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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재민 Feb 04. 2024

잃어버린 꿈을 찾아주는 정다운 흥신소

삼천리 연탄구이

‘삐비빅, 삐비빅.’

상철은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으로 들어왔다. 집안은 조용했다. 신발을 벗고 조용히 방으로 들어간 상철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곤 맞은편 안방 문을 살며시 열었다. 안에서는 딸 달래가 쌔근거리며 잠들어 있었고, 그 옆에는 어머니가 모로 누워 손녀를 꼭 껴안고 주무시고 계셨다. 들어오다 상점에 들러 산 크리스마스 선물을 달래 머리 맡에 내려놓았다. 올해 크리스마스 선물은 티니핑 칭찬도장 세트였다. 어머닌 고단했는지 코를 살짝 골았다.


상철은 다시 문을 조용히 닫고 나가 욕실로 향했다. 혹여 두 사람이 잠에서 깰까 물을 약하게 틀어놓고 하루의 피곤을 씻어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상철은 다시 방으로 들어가 불을 켜고 책상 의자 앞에 앉았다. 졸음이 몰려왔지만, 잠들기 전 마지막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상철은 잠자기 전 습관적으로 글을 쓰곤 했다. 상철은 시도 쓰고, 소설도 썼다. 해마다 그렇게 쓴 글은 책으로 내고도 남을 분량이지만, 차마 책을 낼 용기는 없었다.


출판사에 투고해 볼까 했지만, 아직 실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포기했다. 그래도 언젠가 자신의 이름이 적힌 책을 내보는 게 그의 꿈이었다. 어쨌든 그는 하루를 마감하는 글쓰기 시간이 마냥 즐거웠다. 노트북을 펴고 앉은 상철은 얼마 전부터 쓰기 시작한 소설을 계속 이어가려고 했다.


사실, 요 며칠 글이 술술 써지지 않아 골치가 지끈거렸는데, 마침 괜찮은 소재가 떠올랐다. 그의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은 가수 지망생이었다. 각종 오디션에 참석했지만, 번번이 탈락하면서 의기소침했다. 그다음을 어떻게 끌어갈지 스토리라인이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대학 후배인 진달래를 만나면서 복잡한 상황의 실타래가 한 가닥 풀린 느낌이었다.


‘그래, 그렇게 한 번 해보자!’


상철은 빙그레 웃으며 한글 파일에 한 문장, 한 문장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은 아르바이트하던 식당에서 우연히 오래전 알고 지낸 여자 주인공을 만났다. 두 사람은 가볍게 만남을 이어가다 연인으로 발전했다. 여자 주인공은 실의에 빠진 남자 주인공에게 새로운 희망을 심어 주었고, 그 덕에 남자 주인공이 용기를 내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리고 연인의 응원을 받으며 TV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으로 이어갔다. 거기까지 썼을 때, 상철은 달래를 떠올렸다.


그와 달래는 같은 대학, 같은 과를 나왔다. 상철이 두 학번 위였다. 대학 시절 둘은 국문과 동아리 ‘창작 문학회’에서 처음 만났다. 당시 달래는 꿈 많은 새내기 문학도였고, 상철은 말 수 없는 선배였다. 얼굴은 여자처럼 희고 고왔고, 눈빛은 우수에 찼으며, 표정에는 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던, 그래서 누구든 다가가기 어려웠던, 서정성 짙은 시를 좋아해서 ‘릴케’라는 별명이 붙었던, 그러나 달래는 첫 만남부터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가 저도 릴케를 존경한다, 먼저 말을 걸었던. 상철은 아직도 달래가 그때 자신에게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전 릴케 시 중에 ≪나의 축제를 위하여≫를 좋아해요. 그중에 ‘인생이란 꼭 이해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 그냥 내버려 두면 축제가 될 터이니’ 이 첫 문장이 가장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상철은 달래가 무척 인상 깊었다. 릴케를 좋아한다는 것부터 관심을 끌었지만, 가장 좋아하는 시와 구절마저 자신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 이후 상철은 동아리방에서 달래와 릴케 이야기를 자주 나눴다. 시와 소설부터, 쉰 살 나이에 백혈병에 걸려 스위스의 한 요양소에서 죽기까지 생애와 인생을. 특히 두 사람은 릴케가 묻힌 공동묘지 비석에 새긴 그의 시를 자주 되뇌곤 했다.    

  

장미, 오 순수한 모순, 욕망, 이렇게도 많은 뚜껑 아래에서 아무도 잠을 자지 않는다.’     


달래와 과거 기억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겼던 상철은 크게 하품하곤 노트북을 닫았다. 그만 자야 했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 여덟 살 달래를 깨워 씻기고, 밥을 먹인 뒤 유치원에 데려다줘야 했다. 어머니는 그 전에 파출부 일을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상철은 고단한 몸을 침대에 뉘었다. 웃풍이 유독 심한 방이라 이중창을 댔어도 냉기가 스멀스멀 들어왔다. 상철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달래야, 메리크리스마스.”

‘달래’는 어린 딸이었을까, 대학 후배였을까. 그는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곯아떨어졌다. 다음 날 아침, 알람 소리에 깬 상철 앞에 달래가 다가와 살포시 안겼다.

“오구, 우리 딸 일찍 깼네?”

“당연하지! 오늘은 크리스마스니까.”

“아, 그렇구나. 정달래 메리크리스마스.”

“응. 아빠도 메리크리스마스. 그리고 티니핑 선물도 고마워.”

“어젯밤에 아빠 일 끝나고 들어오는데 산타할아버지가 막 놓고 가시더라.”

“그래? 언제 만나면 고맙다고 전해줘.”

“응? 아, 그..래. 그럴게. 선물은 맘에 드니?”

“그럼 그럼, 아주 대단히. 산타할아버지가 고생해서 번 돈으로 사 준 건데. 고맙지.”

상철은 달래의 말에 깜짝 놀랐다. 요즘 아이들은 산타의 존재를 너무나 일찍 알아버리는 사실에 살짝 서글퍼지면서도.

“조금만 더 자고 일어나. 밥 먹고 유치원 가야지.”

“아니, 많이 잘거야. 아주 대단히.”

“에이, 그러다가 어린이집 늦으면 어쩌려고.”

“아이, 참, 아빠. 자꾸 이러기야. 오늘은 크리스마스라고. 빨간 날!”

그제야 상철은 오늘이 휴일인 줄 알아차렸다. 휴일도 없이 일만 하다 보니, 날짜와 요일 감각을 잊고 산지 여러 날이었다. 그때 부엌에서 어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났으면 나와서 밥 먹을 준비하거라.”

어머니 역시 크리스마스라 파출부 일을 쉬었다. 상철은 달래를 일으켜 욕실로 데려갔다. 달래는 혼자 세수했고, 상철은 옆에서 수건을 들고 서 있었다. 마치 공주님을 모시는 시종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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