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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재민 Jan 12. 2023

안녕, 도깨비(16화)

#16. 구미호의 효심

아내 미호는 방학 동안 친정에 가 있다. 아이들도 같이 데려가려고 했지만, 아이들은 한사코 거부했다. 내 작업실이 있는 시골집이 편하다고들 했다.      


“아빠 기사도 쓰고 소설도 써야 하는데, 너희들 여기 있으면 신경 쓰여서 방해만 될 거야.”

“신경 쓰지 않게 조용히 지낼게요. 방학 숙제도 열심히 하고.”

“안돼, 너희들 삼시세끼 밥 차려 주는 것도 성가시고, 복싱이랑 태권도도 가야 하잖아. 방학이라고 놀 생각만 하지 말라구.”


미호는 미리와 바리를 어르고 달랬지만 아이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미호를 설득했다.      

“그냥 둬요. 밥은 내가 알아서 차려 주고, 복싱과 태권도도 내가 데려다주고 데려올 테니. 당신은 장인 장모님이나 잘 보살펴요.”     


그래도 미호는 영 미덥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도깨비랑 놀고 싶어 하는 아이들의 마음을 나는 읽을 수 있었다. 아이들도 떠밀 듯 엄마인 미호를 보냈다.      


“좋아. 대신, 너희들 아빠 귀찮게 하면 안 돼. 운동 가는 것도 빼먹지 말고. 만약 한 번이라도 결석했다는 연락이 오면 그날로 여기 생활은 끝이야.”     


아이들은 생글거리며 “네!”라고 대답했고, 미호는 간단한 짐과 처가에 가져갈 음식을 장만해 차에 올랐다. 미호는 속으로 '그래, 애들을 데려가면 병수발에 더 불편해. 여기 두고 가는 게 나을 수도 있어'라고 생각했다.     

시골집에서 미호의 친정까지는 자동차로 40분 거리였다. 혼자 차를 몰고 가던 미호는 친정 집 근처의 죽집에 들렀다. 부모님이 평소 좋아하는 팥죽을 사기 위해서다.      


전통 시장통 안에 죽집은 노포(老鋪)였다. 미호의 부모도 젊은 시절 여기서 할아버지 할머니 드릴 죽을 샀다. 미호는 죽집 출입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에 달린 방울 소리에 안에 있던 사람들이 문 쪽을 쳐다봤다. 팔순을 바라보는 대머리 사장님과 머리 허연 사모님이 반갑게 그녀를 맞았다.      


“아이고, 이게 누구여? 미호 아녀?”

“이 양반이. 나이가 몇인데 미호라고 그랴. 시방 애가 둘인디.”

“벌써 그런가. 아이고 미안허네. 입에 붙어설랑.”     


죽집 부부가 티격태격하자 미호는 “괜찮아요. 제가 어릴 때부터 드나들었던 곳인데 뭘”이라고 웃으며 말렸다.      

“친정에 왔나보쥬? 그러잖아도 어째 요새 사장님은 통 기별을 안 하셔서 궁금했는디?”

“아버지께서 요즘 거동이 불편하세요. 바깥출입이 어려워서 못 오셨나 보네요.”

“아이, 그렇구먼. 어쩐지 사모님 얼굴 뵌 지도 꽤 여러날이구먼.”

“네, 아버지 병간호하느라 정신없으세요.”

“그나저나 무슨 죽으로 드릴까?”


“팥죽 두 그릇만 주세요. 두 분이 좋아하기도 하고, 마침 오늘이 동지라면서요.”     

“그렇지, 오늘이 팥죽 먹는 애동지여. 동짓날 이 팥죽 한 그릇 먹으면 도깨비들이 무서워서 도망간다고 하지 않는가. 아 참,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잠깐만 기다리시게. 금방 준비할 테니.”     


미호는 주문을 마친 뒤 식당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혼잣말로 “도깨비, 도깨비”라고 중얼거렸다. 식당 벽에는 현암사에서 나온 달력이 마지막 12월을 가리키고 있었다. 달력 옆에는 오래된 괘종시계가 걸려 있었다. 시계추가 좌우로 바삐 움직였다. 

     

잠시 후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가 ’뎅~뎅~뎅~’ 열두 번 울렸다. 팥죽은 10분 만에 포장 용기에 담겼다. 죽집 대머리 사장은 ‘옥이네 죽집’이라고 새겨진 죽상자에 조심히 담아 미호에게 건넸다. 미호는 지갑에서 현금 만육천 원을 꺼내 계산하고 식당 부부에게 인사했다.      


식당 사장은 “맛나게 드시고 얼른 쾌차하시라고 전해주시게”라고 했고, 그의 부인은 “증말, 효녀여 효녀”라고 미호의 등을 두드렸다. “고맙습니다. 많이 파세요. 또 올게요.”     


죽집을 나온 미호는 서둘러 주차장으로 향했다. 죽이 식기 전에, 부모님이 시장하기 전에 집에 도착해야 했기 때문이다. 포장 용기 속 팥죽은 펄펄 끓고 있었고, 그 속에 쫀득한 새알심 몇 알이 박혀 있었다. 친정집은 오 분 거리였다. 미호를 보고 반가워할 부모님 얼굴을 떠올리며 미호는 차의 시동을 걸었다. 친정집은 오 분 거리였다.      


5층짜리 원룸 건물 주차장에 차를 댄 미호는 팥죽을 들고 나왔다. 건물 소유주는 미호의 아버지인 ‘구마적’이다. 젊은 시절 건축업을 배워 빌라 여러 채를 짓고, 그 돈을 벌어 직접 지은 집이 이 건물이다. 미호도 이곳에서 태어났다.     


미호의 부모는 4개 층을 임대로 주고, 맨 꼭대기 층에서 살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에서 내린 미호는 복도를 가로질러 정면에 있는 친정집 현관 앞에 섰다. 그리고 벨을 눌렀다. 안에선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복도에는 열린 창문으로 찬바람이 훅 밀려 들어왔고, 미호는 뭔지 모를 오싹함을 느꼈다.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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