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갈림길에서

by 류재민

커서, 누나와 재식이 형과 셋이 만난 적이 있다. 누나는 출판사에 다녔고, 재식이 형은 사업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나는 그때 기자 생활을 시작한 무렵이었다. 그 자리에서 누나는 우리에게 고민을 꺼냈다. 다른 출판사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는데, 결정을 못 하겠다는 거였다. 지금보다 규모도 크고, 급여도 괜찮다고 했다.


나와 형은 주저 없이 “그럼 가야지”라고 했다. 누나의 고민은 단순히 ‘조건’과 ‘환경’이 아니었다. 글을 쓰는 걸 좋아했던 누나가 첫 직장으로 들어간 출판사였다. 회사 규모는 작았고, 직원도 얼마 안 됐다. 당연히 보수도 적었다. 하지만 누나는 그곳이 적성에 맞았다고 했다. 나름의 직업적 보람과 성취를 느꼈고, 몇 안 되는 선후배들에게 신망도 컸기 때문이다.

“그래도 누나의 미래를 생각하면 옮기는 게 나을 것 같아.”

내 말에 재식이 형도 맞장구쳤다. 누나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막막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난 솔직히, 박수는 못 받을지언정 도망가듯 떠나고 싶지 않아.”

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더 좋은 여건과 급여가 보장돼 있고, 지금보다 편한 환경에서 일할 수 있는데, 도망치는 듯 떠나다니. 누나의 말을 더 들어봤다.

“내가 가진 장애 때문에 취업이 무척 힘들었어. 그런데 지금 출판사 사장님은 그런 걸 따지지 않았어. 장애를 넘어설 만한 능력이 나한테 있다면서 오히려 손을 내밀었어. 그래서 들어간 직장이고, 밤낮없이 일했어. 아무리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고. 그렇다 보니 이 바닥에서 이름도 얻었고, 오퍼가 온 건데. 그런 것 때문에 나가면, 솔직히 내 맘이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애.”

누나의 말을 듣고 난 재식이 형이 말했다. “누나, 세상을 너무 순진하게 살지 마. 무슨 말인지 충분히 이해는 하는데, 누나가 더 잘 되는 게 어떻게 보면 누나 자신이나 출판업계 전체적으로 나을 수도 있어. 사사로운 정에 끌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 생각은 좀 달랐다. 왜냐하면, 나는 누나의 어린 시절, 그 어려운 시절을 두 눈으로 봤고, 얘기도 들었으니까.


“누나가 그랬잖아. 어머니 돌아가시고 그렇게 방황할 때, 청양댁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누나를 못 봤으면, 지금의 ‘김영지’는 없었다고 봐. 갈 길이 안 보이고 막막했을 때, 옆에서 도와주고 손잡아준 분들 덕분에 누나도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잖아. 그 기억을 잊지 않았다면, 난 누나를 지켜준 사람들과 어려워도 함께 가야 한다고 생각해.”


내 얘기를 듣던 재식이 형은 “그게 무슨 소리냐”라고 물었고, 누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나도 이제 갓 기자 생활을 시작한 사회 초년생이야. 근데, 별의별 사람들 많더라. 자식들 애써 키워서 대기업 다니고 좋은 곳에 시집 장가보내고 파지나 주우러 다니는 어르신들 많아. 반대로 재산은 수십억인데 말로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외치며 자기 잇속만 채우려는 기업인들. 난 그런 사람들이 싫어.”


누나는 맥주를 한잔 들이켜고 내 말을 받았다. “재민아, 니 말이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많이 흔들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는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해.”


재식이 형은 연신 고개를 흔들었다. 도저히 동의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정이 밥 먹여주냐. 일단 내가 잘 살아야 주변도 돌아볼 수 있는 거야. 내가 먹고살기 힘든데 누가 누굴 챙길 수 있겠냐.”

“형 말도 맞아. 하지만 내 말은, 기회는 이번이 아니라도 또 올 수 있다는 거야. 내가 존재하는 한, 숨 쉬면서 살아 있는 한.”


누나는 아버지와 화해한 이후의 삶을 회고했다. 학교에 다시 나갔을 때 쏟아졌던 무시와 따돌림. 그리고 여성으로서 감내해야 했던 세상의 장벽에 대하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들어간 회사에서 승진이든, 급여든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당해야 했던, 그 모든 차별과 모멸감, 불평등에 대하여.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절대 권력자에게 항의해서 바꾸었다. 유나에게도, 김지영씨에게도, 끝 번호 여자아이들 모두에게 소중한 경험이었다. 약간의 비판 의식과 자신감 같은 것이 생겼는데, 그런데도 그때는 몰랐다. 왜 남학생부터 번호를 매기는지, 남자가 1번이고, 남자가 시작이고, 남자가 먼저인 것이 그냥 당연하고 자연스러웠다. 남자 아이들이 먼저 줄을 서고, 먼저 이동하고, 먼저 발표하고, 먼저 숙제 검사를 받는 동안 여자아이들은 조금은 지루해하면서, 가끔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전혀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으면서 조용히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


그날, 우리는 진탕 마셨다. 새벽녘 포장마차에서 곰 장어에 소주를 몇 병 더 마시고 헤어졌다. 누나는 다니던 출판사에 남기로 했다는 소식을 다음 날 전했다. 나는 누나에게 이런 문자 메시지를 남겼다. ‘누나를 안 좋게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만큼 응원해주는 사람들도 많아. 난 누나 편이야. 힘내.’


조남주 장편소설『82년생 김지영』(민음사, 2016) 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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