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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미스트 Oct 27. 2022

내가 나서지 않아도 된다.

인간 관계

   자꾸 사람들과 눈이 마주친다.

   길을 걷다가도, 식당에 앉아있다가도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면 사람들의 눈은 황급히 다른 곳을 향한다. 어제는 길에서 어떤 사람이 고개가 180도 돌아가도록 나를 쳐다보기도 했다.


   처음에는 '우연이겠지'했지만 여기저기에서 반복적으로 그런 일이 있다 보니 나를 쳐다보는 것이 맞는 것 같다.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눈을 재빨리 피하는 그들의 행동이 꽤 재미있다. (깡패들이 그래서 문신하나?)


   나라고 주변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의식한다. 그런 남들의 시선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오랜 기간 머뭇거렸고, 한방에 삭발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내 선택에 대한 '만족감'이 더 크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의식은 매우 작아졌다.


   조금 과장하면, 겁이 나서 가보지 못했던 울타리 밖에 나와있는 기분이다. 늦게나마 용기 내어 나와봤는데 별거 없었다. 결국 내 자유를 억누른 것은 타인(의 시선)이 아닌 괜스레 위축되었던 나 자신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나는 스스로 비좁게 살았던 과거를 돌아보고 있다.

 

  와이프는 아들에게 "ㅇㅇ해야 착하지"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어떤 행동을 하는 것과 착한 것은 별개이며, 그 '착하다'는 좁고 이상한 울타리에 아이를 가두고 싶지 않아서라고 한다.


   나는 저 '착하지'라는 말을 참 많이도 듣고 자랐다.

   사촌이나 조카들에게 어른들이 말하는 것도 너무나 많이 봐왔다. 예의 바르고, 남에게 양보하고 베풀고, 칭찬(인정)받는 것을 미덕처럼 여기는 그런 환경에서 나는 자랐다.


   정도껏 한다면야 얼마나 아름다울까?

   하지만 그것은 남들의 시선이 내 행동의 기준이 되는 부작용을 낳았다. 그러다 보니 남들의 칭찬이나 평판에서 인정 욕구를 채우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한발 더 나아가 내 감정이나 이익을 제쳐두는 어리석은 행동(호구 짓)도 해왔다.


   가족 내에서 그랬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그랬고, 심지어 연애를 할 때도 그랬다.


   이런 심리를 일찌감치 알아차린 주변인들은 나를 이용하기 좋았을 것이다. 상대의 무례함에도 내 목소리를 쉽게 내지 않았고, 공동체 안에서 누군가의 마이너스(이기심)를 나의 플러스(이타심)로 알아서 메워주었으니 그리고 칭찬 몇 마디 해주면 또 좋아라 했으니 꽤 쓸만했을 것이다.


   그런 인정을 받느라(구걸하느라) 내 곳간은 비고, 누군가의 곳간은 채워졌다. 이제는 거의 끊어내긴 했지만, 짜증이 나는 것은 옛날 습성이 지금도 가끔은 튀어나오려 한다는 것이다.


   라디오에서 비슷한 사연을 들은 적이 있다.

   사연자 주변에는 이상하게도 늘 나쁜 남자들만 꼬인다고 한다. 하지만 언젠가 자신(의 성향)이 남자들을 그렇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래서 환경이 바뀌고 사람이 바뀌어도 늘 그런 사람들만 만나거나 사람을 그렇게 만들 수밖에 없었단 것이다.


   이 이야기에 참 많이도 공감했다.

   나도 그랬고, 내 주변에서도 그런 비슷한 경우를 많이 봤기 때문이다.


   신하 옆에는 왕이 있고, 왕 옆에는 신하가 있다.


   나는 이것을 자력과 타력과의 관계로 이해한다.

   누군가가 자력을 멈추면, (다른 이의) 타력이 작동해 그것을 보완해준다. 어지르는 놈 따로, 치우는 놈 따로 있다는 말과 같은 맥락이다. 치워주기에(타력이 작동하기에) 어지르는 것(자력을 멈추는 것)이 반복된다.


   주지 않아도 되는데 주니까, 상대가 선을 넘어도 받아주니까, 힘든 척만 해도 알아서 도와주니까,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내가 엉망인 꼴을 못 보고 나서니까 반복되는 것이다.


   지금은 누군가의 타력이 되지 않으려 하고 있다.

   내 일이 아닌 것에는 상관하거나 간섭하지 않는다. 도움을 청하지도 않는데 '함부로' 나서서 돕지 않는다. 그리고 조언을 바라지도 않는데 '함부로' 입을 열지 않으려고 한다. 


   이제는 싫으면 싫다고 한다.

   거절하더라도 예전처럼 갖은 핑계나 때로는 거짓말까지 동원해서 장황하게 둘러대지 않고, '내가 싫기 때문에 싫다'라고 말한다. (쉽게 보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꽤 어려운 일이다.)


   타인을 내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다.

   내 태도를 바꿔야 그나마 그들이 바뀐다. 아니 바뀌는 것이 아니라 방향 전환을 한다. 그래서 나는 언제든 거절할 준비가 되어있는 (그들에게는 불편한) 존재로 인식되어야 한다. 그래야 내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 수 있다.


   내가 나서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그들은 내가 아니어도 다른 누군가의 타력을 발생시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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