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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미스트 Mar 06. 2022

집안일을 분담하는 법

무소속 생존기

   빨래가 산더미다.

   건조기에서 말린 빨래를 개지 않고 미뤘더니 새로 건조된 옷들이 엎친데 덮쳤다. 이렇게 많을 땐 사실 엄두가 나지 않는다. 정말 하기 싫다. 그래서 개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와이프도 나만큼 하기 싫을 테니 말이다.


   집에서 나는 아침식사 준비, 설거지, 채소스프 만들기 그리고 빨래(세탁기-건조기-반듯하게 개서 정리하기)를 주로 한다. 그렇다고 꼭 누가 무엇을 하기로 정한 적은 없다. 어쩌다 보니 내가 이 일들을 주로 하고 있지만, 바쁘거나 깜빡할 땐 와이프가 한다.


   나는 주로 돈을 벌고, 와이프는 육아를 전담한다. 그 사이에 있는 살림들, 요리나 빨래 청소 등을 우리는 같이 한다. 우리는 각자 자기 역할에 집중을 하며 고생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서로를 딱하게 여기고, 고마워하고, 미안해한다.




   결혼생활 14년 차


   와이프와 처음 만난 것은 영화관이었다. 어느 휴일에 혼자 영화를 보러 갔다. 영화가 시작한 지 십여분 지나고, 캄캄한 영화관에 어떤 여자가 내 앞에 앞에 좌석으로 허리를 약간 숙인 채 옆 걸음으로 들어와 앉았다.


   "ㅎㅎ 저 여자도 멘탈 장난 아니겠구나."


   혼자 영화를 보러 온 여자의 뒷모습을 보고 나는 그 여자에게 관심이 생겼다. 혼자 영화를 보는 사람이 요즘엔 낯설지 않지만, 당시에는 혼자 영화 보러 오는 '여자'를 나는 처음 봤다. 혼자 영화 보는 것을 즐기던 나에겐 머나먼 타국에서 한국인을 만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뒷모습을 봤을 뿐이었지만, 뭔가 주체적이고, 멋있는 여자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영화가 끝나고, 그 여자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고, 나는 전화번호를 받아내었다.


   나의 당당함과 나름 준수한 외모(?)에 번호를 받았다 생각했지만, 나중에 와이프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웬 남자가 다가와서 횡설수설하는데 얼굴이 점점 빨개지길래,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아서 번호를 줬다고 한다.


   나는 만난 지 보름 만에 청혼을 했고, 1년 후 우린 결혼했다. 불과 몇 주전에 결혼을 한다던 사촌 동생을 보고 '너, 미쳤구나.'라며 나의 비혼주의를 떠들었는데, 역시 인생은 모르는 것이다.


   (청혼 소식을 들은 와이프의 친한 언니는 신중해야 한다며 말렸다던데, 모태솔로였던 그 언니는 얼마 후 소개팅에서 만난 남자와 금새 동거에 들어가더니 주변인들과 집안의 반대를 이겨내고 결혼을 했다고 한다.)

   

   와이프에게 내가 뭐가 좋았냐고 물어보면, 당시에 봤던 남자들은 하나같이 환심을 사려는 행동을 하던데, 나에게는 그런 게 없어서 좋았다고 한다. 젠틀하게 차문을 열어주는 것도 아니었고, 세심하게 의자를 빼주거나 옷을 받아주지도 않았고, 정성스레 고기를 구워주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청혼은 내가 했지만, 우리의 커플링은 와이프가 준비해서 내 손가락에 끼워줬다. 처음 본 순간 멋진 여자일 것이라는 내 생각이 맞았다. 통념에 갇혀있지 않은 와이프는 참 멋진 여자다.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지금도, 바라는 점을 마음속으로만 기대하지 않고, 나에게 구체적으로 말해준다.




   세월이 흘러 40대에 접어든 우리는 예전처럼 풋풋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연애를 하지는 않는다. 여전히 의견 충돌이 있고, 아주 가끔은 서로 치열하게 싸우기도 한다. 그래도 서로가 소중하다는 생각과 인간적인 신뢰는 바탕에 깔려 있다.

  

   아이가 크면, 엄마의 몸은 편해지지만, 머리가 그만큼 무거워진다고 한다. 와이프는 요즘 이 말을 체감한다고 한다. 내가 생각해도 내가 해본 모든 일 중에 아이 키우는 게 제일 고민스럽고 힘든 것 같다.


   각자의 삶의 무게를 견디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고, 설거지를 하는 것이 무슨 대단한 일도 아니다. 십 수년째 기계적으로 하는 행동일 뿐이다. 이제는 요령도 점점 생겨서 힘들지도 않다. 바쁜 일상 속에서 미뤄두었던 오디오북이나 유튜브 방송을 볼 수 있는 즐거운 시간이기도 하다.



   파이어를 준비하고, 우리 생활과 살림을 최대한 단순화하는 이유는 나와 와이프의 삶의 무게를 조금 덜어내고자 함이다. 서로에게 자유를 챙겨주고, 서로의 미소를 바라보며 기뻐하는 것. 가사 분담이라는 것은 그런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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