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전쟁

2

by 류재민

죽은 왕은 후사가 없었다. 그래서 차기 왕을 뽑았던 것인데, 자식은 없었지만 부인은 있었다. 중전 이 씨였는데, 열일곱이었다. 왕이 죽으면서 경희왕후 칭호를 받았다. 그녀는 새 왕이 즉위하기 전까지 중궁전에서 지냈다. 하지만 곧 그곳을 나와야 한다는 걸 직감했다. 그곳을 나온다는 건, 별도의 대전으로 옮기는 게 아니었다. 퇴궐을 의미했다. 왕자는커녕 공주도 생산하지 못했고, 왕까지 죽었으니, 그녀는 궐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쓸모가 다하면 버리는 것이다. 그게 법도다.”

민 대비는 상선에게 일러 입궐 전 살았던 사가로 왕후를 내보냈다. 왕후는 순순히 현실을 받아들였다. 궐을 나온 가마는 사대문 밖으로 향했는데, 백성들은 그게 왕후가 탄 가마인 줄 알지 못했다. 왕의 죽음을 알리던 단 한 문장의 방처럼 가마 역시 아무 표식도 없이 초라했다. 왕후는 자신을 가마 속 짐짝처럼 여기는 궐을 향한 허망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돌아온 사가는 궐의 무거운 공기와는 달리 여염의 냄새가 감돌았다. 왕후를 본 양친은 애통해하거나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오히려 살아 돌아온 것에 안도했다.

*

상선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 두 후보자의 시선이 상선의 입에 쏠렸다. 양옆에 늘어선 신하들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민 대비의 의중이 누구에게 닿았을지, 그 결과에 따라 누군가는 왕의 길을, 누군가는 죽음보다 더한 망각의 길을 걷게 될 터였다.

“남아야 할 한 분은….”

상선이 이름을 불렀다. 그 이름이 불리는 순간, 편전의 공기는 다시 한번 무참히 깨어졌다.

상선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이결이었다. 수인 쪽에선 헛기침 소리와 옷깃을 정리하는 소리가 들렸다. 수인 당수 이윤의 손등에 파란 힘줄이 솟았다.

화인은 발끝 위치가 달라졌다. 앞으로 살짝 삐져나왔고, 침 삼키는 소리가 경쾌했다.

“이름이 불린 분만 남고 이제 모두 나가십시오.”

상선이 나지막이 좌중을 물렀다. 이름이 불린 이결은 크게 기뻐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자신이 호명될 거라 직감했다. 대비가 낸 세 가지 시험에서 어린 윤사월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떨어진다는 건, 얼토당토않은 일이라고 몇 번을 속으로 되뇌었다. 맨 마지막으로 편전을 빠져나가던 이태겸은 이결 옆을 지나가며 그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흡족해했다.

“이제 됐소이다. 이 나라는 계속 이 씨의 나라입니다. 하하하.”

“대감 덕분입니다.”

이결은 이태겸을 향해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머리를 숙인 그의 입가에는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 지금은 비록 당수의 발치에 대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신세지만, 곤룡포를 걸치고 왕좌에 앉는 순간 가장 먼저 고개를 숙여야 할 자가 누구인지 이결은 알았다.

이결을 제외한 모두가 편전을 나간 것을 확인한 상선은 기다렸다는 듯이 내관복을 입은 내금위 무사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무사들은 무슨 뜻인 줄 안다는 듯 기민하게 움직였다. 한 명은 이결의 눈을 가렸고, 다른 한 명은 그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나머지 한 명은 포박해 제자리에 꿇어 앉혔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이결은 아무런 손을 쓸 수 없었다.

“읍, 으읍!”

이결은 몸을 흔들며 거세게 저항했다. 하지만 세 명의 무사가 누르는 힘은 완강했고, 제아무리 무관 출신인 이결이라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옴짝달싹 못 하게 된 이결은 격앙된 나머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한참이 지난 뒤 기운이 꺾였는지 그는 진정을 되찾았다. 그때, 둔탁한 발소리가 들렸고, 민 대비가 다시 돌아왔다. 이번에는 엄 상궁도, 최 상선도, 나인들도 대동하지 않았다. 민 대비 입에서 불호령이 떨어졌다.

“네 이놈!”

“윽, 으윽….”

이결은 입에 재갈이 물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민 대비가 갑자기 자신에게 왜 그러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다만, 지금 상황은 자신에게 매우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짐작만큼은 확실했다.

민 대비는 내금위장에게 이결의 눈과 입을 풀어주라고 지시했다. 이결은 일어나 한껏 달아오른 표정으로 민 대비를 향해 말했다.

“마마, 대체 왜 이러시는 것이옵니까. 제가 왕으로 정해진 게 아니옵니까?”

이결은 금방이라도 민 대비에게 달려들 듯 악다구니를 썼다. 내금위장이 이결의 정강이를 걷어차자 포박당한 이결은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평생 전장을 누빈 부친의 기개도, 제 허리에 찼던 무관의 자부심도, 대비의 비릿한 미소 한 줄기에 한 줌의 재로 흩어지는 기괴한 공포가 이결의 전신을 마비시켰다.

민 대비는 이결의 불같은 성질을 알고 있다는 듯 내금위장에게 그냥 두라고 명했다. 이결의 거친 숨소리가 잦아들자 민 대비는 낮고도 강한 어조로 물었다.

“네가 왕으로 정해졌다고 누가 그러더냐.”

이결은 정곡을 찔린 듯했다. 순간 숨이 멎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제가 탈락한 것이옵니까?”

이결의 반문에 민 대비는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 넌 탈락했다.”

돌아온 대답은 단호하고 명료했다.

“탈락한 자는 목숨을 내놔야 한다. 그것이 왕실의 법도이니라.”

이결은 처음 듣는 법도였다. 그건 법도가 아니었다.

“마마, 저는 왕이 되고 싶다고 한 적도 없습니다.”

이결은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그는 억울했다. 이렇게 죽고 싶진 않았다.

“왕이 되고 싶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넌 이 싸움에서 졌다는 거다. 싸움에서 진 장수는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다는 건 무관인 네가 잘 알지 않느냐.”

민 대비는 이결을 쏘아보며 말했다. 그러곤 내금위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뭣하고 서 있느냐. 저놈을 당장 처단하라.”

대비의 지시에 내금위장은 허리춤에 찬 칼을 뽑아 들었다. 칼은 살짝만 베어도 목이 떨어질 것처럼 잘 벼려져 있었다. 내금위장은 칼을 높이 치켜들었다. 시퍼런 칼날이 편전을 비추는 등촉 불빛에 비쳐 번뜩였다. 이결은 다급한 소리로 대비에게 애원했다.

“마마, 살려주십시오. 목숨만 살려주신다면 죽은 듯이 살겠습니다. 마마를 위하는 일이라면 무슨 짓이라도 하겠습니다. 제발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이결은 무릎을 꿇은 채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읍소했다. 민 대비는 목숨을 구걸하는 이결을 지그시 내려다보곤 입꼬리가 올라갔다.

“날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고? 네놈이 날 위해 뭘 할 수 있지?”

“분부만 내리십시오. 무슨 일이든 하겠사옵니다.”

민 대비는 뭔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내금위장에게 칼을 거두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이결에게 이렇게 말했다.

“넌 지금 이 자리에서 죽었다. 더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란 말이다. 알겠느냐?”

이결은 그게 무슨 말인지 해석할 순 없었다. 하지만 목숨을 살려준다는 의미인 것 같아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럼 이제부터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나이까?”

민 대비는 말없이 내금위장에게 눈짓을 보냈고, 그는 두툼한 보자기를 가져다 이결 앞에 놓았다.

“그 안에 네가 할 일이 있다.”

이결은 떨리는 손으로 금사로 짠 보자기를 풀었다. 안에서는 먹 냄새가 먼저 올라왔다. 접힌 장부 한 권과 아직 이름이 찍히지 않은 도장 하나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 아래에는 얇은 비단이 덮인 단도가 있었다.

“가거라.”

민 대비의 말이 떨어지자 내금위장이 그를 끌고 나갔다.

*

이름이 세 번 불렸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내관이 아이의 등을 가볍게 눌렀다. 그제야 고개를 숙였다. 문무백관은 그 모습을 왕에게 올리는 예로 삼았다. 종묘사직에는 음악이 없었다. 제문이 끝났을 때도 박수는 없었고, 아이가 무엇을 했는지 기억하는 신료도 없었다. 곤룡포의 소매가 손을 덮었다. 아이는 몇 번이나 손을 빼려다, 그만두었다.

“전하, 선왕 승하 이후 장계와 전국에서 올라온 상소가 잔뜩 밀렸사옵니다. 그것부터 처리하셔야 합니다.”

상선이 왕에게 고했다. 왕은 목판에 담긴 장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난, 무엇부터 어찌해야 모르겠습니다.”

불안한 왕의 표정과 달리 최 상선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전하, 심려 마옵소서. 대왕대비께서 이미 다 확인하셨습니다. 옥새로 찍기만 하면 되옵니다.”

“알겠네.”

상선은 왕이 옥새를 다 찍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목판을 들고 나갔다.

왕은 허리를 구부리고 나가는 상선의 뒷모습을 쓸쓸하게 쳐다봤다. 그러다 큰 형님 몰래 누룽지를 내주던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첫 조회가 열리는 날, 왕은 새벽부터 깨어 있었다. 낯선 침실은 어색했고, 밖에서 밤새 자신을 지키는 내관들이 신경 쓰여 잠을 설쳤다.

어제와 같은 곤룡포를 입었지만, 오늘따라 더 무겁게 느껴졌다. 옷의 무게 때문이 아니라, 그 옷을 입고 앉아야 할 자리가 어딘지 알았기 때문이다. 왕은 편전으로 가는 길도 알지 못했다. 내관 둘이 양옆에서 왕을 받쳐 들다시피 데리고 나왔다.

편전에선 화인과 수인들이 줄을 맞춰 대기하고 있었다.

“전하, 좌정하시옵소서.”

상선의 말에 왕은 왕좌를 올려다봤다. 어린 왕에게 그 자리는 높고도 컸다. 올라가도 될 자리인지 확신도 서지 않았다. 상선이 등을 가볍게 밀었다. 왕은 손으로 곤룡포 자락을 움켜쥐고 겨우 계단을 올랐다. 왕좌에 앉자 발이 바닥에 닿지 않았다. 허공에 매달린 것처럼 덜렁거렸다.

“전하 납시오.”

외침이 울렸다. 편전 안에 있는 사람들은 동시에 몸을 숙였다. 소음은 없었고, 탁한 공기가 경건한 경내를 에워쌌다.

“신들은 전하를 뵙나이다.”

왕의 귀에는 그 말이 길게 늘어진 소음처럼 들렸다. 말의 뜻은 알지 못했다. 다만,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있다는 광경만이 눈에 들어왔다. 왕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상선을 힐끔 보았다. 상선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고, 왕은 따라 했다. 그 짧은 움직임에, 다시 한번 공기가 무겁게 움직였다. 부친인 윤영식과 눈이 마주쳤다. 윤영식은 윤사월이 왕위에 오르면서 부원군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부원군 윤영식은 왕이 된 아들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깊이 숙였다.

“전하, 첫 조회이옵니다.”

최 상선이 앞으로 나섰다. 그의 목소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왕은 덜컥 겁이 났다. 심장이 쿵쾅거렸고, 입술은 바싹 말랐다.

“아뢰올 말씀이 많사오나, 우선 급한 장계부터 읽겠사옵니다.”

상선이 펼친 종이는 왕의 눈에는 글자 덩어리로만 보였다. 줄과 줄 사이가 빽빽했고, 숨 쉴 틈이 없었다.

“전하께서는 들으시기만 하면 되옵니다.”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상선이 읽는 동안, 왕의 시선은 왕좌 아래로 흘러내렸다. 줄지어 선 신하들 얼굴은 하나같았다. 누구도 자신을 똑바로 올려다보지 못했다. 그들의 시선은 아래를 보고 있었지만, 어린 왕의 뒤에 있는 무언가를 향해 있는 듯했다.

왕은 문득 생각했다. 여기에는 자신을 낮게 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윤사월’이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전하라는 말이 이름을 대신했다.

조회가 끝날 즈음, 다리가 저릿저릿했다. 발이 허공에서 계속 흔들렸기 때문이다. 제 의지와 상관없이 떨리는 다리의 마비감은 터질 듯 요동치는 심장의 공포와 하나로 엉겨 붙어, 왕좌라는 이름의 화려한 감옥에 갇힌 그의 온몸을 차갑게 굳게 만들었다.

왕은 조금만 더 있으면 다리가 저려 엉엉 울 것 같았다. 하지만 왕은 울면 안 된다는 엄 상궁의 말이 떠올라 애써 참았다. 왜 울면 안 되는지는 몰랐지만, 안 된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이것으로 조회를 마치겠사옵니다.”

신하들이 다시 한번 몸을 숙였다. 그 사이, 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왕 후보를 검증하던 날 민 대비가 한 말이 떠올랐다.

‘왕은 말을 잘해야 한다.’

하지만 왕은 말할 기회가 없었고, 무슨 말을 할지도 몰랐고, 할 말도 없었다.

상선이 다가와 왕을 부축했다. 왕좌에서 내려오는 순간, 왕은 비로소 숨을 내쉴 수 있었다.

편전을 빠져나오며, 왕은 한 번 뒤를 돌아봤다. 그 자리는 여전히 자신의 자리가 아닌 것 같았다. 자신이 앉았던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왕은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왕이 된다는 건, 자리에 앉는 일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사라지는 일이라는 것을.

첫 조회가 끝난 저녁, 이태겸의 집 사랑채에는 불이 환히 켜져 있었다. 마당에는 말발굽 자국이 엉켜 있었고, 종들이 급히 오가며 문을 여닫을 때마다 찬 공기가 들이쳤다. 사랑채 안에는 화인의 중진들이 자리를 채웠다. 평소라면 농담 섞인 인사라도 오갔을 터였으나, 그날만큼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등잔불 아래서 서로 얼굴을 피했고, 눈길은 천장이나 벽기둥에 붙어 있었다. 날씨만큼이나 냉기가 철철 흘렀다. 가장 늦게 들어온 이는 이태겸이었다.

그는 말없이 상석에 가 앉았다. 숨을 깊게 한번 깊게 고르고 중진들 표정을 훑었다. 소매를 정리하고 찻잔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그 사이에도 누구 하나 말을 꺼내지 않았다. 먼저 말하는 순간, 책임이 뒤따른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이결은 어디 있습니까?”

참다못한 누군가 입을 열었다. 젊은 축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말이 끝나자마자, 공기가 잠시 흔들렸다. 이태겸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한겨울 녹차 맛은 다른 계절에 비해 깊고 진합니다. 이유를 아십니까?”

이태겸은 이결의 행방을 물어본 이에게 되물었다.

“대감,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젊은 중진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이태겸을 바라봤다.

“사람은 추울수록, 따뜻한 것에 속기 마련이니까요.”

이태겸의 뜬금없는 얘기에 중진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만 끔벅끔벅했다.

이태겸은 찻잔을 내려놓고 좌중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요 며칠 사이, 이 자리에 보이지 않는 얼굴이 몇 있습니다.”

중진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 웅성거렸다.

“아픈지, 바쁜지, 아니면….”

이태겸은 말을 끝내지 않았다. 대신 찻잔에 남은 녹차를 한 모금 삼켰다.

“요즘은, 안부를 묻기도 전에 먼저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이 늘었지요.”

중진 하나가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이태겸과 눈이 마주치자 곧바로 숙였다. 그 짧은 순간을 이태겸은 놓치지 않았다.

“왕이 바뀌면, 자리를 바꾸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죠. 그게 잘못은 아닙니다.”

어두운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위로, 이태겸의 목소리가 다시 얹혔다.

“다만, 자리를 옮기기 전에 누가 먼저 이 문을 열었는지는, 반드시 기억해 둬야겠지요.”

그때 대사헌 이억이 참지 못하고 기침을 했다. 그 소리는 마치 회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처럼 울렸다. 이태겸은 전체를 향해 말했다.

“그의 이름을 여기서 입에 올릴 필요는 없소.”

짧은 말이었다.

“대감, 그가 편전에 남았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나오지 않았다는 것도요.”

이번엔 나이가 지긋한 중진이 말을 이었다. 목소리는 낮고 느렸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죽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지요.”

이태겸이 말을 받았다. 그는 단정하지 않는 말투를 택했다. 단정하는 순간, 그 역시 이결이 죽었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럼 어디 있다는 말씀이옵니까?”

아무도 그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이태겸 역시 침묵했다. 대신 그는 방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모인 이들 전부 화인의 핵심이었다. 이들 중 누군가가 동요한다면, 그 파장은 금세 밖으로 번질 게 분명했다.

“지금 중요한 건, 이결이 어디 있는지가 아니오.”

그가 말을 이었다.

“중요한 건,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가 하는 것이요.”

이태겸의 말에 몇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말은 없었다.

“왕이 바뀌었소.”

“…….”

“그 어린 왕은 우리가 준비한 사람이 아니오. 공들은 정녕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른단 말이오?”

이태겸의 말은 차분했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날카로웠다. 이억이 또다시 콜록거렸다. 이태겸이 이억을 보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송구합니다. 고뿔이 심하게 걸려서….”

이억은 코까지 훌쩍거리고 킁킁거리며 말했다.

“그럼 우리가 진 겁니까?”

아까 질문했던 젊은이가 다시 물었다. 이번엔 노골적인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지다니? 누가 싸움이 끝났다고 했소.”

이태겸은 잘라 말했다.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오.”

그러나 그 말은 방안을 다독이지는 못했다. 오히려 더 깊은 침묵을 불러왔다. 싸움이 시작됐다는 말은, 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뜻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당수 어른.”

“이결이 사라진 건, 우연이 아닙니다.”

이번에는 가장 말수가 적은 인물이 입을 뗐다. 그는 평소 회의에서도 맨 마지막에 한마디만 던지곤 했는데, 그 말이 늘 촌철살인이었다.

“대비의 손이 닿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몇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태겸도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하오.”

“조심만 하다간, 당장 우리부터 정리될지 모릅니다.”

‘정리’라는 말에 모두가 깜짝 놀라 눈이 커졌다.

“대체 누가 우리를 정리한단 말이오?”

“누구긴요, 대왕대비 마마지요.”

대비 이름이 나오자 방 안 공기는 이억의 기침 소리와 함께 산만해졌다. 민 대비 이름은 화인의 회의에서 직접 언급하지 않는 게 관례였다. 그러나 이미 모두의 머릿속에는 같은 이름을 떠올리고 있었다.

“대비는 윤사월을 왕으로 세웠고, 이결을 치웠습니다.”

“그러니 다음은 뻔하지 않습니까?”

누군가 말끝을 흐렸다. ‘화인’이라는 단어를 끝내 입에 올리지 못한 채.

이태겸은 눈을 지긋이 감았다 떴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대비는 사람을 한 번에 다 베지 않소.”

“쓸모가 다하면 버리지만,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남겨둡니다.”

그 말은, 화인이 아직은 ‘쓸모가 있다’라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고, 곧 다할 것이라는 예고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럼 이제 우린 뭘 해야 합니까?”

이 질문에는 조급함이 묻어 있었다.

“살아 남아야지요.”

이태겸의 답은 단순했다.

“지금은 그리할 때요.”

“어떻게 말입니까.”

“입은 닫고, 숨만 쉬어야 합니다.”

그러곤 주먹을 불끈 쥐며 의미심장한 말을 뱉었다.

“윤사월은 아직 한낱 어린애요. 그 아이에게는 결정권이 없소. 읽는 종이만 있을 뿐이지.”

몇 사람이 그 말의 뜻을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종이를 누가 쓰는지가 중요하지요.”

이태겸은 더는 설명하지 않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모든 전략을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행여, 이들 중 누가 돌아설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이결에 대한 말은 여기까지요.”

그리고 못 박듯 말했다.

“산 자도, 죽은 자도, 이 시간부터 그를 입에 올리지 마시오. 그 이름을 다시 부르는 순간, 다음 이름이 정해질 테니까.”

방안은 다시 침묵에 잠겼는데, 처음과는 다른 결이었다. 두려움은 여전했지만, 각자 계산을 시작한 눈빛이었다. 이태겸은 덤덤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일은 잊으시오. 그리고 내일도 평소처럼 입궐하시오.”

그는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왕이 바뀌었다고 해서, 세상이 하루아침에 달라지진 않소. 이 나라는 엄연히 이 씨의 나라요, 우리 화인의 혈통으로 세워졌다는 사실을 명심하시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방을 나갔다. 남은 이들은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누군가는 등잔불을 바라봤고, 누군가는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그림자를 밟았다. 그러다 모두 돌아갔다. 이억은 말에 오르다 기침을 크게 했는데, 놀란 말이 휘청거려 떨어질 뻔했다. 겨우 고삐를 죄고 대문을 빠져나갔다. 밖에서는 삭풍이 휘몰아쳐 대문이 들썩거렸다. 그새 마당에는 눈이 쌓여 말발굽 자국을 하얗게 덮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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