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
볼일을 마치고 사무실로 복귀하는 길이었다.
뜨거운 햇볕을 양산으로 1차 차단하지만, 높은 습도와 지표면에서 달아오르는 열기를 견디며 걸어야 하는 일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그늘이 없는 맨홀 주변에 파라솔이 한대 펼쳐져있고 그 아래에 헬멧을 쓴 남자 4명이 모여 앉아있었다. 통신선 같아 보이는 굵은 선 다발을 일일이 한가닥씩 찾아 연결하는 듯한 작업을 하고 있었다. 나이가 있어 보이는 남자가 주요 작업을 하고 있었고, 나머지는 보조를 맞추며 뭔가 배우고 있는 듯한 분위기였다.
보기만 해도 머리 아픈 일을 이 더위에 말이다.
물론 그분들도 생계수단으로 일을 하고 있겠지만, 이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정말 필수적이거나 위험 시설이라면 사회기능이 멈추는 일도 벌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 무심히 밟고 있는 이 보도블록 같은 모든 사소한 것들에도 많은 사람들의 역할이 담겨있다. 내가 모르는 역할들도 꽤 많을 것이다. 내가 누리는 모든 것들은 많은 사람들의 복잡한 상호작용들의 결과물이다. 아마 모든 것이 그럴 것이다.
내가 먹는 생선 한토막도 어부들, 배를 만드는 사람들, 배를 수리하는 사람들, 원유를 수입하는 사람들, 원유를 정제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교통수단을 제공하는 사람들, 이들에게 음식을 파는 사람들, 그 식자재를 배송하는 사람들, 식자재를 키우는 사람들, 이 모든 사람들이 이용하는 도로와 다리를 만드는 사람들..
연결하면 할수록 서로에게 끝없이 얽히고설켜있다. 역할들 중에 빈자리가 생기면 (물론 다른 누군가가 그 자리에 또 스며들어 오겠지만) 크고 작은 어려움과 불편함을 겪게 될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생존문제로 다가오기도 한다.)
누구나 자기의 역할을 세상에 뿌린다.
다양한 역할들이 모여 하나의 제품이나 서비스로 대표되는 것뿐이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도 사회의 시스템도 마찬가지다.
내가 혼자 성장하고 살아가는 것 같지만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뿌린 역할들을 바탕으로 살아가고 있다. 내가 잘났다거나 내가 혼자 열심히 노력해서 잘 먹고 잘 산다는 것은 아마도 대단한 착각인 듯하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 같은 살갑지 않은 경제원리는 잠시 내려놓고 생각해본다. 가까운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우린 보이지 않게 서로 돕고 기여하고 있다. 나는 분명 많은 사람들 덕분에 잘 살아가고 있다.
음, 요즘 왜 이렇게 감사한 마음이 자주 들지?
나이가 들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