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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민 Sep 12. 2024

아직도 1

연락하지 말 걸 그랬어


“너 아직도 이 노래 들어?”


나는 슬이에게 물었다. 하지만 슬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위해 말없이 노래를 들었다.


내리쬐는 햇빛에 구름마저 부서져 버릴 것 같은 여름날, 카페베네 과일 빙수를 앞에 두고 싸웠던 지난날이 온전히 기억난다. 토이를 유독 좋아했던 그녀 귀에 이어폰을 꽂아주며 같이 듣자고 했던 <그럴때마다>. 다시 들으니 그때로 돌아간 것 같다. 그때나 지금이나 슬이의 기분을 온전히 이해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건 여전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옆에 있고 싶다.


아차차.

이건 노래 때문이니까 정신 똑디 차려야지. 이건 진짜 내 감정이 아니라 노래 때문에 올라온 두드러기 같은 감정이니까.


노래가 끝나고 한쪽 귀에 꽂았던 에어팟을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에어팟을 건네어받은 윤슬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노래를 들으면 화가 가라앉아.”


“그래서 20년도 더 된 노래를 듣는다고?”


“뭐 그럴 수도 있지.”


“아까는 미안했어.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닌데.”


“우리 아는 척까지는 아니더라도 선 긋지 말고 편하게 지내자. 맨날 못 볼 사람 본 것처럼 행동하고 내가 얼마나 서운한 줄 알아?”


“아니 그건 내가 너를 다시 볼 줄 꿈에도 생각 못했으니까.”


“그래서 다시 보니까 차갑게 굴고 싶었어?”


“꼭 그런 건 아니고. 아무튼 내가 너 들어오는데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뭐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 것도 아니고 뭘 놀래.”


“넌 안 놀랐어?”


“나? 난 별로.”


“매사에 차분한 성격은 여전하구나.”


윤슬은 대답하지 않고 나를 잠시 쳐다봤다.


“이러니까 너 옛날 모습 나온다. 반갑다.”


“어?”


“아무튼 너무 차갑게 굴지 말고. 데면데면 굴지 말고. 편하게 지내자. 난 화 다 풀렸어. 이제 돌아가자.”


슬이는 환하게 웃으면 계단 쪽으로 돌아나갔다. 그녀의 검은 긴 머리가 찰랑 차랑 유쾌하게 흔들렸다. 나는 그런 슬이의 뒷모습을 보고 웃어버렸다. 노래를 듣고 그녀를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은 병 때문에 생긴 마음이었지만 그 마음의 임무를 완수하니 기분이 좋았다. 



정신 차려 한도윤. 

윤슬과 또 프로젝트도 진행해야 하는데 옛 감정에 사로 잡혀서 배시시 웃고 있으면 되겠냐고. 프로페셔널하게 일해야지. 그리고 지금 윤슬에게 향하는 마음은 노래를 들어서 튀어나오는 병의 증상이라고. 근데 하필 윤슬이 두 번 연속으로 트리거가 되는 노래를 내 앞에서 트는 이유는 뭘까? 왜 아직까지도 그 시절 노래를 찾아 듣는 건지. 벌써 10년도 넘게 흘러버린 노래들인데.


나는 손사래를 치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옥상 문을 열고 동기 최후가 들어왔다.


“형 뭐야? 담배 폈어?”


“담배?”


“아니 손을 휘젓고 잇길래.”


“아냐. 그냥 공기가 탁해서.”


“무슨 소리야. 이렇게 미세먼지도 없이 맑은 날에.”


“그런가? 넌 여기는 왜 왔어?”


“아니 바다 님이 올라가 보라고 하던데? 올라오는데 윤슬 프로님은 내려가시고. 둘이 뭐 있었어?”



나는 후에게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토이 노래와 엮여있는 과거의 사건들까지 모조리.


“그래서 토이 노래가 나올 때 느꼈던 감정은 뭔데?”


“그냥 옆에 있고 싶다? 위로해 주고 싶다?”


“뭐야. 완전 좋아하는 거 아니야?”


“내가 슬이랑 사귄 지 한 달쯤 되었을 때 이야기니까 좋아하는 감정이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다.”


“그럼 그걸 지금도 느끼는 거 아니야?”


“이게 진짜 감정이냐고? 노래를 듣고 올라오는 감정이 어떻게 진짜 감정이야. 지금은 안 좋아해. 슬이가 나를 얼마나 힘들게 했는지 생각하면 다신 사랑할 수가 없다.”


“아무리 병으로 생겨난 감정이라도 그게 진짜 감정이 아니면 어떻게 느끼는 거야?”


“나도 몰라.”


“그냥 다시 좋아하면 안 돼?”


“다시?”


“둘이 투샷이 너무 잘 어울리거든.”


“절대 안 된다. 내가 말했잖아. 헤어지고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근데 아직까지도 왜 헤어졌는지 모르는 거 아냐?”


“어쨌든 헤어졌고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내 대학교 친구들한테 들으면 밤새서 말해줄 거야. 솔직히 다시 만나다고 해도 또다시 그렇게 헤어진다고 생각하면 무서워. 다시 상처받고 싶지도 않고. 그러므로 슬이에게는 감정을 갖고 싶지 않아.”


“형. 그거 알지? 마음이 생각처럼 되면 세상 살기 겁나 쉬울 거라는 거.”


우리는 강해지는 태양광선에 타 죽겠다며 다시 사무실로 돌아갔다. 자리로 돌아가는데 후와 바다 님은 서로 일종의 계획된 눈빛을 주고받았다(아무튼 잘 해결됐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자리에 앉아 왼쪽 옆자리 윤슬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녀는 기분이 좋은 듯 모니터를 보며 경쾌하게 키보드를 쳤다. 아직 토이 노래에 감정이 남아 있어 화가 풀린 그녀 모습에 마음이 놓였다. 어찌 되었든 그녀 옆에 내가 있으니까. 




-




슬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실 그녀가 우리 회사로 이직하고 한 번도 사적으로 연락한 적은 없었다. 물론 공적으로도 그녀의 휴대폰으로 연락할 일은 없었다.


윤슬의 번호는 우리가 헤어지고(라기보다는 내가 일방적으로 차이고) 수개월 동안 못 지우고 있다가 1년 정도 흘렀을 때 연락처에서 지워버렸다. 그리고 약 10년이 흘렀으니 그녀의 번호는 내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어제 그녀가 아프다는 소식을 바다 님을 통해 들었다. 사실 마음이 쓰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다. 그래서 회사 인포 시스템을 통해 그녀의 연락처를 알아냈다.


아주 오랜만에 그녀의 번호가 다시 내 연락처 속으로 들어왔다.


“바다 님. 혹시 윤슬 프로님한테 전화해보셨어요?”


“저는 카톡으로만 이야기했는데 많이 아프신가 봐요.”


“아 그래요?”


“혼자사신 다고 하는데 한번 가봐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요.”


“슬이, 아니 윤슬 프로님 집으로요?”


“네. 속이 아프신 것 같은데 아무 데도 못 나가고 먹지도 못하고 계시다고 하더라고요.”


“네!?”


“그래서 오늘 저녁에 끝나고 본죽 들려서 흰 쌀죽 사서 병문안 가려고요. 도윤 프로님도 같이 가실래요?”


“아니 저는… 그래도 제가 가면 불편하지 않을까요? 여자분 혼자 사시는데 가는 게 좀 그런데.”


“그럼 나중에 한번 연락이라도 해보세요.”


“그래야겠네요. 빨리 나으셔야 할 텐데.”



그러고 나서는 메시지를 보내볼까 고민을 했다. 이제 연락처가 있으니 메시지를 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카카오톡에 그녀의 전화번호를 넣어 친구추가를 했다. 그리고 메시지 창에 글을 적었다.


- 슬아. 자니?


너는 지금 뭐 해 자니 밖이야도 아니고 전남친이 껄렁껄렁 한번 찔러보려는 멘트 같아서 바로 지워버렸다. 그리고 천천히 다시 쓰기 시작했다.


- 슬아. 나 한도윤이야. 괜찮아? 아프다는 이야기 들었어. 혹시 필요한 거 있으면 나한테 연락해.


연락해? 이것도 껀덕지를 얻어서 전여친에서 집적거리고 싶은 전남친 멘트잖아. 다시 백스페이스 빠르게 눌렀다.


- 슬아. 나 도윤이야. 회사에서 네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걱정돼서 연락했어.


메시지를 보내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도무지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무리 봐도 다시 연락한다거나 내가 널 많이 걱정하고 있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도대체 어쩌겠다는 건데. 스스로에게 물어봤지만 아무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내 나는 메시지를 보내는 걸 포기하고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결국 나는 윤슬의 연락처를 알게 되고 카카오톡 친구만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그녀에게 전화를 걸게 된 건 온전히 그녀에게서 걸려온 부재중 전화 때문이었다. 퇴근을 하고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는 동안 그녀에게서 세 통의 전화가 와 있었다. 뭐에 정신이 팔렸는지 주머니 속에 있는 휴대폰 진동을 전혀 못 느꼈고 나중에 확인했을 때 분명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구나 생각했다.


바로 슬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그게 화근이었다.

그녀에게 전화를 거는 순간 통화연결음 대신에 노래가 흘러나왔다.


널 사랑한다.


널 사랑한다.


나에겐


하나뿐인


사람이여.



단 5초밖에 지나지 않아 트리거가 당겨졌다.


이 노래는. 내가 아주 좋아했던 이 노래는, 슬이가 나를 떠났을 때 수도 없이 들었던 노래였다. 


케이윌 <그립고 그립고 그립다>.


2009년 초겨울에 이 노래가 나왔을 때 나는 이 노래가 1위를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솔로 남자 발라더의 애절한 이별노래는 내 취향을 적중했고 주구장창 밤낮없이 이 노래를 들었다(무려 그때의 나는 이별을 겪어보지 못했으나 애절한 감성을 참 좋아했다). 슬이랑 노래방을 가서 다섯 키를 낮춰 이 노래를 부르면 슬이는 무슨 이런 슬픈 노래를 좋아하냐며 한 마디씩 하고는 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꼭 완창 하는 나를 지켜봐 주곤 했다. 


그리고 우리가 헤어진 크리스마스이브 이후 진짜 이별에 무너진 마음을 추스르고 있지 못할 때 이 노래를 들었다. 사랑한다고 하는데 아프다고, 그립다고 하는 가수의 가사가 찬란한 사랑의 반대편에는 무엇이 있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가사처럼 나는 찢어질 듯이 가슴이 아팠고, 그러면서도 그녀를 그리워했다. 그때까지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사랑. 아픔. 그리움. 세 가지 감정이 섞인 게 이별이었나 보다. 그 감정의 결과는 멈추지 않는 눈물과 나의 폐인생활로 이어졌고 한동안 나는 그렇게 세상이 무너진 듯 살았다.


트리거가 당겨지고 그 세 가지 감정이 내게 들어왔다. 윤슬이 그녀의 삶에서 나를 도려냈을 때 나가떨어졌던 그때의 내 마음으로 돌아갔다.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전화를 끊어버리려는 순간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도윤아. 나 너무 아파. 도와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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