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버지 이야기

by 류재민

-그래도 아버지는 늘 너를 생각하셨다.

느닷없이 어머니가 건넨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처음엔 그 말이 떠오를 때마다 화가 났지만, 또 어느 흐린 날엔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


내 아버지는 늘 외로워 보였다. 그 외로움의 출발이 할머니 뱃속부터였는지, 유소년 시절부터였는지, 첫사랑에 실패한 사춘기 때였는지,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때부터였는지, 어머니와 결혼한 뒤부터였는지, 자식들이 하나둘 태어났을 때부터였는지 나는 알 길이 없다.


그저 내 기억에는 살아생전 외로움을 벗 삼아 살았다는 것만 오롯이 남아 있다. 그 외로움 가득한 아버지의 주름진 이마와 처진 눈꼬리, 좁은 두 어깨, 무좀 발을 바라보던 나도 내내 외로웠다는 것밖에. 어이없게도, 그 외로움이란 유전이 되는가 보다.


그날 내가 밟고 갔던 은행잎들은 바람을 타고 가로질러 흩날렸고, 동생들은 꾹꾹 눈물을 참으며 잎들을 밟으며 뒤따라 왔다. 그 잎들은 우리가 4차선 앞 보행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이곳저곳으로 자유낙하를 반복했다. 황금색 아름다운 잎은 회색빛 아파트 건물에 묻혀 빛이 바랬다. 생을 마친 이파리들이 바람에 이끌려 땅바닥에 내려앉을 때, 직전까지 뽐내던 고상함은 무참히 스러졌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식물이나 생의 종점은 그래서 눈물겹다.


내 아버지는 충청도의 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위로 형이 둘, 누나가 셋이었다. 아버지의 어머니이자 내 할머니 얘기가, 갓난아이가 병에 걸려도 약을 구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래서 아버지 손위 형들은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가 몇 살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어린 두 아들을 가슴에 묻는 할머니는 내리 딸만 셋을 낳았다. 그리고 나이 마흔을 넘겨 내 아버지를 얻었다. 그래, 당시 조부모는 40대였다.


할머니는 아버지를 금이야 옥이야 키웠다. 아버지는 집안의 3대 독자였다. 할머니는 아버지를 부엌에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키웠다. 밭과 들에 나가 일할 때도 내 조부모는 아버지에게 삽이나 호밋자루 한번 쥐어본 적이 없다고 자랑처럼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그렇게 ‘곱게’ 자랐다.


할아버지는 한학을 배운 식자(識者)였다. 아버지가 태어나기 전 할아버지는 훈장이었다. 까막눈인 동네 사람들에게 언문을 가르쳤다. 그러다 때때로 고속도로 개설 현장에 나갔고, 거기서 벌어온 돈으로 쌀독을 채웠다는 얘기도 할머니한테 들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네 살 때 돌아가셨다. 팔십까지 사셨으니 장수한 축이지만, 연상이던 할머니는 그보다 이십 년은 더 살았으니 장수라는 말이 적절한지는 모를 일이다.

할머니는 열여덟에 한 살 어린 할아버지에게 시집왔다. 꽃가마 타고 시집오던 길이 지금은 대학교 앞 호수로 변했다. 시에서 그 호숫가에 산책로를 조성했는데, 그 업무를 담당했던 사람이 내 아버지였다. 하도 오래전 일이라 과거 육로였다는 사실조차 아는 이가 거의 없다. 할머니는 만으로 100세까지 사셨다. 그 나이면 있을 법한 치매도 심하지 않았다.


여든 무렵부터 걱정했던 노망은 나지 않았고, 무병장수했다. 돌아가실 땐 30년 넘게 모신 며느리 무릎에서 꿈꾸는 듯 가셨다. 호상이었다. 아버지는 문상을 온 조문객들이 고인의 연세를 물어볼 때마다 이렇게 대답했다. “백한 살뿐이 안 됐슈.”


할머니를 무릎에서 보내 드린 내 어머니도 아버지보다 나이가 한 살 많다. 스물한 살에 중매로 시집와 시부모와 남편 뒷바라지에 삼 남매를 낳아 길렀다. 아버지 박봉만으로 일곱 식구 살림을 꾸려가긴 어려웠다. 그래서 어머닌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일한 유산인 땅 몇 뙈기에 포도나무를 심었다.


반대로 아버지는 종일 구들장만 베고 누워 휴일을 보냈다. 전날 과음과 숙취에 온종일 끙끙거리며 화장실만 들락거릴 뿐, 밭에는 발길 하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그나마 힘을 쓸 줄 아는 내 손을 잡고 밭으로 향하곤 했다. 덕분에 나는 일요일에 늦잠을 자거나, 아침 일찍 시작하는 만화 프로그램을 못 봤다. 대신 어머니와 포도밭 농약 주는 일을 도왔다.


커다란 고무통에 물과 농약을 비율에 맞게 붓고, 어머니가 농약을 줄 때마다 기다란 막대기로 약이 바닥에 고이지 않게 저었다. 농약 줄이 포도나무나 풀에 감기거나 꼬이지 않도록 풀었다 당겼다 하는 일도 내 몫이었다. 농약을 준 고랑을 지날 때마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약물이 땀과 뒤섞였다. 후텁지근한 여름날에는 새벽바람으로 나가 약을 줘도 숨이 막히고, 농약 냄새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내가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키가 큰 탓에 철사를 얼기설기 엮은 천장과 포도송이를 피해 허리를 잔뜩 구부리고 다녀야 했다. 장마 기간에는 고랑이 질퍽해졌다. 허리를 숙이고 외발 수레를 끌어야 했는데, 일이 끝나면 허리가 끊어지도록 아팠다. 밭일이 싫어 도망가고 싶은 날도 여러 날이었다. 그때 아버지는 옆에 없었다.

*


내가 예닐곱 살 무렵이었을 것이다. 또래 동무들과 어찌나 정신없이 놀았는지 석양으로 두 뺨이 붉게 물들었던 어느 날이었다. 우리 세상 저 건너편에 사는 낯익은 그림자가 내 쪽을 향해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때 한 녀석이 내게로 와서 밤 어스름 모양 어둡고 불안한 사람이 내 아버지라고 귀띔해 줄라치면 어린 마음은 더는 놀 기운을 상실했다. 그리고 동무들 틈에 섞여 있던 난, 그 불길한 사람이 기실 내 아버지인지 굳이 확인하고 나서, 아무 데나 보이는 골목 귀퉁이를 찾아 숨어들었다.


그때 아버지는 분명 술에 취해 있었다. 눈은 취기로 풀렸고, 입 주변은 걸쭉한 침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잔뜩 꼬부라진 혀를 굴리며 내 이름을 목놓아 불렀다. 나는 “네 아버지, 저 여기 있어요”라고 나서지 못했다. 오히려 아버지가 찾을 수 없는 곳에 꼭꼭 숨었다. 아버지를 바라볼 수 있는 곳에 기대어 서서 아버지를 향해 숨죽이며 보냈던 경멸에 찬 눈빛.


그러면 얼마 안 지나 어머니가 멀리서 짝도 안 맞는 신발을 신는 둥 마는 둥 하고서 부랴부랴 달음질쳐 왔다. 그리곤 인사불성 아버지를 겨우 부축해 집으로 데려가곤 하던 나의 유년 시절. 질질 끌려가다시피 하면서도 아버지는 연신 내 이름을 목청 높여 불렀다. 참다못한 난 두 손으로 양쪽 귀를 꽉 틀어막고 있었다. 그냥 아무 말이나 혼잣말을 지껄이기도, 이빨을 딱딱 부딪치기도 하며 아버지의 목소리를 외면하려 애썼다.


어릴 적 난 술 취한 아버지가 잠들어 있을 집으로 들어가는 게 무척이나 싫었다. 무섭고 겁났다. 신나게 뛰놀던 좀 전의 기분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악다구니에 이어지는 궁색한 어머니 팔자타령에 집안은 어수선하고 소란스러웠기 때문이다.


몸을 가누지 못해 이리저리 부대끼며 넘어지고 일어나기를 반복하는 아버지가 있을 집으로 들어서기까진 몇 번의 서성거림이 필요했다. 아버지는 술 냄새 진동하는 안방구석에 널브러져 뿌드득뿌드득 이를 갈며 주무셨다. 일요일이면 온종일 구들장만 짊어지고 낮잠만 청하던, 그러다 일어나 앉았다 싶으면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던, 내 아버지. 아버지도 그때 갱년기를 겪었던 걸까.


아버지는 여가의 대부분을 잠에 할애했다. 잠꼬대 중에 내 이름이 언뜻언뜻 불릴 때도 있었다. 평소엔 오선지 위에 표시된 ‘스타카토(staccato)’처럼 딱딱 끊어 내 이름 석 자만 되뇌었지만, 술에 흠뻑 젖었을 땐 이름 뒤에 ‘새끼’나 ‘놈’ 따위의 접미사가 자주 따라붙었다.


난 아버지가 술에 취해 내 이름을 부르는 게 무척 싫었다. 잠든 내게 다가와 충혈된 눈을 끔벅거리며 내 이름을 부를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에 휩싸이는 것도 두려웠다. 그러면 나는 이불을 쳐들어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내 방문 쪽으로 아버지의 무겁고 둔탁한 발소리가 들려오나 싶으면 두 눈을 꼭 감고 잠든 척하고 있었다. 그래도 자꾸만 아버지가 방으로 들어와 내 이름을 부르며 깨울 것만 같은 두려움은 가시질 않았다.

아니, 그랬다. 아버지는 이불까지 걷어 젖히며 날 깨운 적도 있다. 풀린 두 눈을 애써 부릅뜨며 내 눈가로 불콰한 얼굴을 들이댔다. 난 소리 높여 울먹였고, 화들짝 놀란 어머니가 아버지에게로 달려들었다. 어머닌 아버지를 ‘인간아’라고 불렀다. 그 뒤에도 아버지의 음주는 습관처럼 이어졌다. 일주일에 사흘씩은 술에 찌든 아버지 얼굴을 봐야 했다.

아버지의 키는 약 168센티미터가량이었다. 반곱슬머리에 얼굴은 거무튀튀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술 때문에 간이 나빠져 얼굴이 점점 검게 변하는 거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발은 무좀으로 지저분했고, 평발이라 어딜 가도 오래 걷지는 못했다. 그토록 아버지가 술에 매달려 당신의 건강을 해치고, 처자식에게까지 짐을 얹고 사는 이유를 알고 싶었으나, 그때 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어린이였다.


*김완 『죽은 자의 집 청소』 (김영사, 2020) 2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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