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eserasera
예약한 포항행 배는 풍랑주의보로 결항되었고, 울릉도에서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 높은 파도와 강한 바람으로 도로도 통제되어 숙소 이외에는 딱히 갈 곳이 없었다.
우리는 육지로 가지 못하고 뱃길이 열리기를 기다려야 했다. 울릉도 투어를 중단하고 여행 짐만 가지고 숙소에서 온종일 단칸방 생활을 하고 있다.
여행사를 통해 들어온 사람들은 이런 사정을 듣고 이미 대부분 빠져나갔고, 우리 같은 바다 사정에 어두운 소수의 개인 여행객들만 섬에 묶여있는 것 같았다.
아침에 먹을 것을 구하러 나가는 길에 우산은 금방이라도 부러져버릴 것처럼 부풀었다 구겨졌다를 몇 차례 반복하더니 곧 뒤집어졌고 다시 구겨지고 부러졌다.
하는 수없이 우산을 접고 돌풍에 가까운 비바람을 뚫고 800여 미터를 걸어 먹을 것을 구해왔다. 이렇게 온몸으로 느끼는 자연의 힘은 정말 신기했고, 거세게 방파제를 때리는 파도에는 덜컥 겁이 났다.
사실 한국기행 같은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섬 생활의 낭만적인 모습을 동경하기도 했는데 이렇게 현지인들이 겪는 현실을 느끼며 생각이 조금은 달라졌다.
육지의 해변은 내륙 쪽으로(집으로) 도망가면 그만이겠지만 이런 섬에서는 선택권이 없다.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고 견뎌야 한다.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
그동안의 삶은 현실을 받아들이기보다 방법을 찾고 해결하고 이겨내는 것이었다. 그냥 받아들인다는 것은 실패한 것 같고 무기력하게 느껴져 방법을 찾고 뭐라도 시도하거나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도무지 방법을 찾지 못할 땐 몹시 괴로워했다.
항구에는 어선들이 피항해있고, 근처 오징어 건조공장이나 펜션 주인들과 식당 사장들로 보이는 사람들은 일을 중단하고 테이블에 둘러앉아 함께 식사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를 안내해준 관광택시 기사님도 그렇게 운행이 어려울 때는 운행을 접고 집에서 편하게 쉰다며 껄껄 웃으셨다.
받아들이고 쉬어가는 모습이었다.
내가 어려워하는.
일이 줄어 마음고생을 했던 때가 생각이 났다.
나는 그동안 쉬어가는 순간마저 전전긍긍하고, 방법을 강구하느라 나를 매섭게 몰아세운 것은 아니었나 싶다. 뒤돌아 보면 쉬어갈 땐 좀 쉬고, 일할 때는 일하라는 하늘이 정해놓은 흐름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사는 현실에서도 분명 이런 파도와 바람이 있는데,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을 뿐이다.
비는 그쳤지만 파도 때문에 배는 계속 결항되었다.
도로와 일부 관광지는 다시 열렸다. 섬 밖으로 나가는 일은 이제 우리가 정할 수 없는 일이기에 마음을 내려놓고 여행을 재개하기로 했다.
일은 돌아가면 어떻게든 보완할 수 있지만, 울릉도의 경치는 돌아가면 절대로 보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 여유 있게 구석구석 울릉도를 즐겼다.
(첫날에는 독도에도 다녀왔다.) 교과서에서 글과 사진으로만 접했던 곳들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울릉도는 꼭 한 번은 가봐야 한다고 주변에 추천할 것이다.
며칠째 이 글을 쓰고 있다.
예약한 배는 내일까지도 결항되었기에 뱃길이 열린 다른 배를 바꿔 타고 돌아가고 있다. 울릉도의 매력 때문만 아니라 이번 여행은 꽤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돌아가면 다시 주어진 일과 생활에 충실할 것이다.
이번 여행 덕분에 앞으로 받아들여야 할 일이 생긴다면 전보다 조금은 수월해질 것만 같다.
객실의 정적을 깨고 선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기상 악화로 배가 한 시간 넘게 연착된다고 한다. 착착착 맞게 타려던 KTX 베스트 탑승 시나리오도 나가리다. 평소보다 많이 늦어지는 바람에 우리는 직통으로 가지 못하고 동대구에서 한번 갈아타야 한다.
역시 현실은 기대가 아니라 대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