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DNA였을지 모를 ‘선착순의 추억’

올해 첫 마라톤 대회 10km 완주 뒤 떠오른 '몹쓸 추억'

by 류재민

“저기, 골대까지 돌아오는데 선착순 1명!”


선생님의 호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수십 명이 우르르 축구 골대를 향해 뛰었다. 운동장에는 순식간에 흙먼지가 일었다. 선생님은 약속대로 제일 먼저 들어온 아이를 옆에서 쉬도록 했다. 그리곤 다시 “이번에는 선착순 3명!”이라고 외쳤다. 1명을 제외한 아이들은 후다닥 축구 골대를 돌았다. 언뜻 말발굽 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에 지축이 흔들리는 듯 했다.


그렇게 몇 번을 돌았을까. 나는 ‘열외’를 하지 못했다. 아니, 선착순이 끝날 때까지 나는 몇 안 되는 무리에 들어 있었다. 어릴 적, 초등학교 체육 시간에 번번이 있었던 일이다. 지금이야 추억이라고 하지만, 다시는 기억하고 싶진 않다. 나는 한 번도 ‘선착순 몇 명’에 포함된 적이 없었으니까, 늘 꼴찌였으니까.

한 번은 선착순이 하기 싫어 꼴찌를 다투던 친구와 몰래 골대를 숨기기로 했다. 둘이선 골대 한쪽 기둥을 잡고 낑낑거렸지만, 1도 소용없었다. 골대는 땅에 박혀있는 듯 꿈쩍도 하지 않았으니까. 괜한 헛심만 쓰고, 선착순에서 또 꼴찌를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선착순의 굴레에서 벗어날 줄 알았다. 웬걸, 중학교 운동장은 초등학교보다 컸고, 골대까지의 거리는 더 멀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에는 체육 시간이 아니어도, 시험 성적이 좋지 않으면 운동장에 ‘집합’을 했다. 담임 선생님은 우리를 집합시켜 ‘기합’을 줄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이번 중간고사도 우리 반이 꼴찌라구!” 왜 우리 반은 시험 때마다 꼴찌였을까, 지금 생각해도 미스터리다.


어쨌든, 나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선착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다만, 그사이 요령을 터득했다. 바로, 순위에 집착하지 말자는 거다. 난 아무리 빨리 뛰어도 ‘선착순 1명’에 들어가지 못하니까. 다음, 다다음, 다다다음 ‘선착순 몇 명’에도 못 들어가니까.


그렇다면, 굳이 힘을 뺄 이유가 없다는 거다. 그저 ‘이 시간이 지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영혼을 내려놓고 뛰는 거다. 빨리 뛰나, 천천히 뛰나, 어차피 꼴찌니까. 그렇다고 설렁설렁 뛰었다간 선생님께 ‘빠따’를 맞을 수도 있다. 그래서 겉으로는 죽어라 뛰는 척을 해야 했던, 하지만 오래 달리기가 차라리 내게 맞는다고 생각했던, 단내 나던 학창 시절이여.


'제1회 아산 이순신 백의종군길 마라톤대회' 10km 완주하고 나서.

어쩌면 그때부터 마라톤은 내 몸에 최적화됐던 건 아니었을까. 달리기라면 치를 떨던 내가 작년 가을부터 3차례 ‘대회’라는 걸 참가했다. 그것도 무려 10km. 더 대단한 건 세 번 모두 ‘완주’에 성공했다. 지난해 10월 ‘대청호 마라톤 대회’에는 1시간 29분대였지만, 한 달 뒤 열린 ‘이봉주 마라톤 대회’에는 1시간 17분대로 대폭 기록을 단축했다.


사실 대청호 대회 때는 초반 3km 지점 발가락이 찢어지는 부상에 컨디션이 최악이었다. 완주만 해도 다행이었다. 천안에서 열린 이봉주 대회에서 기록을 경신하고, 겨울 동안은 연습을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리고 오늘. 아산에서 열린 ‘이순신 마라톤 대회’에 참가했다. 달리기 딱 좋은 날씨였다. 하지만 몇 달 동안 훈련을 게을리한 ‘덕분’에 후반부에 속도를 내지 못했다. 마지막 1km를 남겨두고는 악, 소리까지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번에도 완주에 성공했다. 기록은 1시간 16분대. 종전보다 1분여를 단축했다. 완주한 것도 대견한데, 기록도 앞당겼으니 오죽 좋았을까. 완주 기념 메달을 목에 걸고, 지나가는 사람들 붙잡고 사진 좀 찍어 달라고 부탁했다. (동지애를 느낀 선수들이라 흔쾌히 잘 찍어준다.)

내 안에 마라톤 DNA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한 하루였다. 혹시, 나의 이런 ‘기질’이 그 옛날 운동장에서 만들어진 건 아닐까. 학창 시절 ‘선착순의 추억’이 살짝 떠오른 올해 첫 대회였다. 마라톤은 기록(순위)이 아니라, 나를 기록하기 위한 것이다. 내 의지의 시험이고, 확인한 것에 대한 기념이다. 무릎아, 잘 버텨줘서 고맙당 ^^. 올가을에는 하프 뛰는겨?

내 시린 무릎의 추억과 기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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