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속 생존기
중학교 때 장래희망을 적는 칸에 직업 아닌 것을 적었던 반 친구가 있었다.
담임선생님은 종례시간에 그 친구에게 "똑바로(직업을) 적으라."는 핀잔을 주며 다시 종이를 건넸다. 그 친구의 장래희망은 무슨 이유인지 학교라는 곳에서는 허용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나도 그동안 꿈이나 장래희망에 희망 직업을 써왔던 것 같다.
지금 나는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것을 가지고 사업을 하고 있다. 어쩌면 나는 원하는 직업을 가졌다고도 할 수 있지만 이제는 인생에서 원하는 직업을 갖는 것이 장래희망도 아니고 꿈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게다가 그 이면에는 예상에 없던 해결해야 할 수많은 문제와 갈등도 도사리고 있었다.
직업을 통해 밥벌이를 하고, 보람을 찾고, 사회에 기여하는 일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만이 인생의 전부일까?
"나는 한평생 열심히는 살았지만, 즐겁게 살지 못한 게 제일 후회된다."
20여 년 전 아흔의 연세로 돌아가신 할머니의 유언이다. 몇 년 전 사촌 형에게 이 말을 처음 전해 듣고 한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할머니의 90년 인생의 후회는 다름 아닌 '즐겁게 살지 못한 것'이었다.
'나는 즐겁게 살고 있는가?'
'나는 언제 즐거워하는가?'
나는 마흔이 넘어 이 질문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무엇이 나에게 즐거운지를 찾아보았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고작 내가 경험해봤던 좁은 울타리 안에서만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방향을 바꿔 우선 즐겁지 않은 것을 먼저 내려놓기로 했다. 그렇게 생긴 여백에 하나하나 새로운 것을 대입해보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틈이 날 때마다 브런치에 글도 쓰고 있다.
즐겁지 않다고 해서, 살면서 해야 하는 일들마저 내려놓을 수는 없기에, 생각을 조금 바꾸기로 했다. 그것은 무엇이 되었든 '애쓰지 않는 것'이다. 일이 좋다면 일을 즐겁게 하고, 취미가 재미있다면 취미를 즐기되, 절대 '애쓰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매출이 줄어도 전처럼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그만큼 내 인생에 자유시간과 휴식시간이 생김에 감사한다. 휴일에 해야 하는 일은 욕심부리지 않고 거절하고 있다. (나는 과거에 쉬는 날과 식사시간이 있다는 동종업계 지인을 혐오한 적도 있던 365일 일중독자였다.)
그리고 예전처럼 몸짱이 되겠다며 애를 써가면서까지 운동을 하지도 않는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건강한 몸이지, 조각 같은 몸은 아니기 때문이다. 건강을 유지하는 최소한의 운동을 꾸준히 하고 있다.
주어진 삶에 감사하고, 애를 써가며 인생을 낭비하지 않는 것, 새로운 것에 편견 없이 도전하고 경험하는 그것이 즐겁게 사는 게 아닐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해 본다.
아이가 크면서 와이프는 육아에 투입하는 물리적인 시간과 에너지가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그래서 그 여백을 즐거움으로 채우고 있다. 와이프는 취미 부자이다. 새롭게 관심이 생기는 것에 그대로 스며든다.
요가, 요리, 베이킹, 커피 로스팅, 맥주 제조, 민화 그리기, 웨이트 트레이닝(PT), 발레, 서체, 그리고 요즘은 뜨개질을 하고 있다. 그중 다수가 현재에도 진행 중이며, 새롭게 해 볼 것들을 미리 선별해두고 있다.
언젠가 나는 은퇴를 할 것이고, 지금 일하던 시간은 여백으로 바뀔 것이다. 나이가 들어 갑자기 생겨난 시간을 어찌할 줄 모르는 일은 발생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은퇴 선배인 와이프에게 한수 가르쳐달라고 부탁을 해봐야겠다.
지금 와이프는 새로 뜨개질한 모자와 가방을 착용하고, 어서 예쁘다 말하라고 눈짓을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