜 웃겼는데. 나 갈게. 이따가 퇴근하고 봐.”


준형은 유유히 자신의 부서로 돌아갔다. 나는 준형의 뒷모습을 보면서 녀석의 머리에 꿀밤 같은걸 한 대 쥐어박아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이내 이런 질투심의 감정이 올라온 걸 인지했고 다시 윤슬이 자신을 어떻게 버렸는지 생각했다. 어떻게든 윤슬을 향한 이 마음을 억누르려고 애썼다. 이건 다 병이니까. 병 같은 사랑이니까.



-



동기회식은 1차로 제주도에서 공수한 흑돼지 삼겹살이 유명한 집에서 배를 채우고 간단히(?) 소주 8병과 맥주 5병을 비웠다. 그리고 2차에서는 우리 기수의 데시벨을 감당할 수 있는 북적북적한 일본식 술집에서 안주보다는 술을 잔뜩 시킨 체 진행되었다. 


동기들은 회사에서 일어났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꼰대 상사 이야기나 선배 흉을 보기도 하고, 준형의 수많은 엑스 이야기로 그를 짓궂게 놀리기도 했다. 최후나 다른 남자 동기들은 프리미어리그나 한국 야구팀 이야기를 종종 하기도 했고, 이직 이야기나 업계의 다른 회사 루머들을 공유하기도 했다. 물론 술이 더 들어갈수록 사적이 이야기가 많아졌으며 내향적인 성격을 가진 동기들도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물론 나도 술에 취해 기분 좋게 떠들었고,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말이 꼬였다.


“아니 그래서 준형 오빠는 도대체 몇 명을 찌르고 다니는 거야? 썸 타는 건 딱 한 명 아니야?”


“아니 나는 딱 한 명만 좋아한다고. 뭘 자꾸 여기저기 찌른데! 나는 진짜 한 번에 딱 한 명! 이거 내 철칙이라고.”


“그러면서 너 여기저기 눈웃음치고 다니잖아. 오늘도!”


“내가 오늘도 눈웃음을 쳤다고? 아니 진짜 나 안쳤어!”


“아니 그럼 내가 오늘본거는 습관성 웃음 뭐 그런 거야?”


내가 한 말에 다른 동기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준형이도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오늘 그 경력직 분한테 인사한 거 갖고 그러는 거야? 나는 진짜 눈웃음 아니었다고.”


“아니기 뭐가 아니야. 눈이 이렇게 접혀서 반달보양이 되는데. 내 생각에는 그거 꼬시는 거 아니면 습관성 눈웃음이야.”


“하하하하. 내 생각에는 도윤이형이 새로 오신 분 마음에 들어서 그런 거 아니야? 내가 눈웃음이면 형은 눈에서 레이저를 쏘던데?”


“그건! 내가 슬이가 부르는 노래를 듣고 옛날 감정으로 돌아가서 그런 거라고. 내가 슬이를 사랑하고 싶어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병 때문에 그렇게 된 거라고! 아이씨 정말!”


순간 내가 취해서 필터 없이 내뱉은 말에 다들 당황한 듯 정적이 흘렀다. 아쉽게도 내가 동기들 중에 제일 술을 못하고(그렇다기보다는 다들 어떻게 그렇게 말술인지) 나 외에 다른 동기들은 심하게 취해있지 않았다. 내 옆자리에 있던 후가 나를 일으키며 말했다.


“이 형 또 취했다. 헛소리를 다하네. 내가 숙취해소제 먹이고 올 테니까 놀고들 있어.”


“내가… 슬이를 사랑하는 게… 내 맘처럼 되지 않는다고…”


“형 아무 말하지 말고 그냥 나와.”


후는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와 술집 옆에 있던 씨유 편의점으로 나를 데리고 나갔다. 그리고 거기서 숙취해소제와 메로나를 사 갖고 와 편의점 앞 테라스에 앉았다. 나는 후가 건네준 스틱형 숙취해소제를 짜 먹었다.


“형. 그거 진짜야?”


“뭐? 준형이 저 자식이 눈웃음친 거?”


“아니. 형 그 경력직분 사랑하는 거.”


“그게… 사실인데… 나 너무 힘들어.”


나는 후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윤슬과 나의 이야기, 내가 상처받아서 폐인이 되었던 시절, 그리고 그 후에 찾아온 PTSD 같은 증상과 이번 팀 회식에서 있었던 일까지 모두. 모든 이야기를 들은 후는 딱히 말이 없었다. 어떠한 위로말을 건네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쉽게 나를 나무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울먹거리는 내 목소리를 듣고 내가 말하는 이 모든 이야기가 사실이고 진심이라는 걸 느꼈을지도 모른다.


후는 그저 옆에 앉아서 같이 메로나를 먹을 뿐이었다. 근데 그런 후의 행동에 내 상황과 마음 그대로 그가 받아들인다고 느꼈다. 



-



나는 노래방 사건이 있고 난 후부터 윤슬을 냉랭하게 대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녀와 말을 섞어야 하는 상황을 피하고 식사를 따로 했다. 그런 이유는, 그녀에게 잘못한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 첫 번째였고 오히려 그녀를 피해 다니는 게 더 편하다는 결론이 나온 게 두 번째였다. 일적인 내용이 아닌 다른 대화는 일체 벽을 치고 하지 않는 나의 행동을 그녀도 느꼈는지 의식적으로 몇 번 나에게 말을 결려고 했으나 나는 핑계를 대며 자리를 피했다. 


물론 이런 상황은 그리 오래갈 수 없었다.


출근 후 탕비실에서 캡슐커피를 내리고 있는 나에게 윤슬이 다가왔다. 그녀는 조금 심각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눈빛을 피해 다른 곳을 쳐다보았다.


“도윤 프로님. 옥상에서 저랑 잠깐 이야기 좀 하시죠.”


“네? 저 팀장님이 시키신 일이 있어서 바로…”


“그럼 여기서 이야기할까요? 왜 저만 보면 피하고 말도 안 나누려고 하시는 거예요?”


“그건…. 저희가 회사 동료로서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한다고 생각하는데요. 그거 외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습니다.”


“정말요? 우리가? 회사 동료로서? 적당한 거리감?”


“넵….”


“…….”


윤슬은 마음을 숨기는 나의 모습을 알아차리고 화를 감추지 못했다. 눈빛과 입술을 떨렸다. 그리고 크게 한숨을 쉬며 탕비실을 나가버렸다. 윤슬이 나간 뒤에 바다 프로가 들어왔다.


“도윤 선배. 무슨 일이에요? 왜 슬이 프로님 화나게 했어요!”


“아니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라. 제가….”


“선배 얼른 가서 화 풀어주고 오세요!”


“넵….”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바다 프로의 호되게 혼내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윤슬을 찾으러 탕비실을 나갔다. 엘리베이터 안내판에 보이는 층 숫자를 보니 윤슬은 옥상으로 올라간 것 같았다. 나는 바로 올라가는 버튼을 눌렀다.


솔직하게 이야기할 걸 그랬나. 사실 나는 이런 병이 있어서 너를 다시 사랑하게 되었다. 뭐 이런.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도 안되거니와 나의 병을 말하는 건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윤슬을 화나게 한 죄가 있으니 오해를 풀고 설명해 주고 싶은데. 


옥상 문을 열고 나가니 푸른 하늘에 햇빛이 내리쬐었다. 아직은 초여름이라 햇빛이 그렇게 뜨겁지 않았다. 햇빛을 뒤로하고 윤슬이 한편에 서있었다. 화를 가라앉히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조금은 나랑 비슷했다. 귀에는 에어팟을 끼고 노래를 듣는 모습이 말이다. 그녀에게 다가가 미안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직 화가 가라앉지 않았지만 좀 전처럼 무서운 눈빛은 아니었다. 오히려 원망으로 보였다.


그녀가 에어팟 한쪽을 내 귀에 꽂아주었다.


노래가 흘렀다.




반복된 하루 사는 일에 지칠 때면 내게 말해요


항상 그대의 지쳐있는 마음에 조그만 위로 돼 줄게요




그녀가 그때 좋아하던 토이의 <그럴때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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