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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재민 Jan 15. 2023

안녕, 도깨비(19화)

#19. 도깨비와 저녁 식사

나와 아내, 장인, 장모와 도깨비가 식탁에 마주 앉아 저녁을 먹었다. 한바탕을 난리가 지난 직후라 다들 경황이 없어 보였다. 장모인 마순이 그나마 정신을 차리고 저녁을 내왔다. 오후에 장을 봐온 재료들로 김치찌개와 두부조림, 굴비구이, 김과 김치 따위의 반찬을 차렸다. 도깨비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니, 둔갑을 한 상태에서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가장 먼저 말을 꺼낸 건 구마적이었다. “도깨비가 잡혔으니, 이제 다른 요괴들도 이 집에 쉽게 얼씬거리지 못할 거다. 어둑시니도 그렇고.”     

미호가 말을 받았다. “아버지, 그럼 도깨비가 요괴들 무리의 우두머리였나요?”

“그렇지. 도깨비를 이길 녀석들은 아무도 없었지. 두목이 봉인됐다는 소문은 벌써 퍼졌을 거야. 이미 다들 어딘가로 뿔뿔이 흩어졌을수도 있고.”     


마적과 미호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자코 밥을 먹는데 집중했다. 그때 마순이 도깨비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말이지. 우리 사우 친구 양반은 왜 아무런 말이 없는가? 그 대단한 도깨비를 잡은 이야기 좀 풀어봐 보시게.”     

도깨비는 순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마순을 향해 “장모님, 이 친구는 어려서 장애를 입어 말을 할 줄 모릅니다.”     

그러자 마순은 “오매, 그렇구만. 미안허네, 난 그런 줄도 모르고.” 도깨비는 ‘괜찮다’는 듯 손을 살짝 올렸다 내렸다.      

이번에는 구마적이 내게 물었다.      

“자네, 지금 쓰고 있는 소설을 잘 돼가는가?”

“그럭저럭요. 그동안 풀리지 않던 대목이 풀리면서 속도를 내고 있는데요. 이르면 3, 4월이면 탈고할 것 같습니다.”

“잘됐네. 기사 쓰느라 소설 쓰느라 미리 아빠가 고생이 많구나.”

“저야 밥벌이하느라 그러는 거지만, 미리 엄마가 고생이죠. 방학에 쉬지도 못하고...”     


그러자 마순이 말을 받았다. “그러게 말이시. 공연히 우리 두 노인네 때문에 쉬지도 못하고 와 있으니. 그나저나 우리 사우가 아이들 둘이나 챙기고 멕여야해서 어째쓰까. 힘들텐디.”     

“저랑 아이들 걱정은 마세요. 미리랑 바리는 이제 다 커서 제가 돌봐주지 않아도 저희끼리 잘 놀아요. 가끔 이 친구가 와서 놀아주기도 하고요.”

“이잉? 말도 못 한담서 어떻게 놀아줄꼬?”     

나는 순간 아차 싶었지만, 이내 침착하게 설명했다. “아, 말은 못 하는데요. 마술을 잘해요. 아까처럼 둔갑술도 하고요. 그래서 아이들이 이 친구만 오면 아주 재밌어해요.”


그제야 마순은 “워매, 그렇구먼”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깨비는 장모가 차려 준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그러고 보니, 지구에 불시착한 뒤 밥 다운 밥을 처음 먹어본 날이었다. 도깨비는 행복한 듯하면서도 슬픈 듯한 미묘한 표정을 짓고 앉아 있었다.      


식사를 마친 나와 도깨비는 밤늦게 오두막으로 돌아왔다. 도깨비는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 보였다. 표정은 진지했고, 가느다란 팔뚝에 가볍게 힘이 들어갔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표정이 왜 그래?”

“아? 아니야, 아무 것도.”     


도깨비는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다른 화제로 대화 주제를 바꿨다.      

“도깨비 그 녀석, 봉인까지 다 해서 집어넣었으니 안심해. 그리고 도깨비 약물이 담긴 병은 내가 조금 전에 이 근처 땅속에 깊이 묻었어. 내가 봉인을 풀지 않는 한 절대 나오지 못할 거야.”

“그래? 다행이네. 그렇지 않아도 살짝 걱정했는데. 그런데 그 녀석은 도대체 어떻게 그 작은 병에 넣을 수 있던 거야?”     


내 질문에 도깨비는 싱글벙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병으로 둔갑해 도깨비를 병 안으로 끌어들였지. 탈출하는 방법을 모르는 어리석은 도깨비가 병 속으로 들어왔다가 꼼짝없이 갇힌 거야. 난 그 틈에 얼른 병에서 나왔고, 도깨비가 빠져나오지 못하게 부적을 썼지.”

“이야, 대단하네. 외계인이 그런 것도 할 줄 알아?”

“이거 왜 이래. 이래 봬도 내가 도깨비야, 도깨비.”     

나와 도깨비는 서로를 마주 보며 크게 웃었다. 북풍이 몰아치는 소리에 오두막 출입문이 들썩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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