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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민 Oct 01. 2024

아직도 3

그때로 돌아가는

“너의 그 빌어먹을 컬러링 때문이야.”


우리는 조용히 타이 음식을 비운뒤 옆 카페로 자리를 이동했다. 묘한 분위기에 긴장감이 흘렀다. 어쩌면 나는 그녀에게 나의 비밀을 털어놓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그녀 또한 나의 비밀을 들을지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내 컬러링이 어떻게 너에게 무엇을 했길래 빌어먹을 정도의 수준까지 내려간 거야?”


“너의 빌어먹을 컬러링이 <그립고 그립고 그립다>인 거는 알고 있지?”


나는 거친 워딩과 달리 쥐가 구멍을 파 듯 조용히 그녀에게 말했다.


“그거 네가 좋아하는 노래잖아. 그 노래가 어쩌다 그렇게 되었니?”


“사실 그 노래를 비롯해서 몇몇 노래를 들으면 그때로 돌아가.”


“그때? 언제?”


“너랑 사귈 때.”




나는 참지 못하고 나의 비밀들을 털어놓았다.


“슬아. 사실 나 지금도 너 좋아해. 근데 좋아하는 감정이 그런 노래들 때문에 올라온 거야. 네가 처음 <Perhaps Love>를 불렀을 때나, 그 후에 토이 노래를 들었을 때나, 이번에 컬러링을 들었을 때 나는 그때로 돌아가버렸어.


지금 널 좋아하는 감정이 너무 강해서 네가 10년 전에 날 이유 없이 떠난 것도 상관없을 정도로 널 좋아해. 그런데 힘들어. 왜냐면 이 감정이 진짜로 느껴지는데 이게 진짜인지 알 수 없어서야.


사실 나 이거 병이야. PTSD 같이 특정 노래를 들으면 상황과 상관없이 어떤 감정들이 툭 튀어나와. 고치려고 병원도 가봤고 심리상담도 받았어. 의사는 어떤 특정 병명 없이 트라우마 때문이라는데, 어떻게 고칠 방법이 없더라. 그러다가 너를 다시 만났는데 몇 주 동안 트리거가 되는 노래가 계속 들리는 거야. 


그래서 처음 너를 다시 만나고 차갑게 대하고 멀리하려고 했어. 그런데 네가 옆에서 그 노래를 부르고 들려주는데 견딜 수가 없었어. 애써 외면해보려고도 하고 처방받은 약도 먹었는데 마음이 맘처럼 되지 않더라.


근데 이런 감정을 진짜 내 감정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어.


내 병 때문에 생긴 거니까.


솔직히 내가 널 좋아하는 게 떳떳하지 못해.


그래도 너랑 있는 게 좋아서 오늘도 이렇게 달려온 건데. 그리고 또 집으로 돌아가면 널 그리워하고 슬퍼할 테고. 또 후회하겠지.”


그녀는 검고 깊은 눈으로 차분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엇인가 마음을 먹었는지 입을 열었다.


“사실 난 우리가 한 번쯤은 다시 만나서 이야기를 할 것 같았어. 내가 너를 떠났을 때에 대한 이야기 같은 거 말야.


솔직한 마음으로 도윤이 너는 언젠가 또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었어. 다시 한번은 꼭 마주쳐서 이야기해야겠다. 꼭 다시 만나야겠다 생각했지. 그런데 마침 이직한 회사 옆자리에 네가 있지 뭐야.


나는 널 다시 볼 수 있어서 좋았어.


10년 전에 비해 달라진 얼굴이며 스타일에도 예전의 좋은 모습들을 간직한 너의 모습을 보니 좋더라고. 그래서 저녁도 같이 먹자고 부른 거야.”


“슬아. 내 마음이 진짜가 아닐지도 몰라….”


“진짜가 아니면 그런 마음이 쉽게 사라져?”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내 마음도 진짜야. 그래서 사라지지 않아.”




우리가 마시던 커피가 담긴 컵의 바닥을 보였다. 


“우리 좀 걸을까?”


나는 슬이와 함께 봉은사를 둘러가는 산책길을 걸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계절은 여름이었다. 아직을 열대야가 오지 않아 나무 숲 사이로 걸으면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해가 기울어 빛을 감추기 시작하는 시간이라 봉은사 절에 조명이 켜졌다. 우리는 조명으로 밝혀진 절을 보기 위해 산책길을 나와 마당으로 걸어갔다.


“이렇게 같이 걸으니까 좋네.”


슬이가 말했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가던 걸음을 멈추었다. 두 발짝을 더 간 슬이는 뒤를 돌아보았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슬이의 얼굴을 아주 오랜만에, 아니 10년 만에 처음으로 자세히 보았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보다 성숙해졌지만 슬이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그때 내가 사랑했던 윤슬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게 아련했다. 어쩌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순간이라는 생각에.


나는 두 발짝을 더 나아가 슬이 옆에 섰다. 


그리고 슬이의 손을 잡았다. 그때로 돌아간 것 같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내 손가락을 겹쳐 깍지를 끼었다.


“우리 이러고 조금만 걸을까?”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행동했는지 잘 몰랐다. 어쩌면 그냥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요 몇 주간 힘들었던 감정들 사이에서도. 10년 동안 헤어진 그 사이에서도. 그녀가 보고 싶었던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복잡한 마음 중에도 한 번은 시도해보고 싶었다. 노래가 아니라 그녀의 손을 잡으면 그때로 돌아가는지. 나의 빌어먹을 병이 아니라 진정 내 마음으로 그녀에게 돌아가는지.


그렇게 우리는 한동안 봉은사 절을 서성거렸다.




-




우리는 해가 지고 어둑어둑해졌을 때 절에서 나왔다.


“나는 모태신앙인데 꼭 절에 오면 마음이 편해지더라.”


“근데 우리 부처님 앞에서 손잡으면 안 되는 거 아니야? 경건해야지.”


“어떤 종교든 사랑이 기본이잖아. 이웃도 사랑하라는데.”


“도윤이 너 아직도 교회 다녀?”


“아니. 이제 주님한테서 독립했지.”


우리 둘은 길을 건너 코엑스 앞을 걸었다. 우리는 누가 봐도 직장인인 차림새를 하고 있었지만 다시 교복을 입은 것 같았다. 우리가 걷는 초록색 인조잔디는 우리가 살던 동네의 갑천 잔디밭 같았고 불어오는 바람은 놀이터에서 맞는 시원한 바람과 비슷했다. 또 비슷한 게 있다면 우리가 손을 잡은 것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 것. 그리고 끊이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는 우리.


아무래도 오늘 집에 들어가기는 힘들 것 같다.


초여름이기 때문에.


<우리의 노래를 들으면 그때로 돌아가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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