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무왕산에 오는 봄의 소리
휴일 점심, 나는 점심을 먹고 나서 산책하러 나갔다. 1월 말의 바람은 여전히 찼다. 장갑을 끼고, 귀마개까지 했다. 집을 나와 빈 논둑을 지났다. 눈은 며칠 동안 내리지 않았고, 오후의 들판은 황량했다. 산비둘기와 산 꿩이 한데 어울려 떨어진 낟알을 쪼아먹고 있었다.
나는 녀석들을 놀려줄 참으로 돌멩이를 집어 들어 힘껏 던졌다. 놀란 산비둘기 떼가 후드득 날았다. 다시 걸었다. 윤정이네 복숭아밭을 지날 때였다. 복숭아 가지에 꽃눈이 움트고 있었다. 다닥다닥 맺힌 꽃눈은 하루가 다르게 망울을 키워갈 참이었다.
도랑에는 얼었던 물이 졸졸 흐르기 시작했다. 산자락 울창하게 솟은 소나무 몇 그루가 푸르름을 지키고 있었고, 이름 모를 나무의 가지에 새싹이 돋아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무왕산에 봄이 오고 있었다.
나는 도깨비를 떠올렸다. 봄이 오면 무왕산 곳곳에 퍼져 있는 마를 캐다 즙을 낸 뒤 비행접시 연료로 쓸 생각이다. 두 달만 있으면 되겠지, 생각했다. 도깨비의 귀환에 골몰한 채 빈 들녘을 걷고 있는데,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쌓아놓는 볏단 뒤에서 강 포수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눈과 내 눈이 멀리서 마주쳤다.
강 포수는 나에게 조용히 하라는 표정으로 검지를 입에 갖다 댔다. 그리고는 볏단과 볏단 사이에 몸을 숨긴 채 반대쪽으로 총구를 겨눴다. 그는 산비둘기를 잡으려고 했다. 나는 제자리에서 그대로 멈춘 채 강 포수의 총구를 응시했다. 강 포수가 산 비둘기 떼를 조준했다.
방아쇠에 손가락을 넣은 그는 한동안 총구만 겨누고 있었다. 목표물을 겨누고 있는 모양인데, 움직이는 물체를 조준하는 게 쉽지 않은 듯했다. 한 방에 끝내야 했다. 대상을 맞히지 못하면 놀란 비둘기 떼가 순식간에 흩어져 한 마리도 잡지 못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강 포수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리고 방아쇠울에 건 손가락을 서서히 당겼다. 잠시 뒤 총성이 울렸다. ‘탕, 탕!’ 적막했던 들판이 크게 한번 출렁였다. 한가롭게 낟알을 고르고 있던 비둘기 떼가 혼비백산해 날았다. 짧은 날개를 죽어라 흔들고 펄럭이면서.
사격을 마친 강 포수가 천천히 비둘기들이 있던 자리로 나아갔다. 발걸음이 당당한 걸 보니, 손맛이 좋았나 보다. 나도 강 포수 쪽으로 걸어갔다. 그와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두근거렸다. 강 포수는 논둑에 떨어진 비둘기 한 마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내 가슴 쪽을 향해 보라고 들이밀었다. 총알을 맞은 비둘기는 숨이 붙어 있었다. 출혈도 크지 않았다. 총알은 아마도 날개를 스친 모양이었다. 강 포수의 손에 날갯죽지를 잡힌 녀석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눈은 반쯤 감겨있었고, 푸드덕거리지도 않았다. 마치 생을 포기한 듯.
나는 비둘기가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놓아줄 강 포수가 아니었다. 강 포수는 탄띠에 비둘기 다리를 뀄다. 기분 좋게 사냥감을 얻은 강 포수는 흡족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을 건넸다.
“이 기자, 어디 가는 길이야?”
“네, 점심 먹고 산책하는 중이었어요.”
“음, 그렇군. 춥다고 집에만 있으면 살만 쪄. 조금이라도 걸어야지. 나처럼 산과 들로 다니면 운동에도 좋고, 이렇게 먹음직한 녀석도 잡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 아닌가.”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강 포수의 탄띠에 매달린 비둘기가 가볍게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인사를 마치고 돌아서려는 내게 강 포수가 뒷전에 대고 한 마디했다.
“이 기자, 그런데 그 얘기 들었나? 무왕산에 괴물이 산다는?”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강 포수 쪽으로 돌아섰다.
“무왕산에 괴물이 산다고요?”
“그래. 나도 지난주에 무왕산 심마니한테 들었어.”
“그 심마니가 괴물을 봤대요? 어떻게 생겼대요?”
“나도 자세히는 몰라. 산 중턱을 지나다가 무슨 뚝딱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가 보니, 자네 오두막에서 나는 소리였대. 그래서 자네인가 싶어서 문을 열었더니, 아무도 없더라는 거야. 방금까지 쇳덩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는데 말이지.”
“아, 그래요? 희한한 일이네요.”
강 포수는 내게 조심하라, 는 말을 하고 자리를 떴다. “설마 괴물이 있겠어. 산짐승인 것 같은데, 맹금류일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전해 들은 말로는 옛날에는 이 산에 호랑이가 살았다는군.”
나는 ‘괴물’의 정체가 도깨비라는 걸 금방 알아차렸다. 심마니한테 들키지 않은 건 다행이지만, 초조한 마음이 더했다. ‘안 되겠어. 봄이 오기 전이라도 어서 마를 캐러 다녀야겠어.’ 혼잣말을 되뇌며 집으로 돌아왔다. 산책은 짧았고, 고민은 저녁까지 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