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도깨비 대 도깨비
오후 3시가 막 지났을 무렵이었다. 미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나는 그때 오두막에서 도깨비의 마지막 남은 수리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 여보. 장인 장모님은 어떠셔? 괜찮으셔?”
“괜찮아요. 시장에서 팥죽 사다 같이 먹고 막 치웠어요.”
“그래, 다행이네.”
“그보다 여보...”
“응, 왜? 무슨 일 있어?”
“조금 전에 집에 어둑시니가 나타났어..”
“뭐, 이 대낮에? 그래서? 다친 데는 없고?”
“다행히. 멀쩡해. 그런데 엄마 말로는 어둑시니 말고도 도깨비도 나타난대요.”
“뭐?”
“엄마 아버지는 이제 기력이 빠져서 신통력이 안 통하고, 나도 아직 내공이 부족한가.. 쉽지 않네요.”
“이걸 어쩐다. 큰일이군.”
통화를 마치고 큰 한숨을 쉬고 있는 내게 도깨비가 넌지시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도깨비는 또 무슨 소리야? 나 말고 도깨비가 또 있나?”
도깨비는 옆에서 나와 미호의 통화를 듣고 있던 모양이었다. 나는 도깨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러자 도깨비는 빙그레 웃었다.
“왜 웃는 건데? 남은 속이 타 들어가는구먼.”
“걱정하지 말라고.”
“걱정하지 말라니? 무슨 뾰족한 수라도 있는 거야?”
“내가 누구신가, 도깨비님 아니신가?”
“아무리 네 이름이 도깨비이고, 둔갑술을 쓴다지만, 진짜 도깨비와는 다르잖아.”
“어허. 걱정 붙들어 매라니까. 나한테 다 방법이 있다구.”
도깨비는 자기와 함께 처가에 다녀오자고 제안했다. 나는 도깨비를 차에 태우고 처가로 향했다. 도깨비는 그사이 사람으로 둔갑해 있었다. 나는 미호와 처가 식구들에게 도깨비를 퇴마사로 일하는 후배라고 소개할 참이었다.
처가까지는 차로 1시간이 넘게 걸렸다. 처가의 건물인 둥지 하우스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6시. 낮이 짧은 겨울이라서 사위는 이미 어둑했다. 나와 도깨비는 주차 뒤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낯선 외국인 한 명이 타고 있었다. 나는 그의 옆에서 한기를 느꼈지만, 찬 바람이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엘리베이터는 5층에서 멈췄다. 나와 도깨비, 그리고 함께 탔던 외국인이 함께 내렸다. 나는 그 외국인이 5층의 한 원룸에서 월세살이 하는 노동자인 줄 알았다. 이 건물에는 일용직으로 일하는 외국인들이 꽤 기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와 도깨비가 정면의 505호로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안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고, 미호가 문을 열었다. 나는 미호에게 도깨비를 소개했고, 미호는 어색한 인사를 한 뒤 “추운데, 어서 들어오세요”라고 맞았다.
현관문을 닫고 들어서려는 순간이었다. 장인어른인 구마적이 소리쳤다. “도깨비가 왔구나!”
나는 깜짝 놀랐다. 도깨비는 외계인인데, 어떻게 구마적의 눈에 보인단 말인가.
“아버님, 그걸 어떻게 아셨...”
그 순간이었다. 미호가 ‘으악’하는 단말마를 내며 나와 도깨비를 향해 외쳤다. “어서 피해요.” 등 뒤를 돌아보니 도깨비가 방망이를 휘두르며 들어섰다.
구마적이 말한 ‘도깨비’는 나와 같이 들어온 도깨비가 아니었다. 진짜 도깨비를 보고 한 소리였다. 도깨비가 든 방망이는 커다란 철퇴같이 생겼고, 스치기만 해도 뼈가 부서질 것처럼 육중했다.
나는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말로만 듣던 도깨비를 여기서 볼 줄이야. 그리고 내 친구 도깨비를 찾았다. 도깨비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휴. 걱정하지 말라더니. 무서워서 어디 들어가 숨었나 보군.’
그때였다. 도깨비 앞에 똑같이 생긴 도깨비가 나타났다. 내 친구인 도깨비가 둔갑하고 나타난 것이다. 진짜 도깨비는 당황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넌 누구냐!”
외계인 도깨비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외계인 도깨비는 둔갑해 있는 동안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 녀석, 어디서 굴러먹다 왔나 모르겠지만, 누구 앞에서 어설픈 둔갑술을 쓰는 게야?”
진짜 도깨비와 외계인 도깨비는 같은 모습을 한 채 몸싸움을 벌였다. 화가 치민 진짜 도깨비가 먼저 공격을 시작했다. 외계인 도깨비는 방망이를 살짝 피한 다음 화장실 쪽으로 도망쳤다. 진짜 도깨비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발소리에 온 집안이 흔들렸다. 지진이라도 난 듯싶을 정도로.
외계인 도깨비는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도깨비도 따라 들어갔다. 잠시 후, 화장실 안에서 도깨비가 혼자 걸어 나왔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진짜 도깨비인지, 외계인 도깨비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넌, 누구야. 진짜 도깨비냐. 아니면 내 친구냐.”
도깨비는 나를 쳐다보면서 씨익 웃었다. 그 웃음은 오두막에서 도깨비가 나한테 보였던 표정이었다.
“도깨비, 네가 이겼구나. 진짜 도깨비를 잡았어!”
도깨비는 다시 사람으로 둔갑했다. 그의 손에는 흰색 유리병이 들려 있었다. 병 안에는 노란색 액체로 된 진짜 도깨비의 양물이 들어 있었다.
마적과 마순, 미호는 모두 눈이 동그래졌다. “아니, 시방 이게 어찌 된 일이랴. 귀신이 곡할 노릇이구먼.” 마순은 통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여전히 도깨비는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식구들은 도깨비가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구마적은 도깨비가 단순한 퇴마사가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저건 필시, 사람이 아니야...’ 그러나 마적은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