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겨우내 일 가르친 소를 몰고 밭으로 나갑니다. 소에 돌 실은 나무 썰매 대신 쟁기를 겁니다. 소가 해찰할 때마다 아버지는 어뗘뗘뗘-소리치시고 먼 산 진달래꽃 바라다보던 나도 뗘-뗘-뗘 메아리 소리에 정신 차리고 앞에서 소를 끌고 갑니다. 소는 밭 가는 일이 힘든지 침을 길게 흘립니다. (...) 술주전자를 든 어머니가 밭길을 걸어 나옵니다. *
아버지는 동네 면사무소로 출근하던 공무원이었다. 말수 적고, 내성적인 성격의 ‘면서기’였다. 면사무소는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와 길 하나를 맞대고 있었다. 점심시간이면 곧잘 아버지를 찾아가 약간의 용돈을 타내 군것질하던 것도 얼마간은 즐거웠다.
면사무소 현관문에 착 달라붙어-차마 문은 열지 못하고-있으면 아버지는 조용히 나오셨다. 그리고 날갯짓하는 학이 새겨진 오백 원짜리 동전 한 닢을, 고사리 같은 내 손바닥에 가볍게 떨어뜨렸다. 그리고 말없이 다시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셨다. 그러고 보면 자상한 면도 없지 않았나 싶다.
술을 마시지 않는 날의 아버지는 평범한, 그러나 재미없는 여가를 보냈다. 퇴근 후 집에 오면 말없이 마당을 거닐거나, 제집 속에 틀어박혀 주인도 못 알아보고 짖어대는 ‘복순이’의 목줄을 풀어놓기도 했다. 아니면 안방에 누워 다시 잠을 청하던 아버지. TV프로라고는 밤 9시 뉴스만 유일하게 보다 주무셨다. 그때 아버지는 무슨 꿈을 꾸고 계셨을까.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고 더는 아버지가 근무하는 면사무소에 찾아가 돈을 타낼 나이가 지났을 때도 난 아버지가 싫었다. 아버지가 쌈꾼도 아니고, 노름판을 기웃거리거나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닌데. 천성적인 무뚝뚝함과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모습에 진저리가 났다. 아무 곳에 오줌을 누고, 토악질하던 추한 모습들에도.
중학교 입학 후에는 아버지 얼굴을 보기가 어려워졌다. 아버지 출근 시간보다 내 등교 시간이 더 빨랐기 때문이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버스를 두 번 타야 했다. 난 늘 동네 어귀 정류장에서 첫차를 탔다. 아버지의 등을 바라보며 종종걸음을 해야 했던 등굣길 동선이 바뀐 것이다.
아버진 내가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도 별 무관심이었다. “공부하느라 수고한다”라고 격려하거나, 휴일에 가까운 저수지에 낚시도 함께 가지 않았다. 나 역시 그런 기대는 아예 하지 않았다. 그러니 TV나 거리에서 다정한 부자(父子)의 모습은 얼마나 부러웠겠나. 아버지는 때로 주말이나 휴일에 외출했고, 늦게 귀가했다. 그래서 다음 날 빈속에 찬바람 맞으며 출근하던 아버지 뒷모습은 그닥 측은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와 아버지는 그런 사이였다. 보이지 않는 담을 쌓고 살았다. 서로가 그 벽을 부수는 법을 알곤 있었지만, 벽을 허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술에 취해 와서 싸운 날이면, 어머니는 집을 홱 나갔다. 그러다 며칠 뒤 어린 자식들 걱정에 별수 없이 돌아오셨다. 그 당시 내 어머니는 비쩍 말랐었고, 피죽 한 그릇 먹지 못한 얼굴이었다.
어머니는 외가나 혼자 사는 친구 집에서 머물다 오셨던 것 같다. 집 나간 어머니가 들어올 날을 훌쩍 넘기고도 며칠 소식이 없던 날도 있었다. 애가 단 아버지는 외가를 찾아갔다. 그러고는 금주(禁酒)를 약속하고 나서 어머니를 데려왔다. 하지만 며칠 못 가 다시 술독에 빠졌던 내 아버지. 입시 스트레스를 안고 지냈던 고등학교 시절의 난 그런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그래서 여러 번 아버지에게 반항하며 달려들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그러지 말라며 뜯어말렸고, 아버지가 아닌 나에게 역정을 냈다.
아버지는 얼마 안 되는 월급봉투를, 거기다 월급날이면 술값은 당신이 몽땅 치렀는지 얇디얇은 누런 봉투만 어머니께 쑥 내밀었다. 집안 살림이며, 자식들 용돈은 손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도 그랬다. 준비물이며 차비가 필요할 양이면, 으레 어머니에게 손을 내밀었다. 물론 아버지도 수중에 그 정도의 돈은 있었으리라. 다만 그 모습이 낯설고 서먹해서 도무지 다가서기 어려웠으리라. 그러니 매일같이 돈 달라며 손 벌리는 삼 남매를 챙겨야 했던 어머니의 빈 가슴은 얼마나 황량했을까. 어느 날 어머니는 우리가 쓸 용돈을 주려고 이웃집에서 돈을 꿔오기도 했다.
아버지는 삼대독자이며 부모가 고령이란 사유로 방위로 군 복무를 했다. 방위병 시절 아버지는 어머니와 결혼했다. 스포츠형 머리를 가리려고 가발을 썼다. 그리고 당신과 비슷한 키의 아리따운 신부와 팔짱을 꼈다. 아버지 옆으로 동료들로 보이는 남자들이 군복을 입고 섰고, 어머니 옆으로는 ‘칠 공주’ 풍의 여인들이 나팔바지를 길게 빼입고. 요조숙녀 모양 다닥다닥 붙어 찍은 색 바랜 흑백의 결혼사진은 언제 봐도 촌스러웠다.
결혼 이듬해 내가 태어났다. 사대 독자 장남으로. 어머니는 아버지가 어려운 상황에 직면할 때면 누군가와-그 누군가가 직장 동료든, 오래된 벗이든, 살을 맞대고 사는 아내든 간에-상의할 생각은 없이 ‘술집’만 뱅뱅 도는 배경이 ‘할머니 식 가정교육’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나는 독자로서 누렸던 아버지와 같은 특혜를 받지 못했다. 되레 따가운 잔소리와 지청구에 시달리며 컸다. 어쩌다 동생들과 다투기라도 할라치면 빗자루나 회초리로 종아리에 피멍이 들도록 맞았다. 푸념 섞인 하소연이 끊이지 않던 ‘어머니 식 교육방식’에 철저히 지배당했다. 일일이 참견하고 잔소리해야 직성이 풀렸던 어머니였지만, 모성으로서는 보드라운 새의 깃털처럼 포근하고 따스한, 그런 존재였다.
‘넌 늬 애비처럼 살면 안 돼’ 하며 귀에 못 박히도록 나를 세뇌했던 어머니. 그럴 적마다 이마의 주름살은 더욱 깊고 선명하게 새겨졌다. 어머니 가르침대로 난 절대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퇴근하면 술집에 가는 대신, 공주 인형이나 게임기를 사 올 것이고, 머리맡에 앉아 동화책도 읽어줄 것이며, 어린이날이면 놀이동산에도 함께 가겠다고. 모든 것이 내가 어릴 적 그토록 간절히 바라고 원했던 것들이었기에.
그러나 내가 아이들을 그런 식으로 키운다면, 나 역시 그 옛날 할머니가 아버지에게 했던 것과 무엇이 다를까. 어쩌든 내 꿈은 자상한 아버지가 되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 ‘표현하는 사랑’이다. 아이가 잘못을 저지르면 회초리 대신 따끔하게 타이르고,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면 꼭 안아주며 등 두드려 주는. 그런 게 자상함이라면 누군가는 코웃음을 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시절 나에게는 그 모든 것들이 너무나도 그리웠다. 그래서 자식들에게 존경받는 아버지, 남들의 부러움을 받는 아버지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으리라.
이쯤 되면 내 아버지가 너무나 초라해지는 건 아닐까. 비록 내 눈에는 무능하고, 나약하게 비쳤을지 몰라도, 적어도 실패한 아버지는 아니었다. 그토록 아버지를 외면하던 내가 아버지를 다른 눈으로 보기 시작했던 날들이 기억 속에 오롯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