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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미스트 Dec 14. 2022

나는 무엇이 두려웠을까?

0.8mm

   "아니 날도 추운데 왜 그렇게 머리를 짧게 한 거예요. 추운데. 아유~ 여름에나 그렇게 깎지 이렇게 추운 겨울에 아니 왜 머리를 그렇게 짧게 자른 거예요? 에이~ 참"


   길 건너 햄버거 가게 사장은 나를 보자마자 말을 건넨다. 카운터앞에 서있는 나에게 과한 어조의 목소리로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있는데도 말이다.


   가만, 그 사장과 나는 서로 이런 말을 주고받을 사이도 아닌 데다, 아무리 본인은 가깝다고 생각하더라도 남의 사생활에 저렇게 함부로 말하는 것은 실례인데.


   '아니 몸이 왜 그렇게 삐쩍 말랐어요. 살 좀 찌우시지. 아유~'


   나도 진작에 이렇게 걱정해줬어야 했나 싶었다.


   내가 선택하여 짧게 자른 것쯤은 분명히 알 텐데, 가깝지도 않은 사람이 생각지도 않게 선을 넘어오니 황당하기도 했다.


   그렇잖아도 비슷한 일은 종종 있어왔다.


   '왜 그렇게 머리를 깎았냐'라는 말은 늘 거슬린다.

   일일이 대꾸하기도 귀찮고, 톡 쏘아붙이기도 애매하고, 받아칠 적당한 말도 잘 모르겠고, 에너지가 바닥난 날에는 짜증이 더했다.  


   며칠전 우연히 김주환 교수의 강의를 듣게 되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말은 '모든 감정은 결국 두려움의 표출'이라는 것이다. 그 두려움이 역설적으로 분노, 짜증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작은 개가 큰 개를 보며 앙칼지게 짖는 것도 결국 두렵기 때문이며, 사람이 화를 잘 낸다는 것은 그만큼 두려움이 많은 것이라고 한다. (강의에서 뇌 안의 편도체 등의 작용과 원리를 예를 들어 자세히 설명한다.)


   감정이 생각을 지배한다는 말도 인상 깊었다.

   연결 지어 생각해보면, 결국 두려움이 내 생각을 지배하고, 나의 언행을 좌우하는 것이다. 이런 내 언행이 쌓여가며 내 삶을 그려나갈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 햄버거집 사장은 '추위'가 두려움의 대상이었을 수 있다. 마른 몸이라 본인이 추위를 유독 많이 타는 건지 아니면 다른 속사정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그에게는 추위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왜 그렇게' 머리를 잘랐냐는 말을 했던 다수의 사람들은 아마도 남들과 달리 보이는(무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은 아니었나 싶다.


   어느새 마음이 누그러졌다.

   신기하게도 꼬부라졌던 마음이 꽤 풀렸다. 그들도 두려움에 사로잡힌 그저 한낱 인간일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당연히 그렇고 말이다.


   나의 두려움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본다.

   지나온 내 언행의 밑을 들춰본다. 그리고 마주하기 싫었던 나의 두려움들을 꺼내보고 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두려움에서 출발한다는 말은 맞는 것 같다.


   생존에 대한 두려움은 기본이며, 남들의 시선과 인식에 대한 두려움이 있고, 내가 겪었던 일(사건)들에서 기인한 두려움도 있었다. 그때마다의 두려움이 나의 생각과 행동의 기준을 정하고 있었다.


   내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그 사람은 왜 나에게 그렇게 말했는지, 저 사람은 왜 저러고 사는지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나를 이해하고 그들을 이해하게 된다.  

   모두 인간일 뿐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두려움은 꽤 욕심에서도 비롯되었음을 깨닫는다. 채워지지 않는 욕심의 기저에는 늘 두려움이 있었다. 놓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더 움켜쥐려는 욕심과 맞닿아있다.


   내 머릿속에 짜여 있는 틀(나도 모르게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가치관)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 누가 정했는지도 모르는 틀 밖으로 벗어나기를 두려워하는 나와 다른 사람들이 보였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으로 유명한 말이다. 이 글을 읽으며 욕심과 두려움을 내려놓으면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찾을 수 있다고 나는 해석한다.


   '나는 파이어를 앞두고 있다'에서 썼던 글이다.

   그 옛날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이미 알았던 것이다. 욕심과 두려움에서 해방될 때만이 진짜 자유라는 것을.


   그런 욕심과 두려움에 속지 않을 때, 나도 진정한 자유를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나는 자유롭게 살지 않았다.

   욕심에 이끌리거나 두려움이 가리키는 방향을 무심코 따라온 것만 같다.


   그래서 이렇게 내가 간소하게 살고자 하는 것도, 안 하던(무섭거나 내키지 않았던) 짓을 하는 것도 이제는 더이상 욕심과 두려움에 속지 않으려는 생존 반응(?) 일지도 모르겠다.


   늦었지만 다행이다.

   남은 인생은 자유롭게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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