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자실에 있다가 점심시간이 되면 한 층 아래에 있는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는다. 밥을 먹고 나선 습관적으로 산책하러 간다.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으면 그만큼 산책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생긴다. 청와대를 출입하던 시절에는 삼청동 일대를 돌았고, 용산으로 대통령실이 옮겨진 이후부터는 전쟁기념관 둘레길을 걷는다. 한 바퀴를 빙 돌면 대략 30분 정도.
동선은 늘 같다. 걷다 보면 모두가 그 자리에 있어 익숙하다. 길도, 나무도, 고층 빌딩과 아파트도, 키 작은 상점도, 저 우뚝 솟은 남산타워도. 새로움도 있다. 길 위를 지나는 사람들, 차로를 지나는 자동차, 하늘을 나는 새와 구름. 어제와는 다른 사람이고, 차량이며, 하늘과 구름과 새일 것이리라. 풍경은 같아도 구성체는 다를 수 있으니 새롭게 볼 수밖에. 어쩌면 그런 ‘새로움’을 보고 느끼고 싶어 본능적으로 산책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당뇨에 허덕이는 몸속 혈당도 낮춰주는 효과도 있다.
그래서 습관이라는 게 참 무섭다. 의식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몸이 움직이니 말이다. 산책은 좋은 게 기분 전환이 된다는 데 있다. 전쟁기념관 앞에서 유유히 헤엄치는 잉어 떼를 보면, 울긋불긋 피어난 꽃나무를 보면,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면, 오전에 글을 쓰며 받은 스트레스가 풀린다. 그것들을 보면서 사색도 할 수 있다. 오후에는 어떤 기사를 어떻게 쓸 거며, 퇴근 후에는 누구와 어떻게 시간을 보낼지. 회사나 집에서 생긴 일은 어떻게 처리하는 게 현명하고 지혜로울지 등등.
산책 중간에는 커피숍에 들르는 것도 습관이 됐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시는데 ‘뜨아(뜨거운 아메리카노)’는 사절이다. ‘얼죽아(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습관에서 길들여진 모양이다.
술자리가 없는 날에는 주로 글을 쓰거나 운동을 한다. 주말이나 휴일에는 집 근처 운동장에 가서 달리기도 한다. 출퇴근 때 이용하는 KTX 열차 안에서는 책을 읽는다. 40분 걸리는 열차 안에서 많게는 서른 장, 적게는 열 장을 읽는다.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질리지 않는다. 그래서 독서가 ‘마음의 양식’이라고 했던가.
그런 습관을 들이니 기자를 하면서 작가도 하고, 마라토너가 됐다. 40대 중반, 어쩌면 당연하게 찾아왔을 우울함을 밀어내는 방법을 이런 자구책에서 찾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습관을 들이는 과정은 결단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적어도 의지박약인 나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퇴근 뒤 날마다 쓰던 글쓰기도 하루 이틀 건너뛰기 일쑤고, 휴일과 주말마다 가던 운동장도 눈과 비가 온다고, 미세먼지가 심하다고 가지 않은 날이 많았다. 새벽 명상도 며칠 못 가 그만둔 적도 있다.
글을 쓰면 ‘글 쓰는 사람’이 됩니다. 달리기를 하면 ‘달리는 사람’이 됩니다. 우울한 감정을 떨쳐내기 위한 일을 하면 ‘우울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이 됩니다. 그렇다면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중략) 당신이 우울감을 벗어나고 싶은 사람이라면, 일상을 무너뜨리는 습관이 있지 않은지 반드시 점검해야 합니다. *
어떨 때는 쓰고, 읽고, 걷고, 달리는 습관이 ‘수행’처럼 느껴진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뭐 하랴. 일상을 무너뜨리는 습관은 내 인생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사실을 알면서도, 난 오늘도 일탈을 꿈꾸고 있으니.
오후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날은 잔뜩 흐렸다.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었다. 그러고 보니 저녁부터 돌풍과 함께 천둥 번개를 동반한 시간당 30~50mm의 매우 강한 비가 내릴 거란 일기예보가 있었다. 머리 위로 후드득 빗방울이 쏟아졌다. 우산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