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속 생존기
어느 날 일주일간의 해외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와이프의 놀라는 소리에 주방으로 달려갔더니, 전등에서 물이 떨어지고, 싱크대 상부장에도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싱크대 위와 주방 바닥은 이미 물로 흥건했다. 어렵게 찾은 누수의 원인은 윗집의 하수관 때문이었다. 윗집의 하수는 그대로 스며들어 우리 집에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가족은 이뿐만 아니라 그동안 오랜 층간소음과 악당 수준의 이웃들을 견뎌왔다.
윗집 대학생들은 매일 새벽 2시에도 쿵쿵댔고, 그 뒤로 이사 온 가족의 꼬마는 새벽마다 발을 구르며 울어댔다. 매번 음식물쓰레기 액체를 엘리베이터에 흘려 악취를 남기는 XXXX호 여자, 아침(7시) 밤(11시)으로 성악 연습하는 OOOO호 여자, 오후 6시에 걷는 소리 시끄럽다며 수시로 찾아올라 오는 아랫집 남자.
이게 과연 내 집일까?
내 집이라면 이 공간에서는 온전한 자유가 보장이 되어야 하는데, 내 자유를 침해받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협조를 부탁하기도 했고, 다투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동안 적응(체념)하며 살고 있었던 것 같다.
얼마 후 누수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이 일을 계기로 우리는 집을 팔고 이사를 가기로 했다. 직주근접으로 내 집 마련을 이뤘고, 이 집에서 평생(?) 살아갈 줄 알았지만, 우리 가족은 이곳을 떠나기로 했다.
집을 판 이후로는 계속 월세로 살고 있다. 주변에서는 집을 사거나 차라리 전세를 살지, 왜 월세로 사냐(왜 돈을 버리느냐)고 묻는다.
우선, 우리 부부는 전세로 거주할 생각이 없다.
같은 조건의 집을 전세와 월세의 비용을 각각 따져보면, 내 경우에는 전세보증금을 주식에 투자하여 얻는 이익이 매달 월세를 내는 연평균 비용(복비와 이사비용 포함)보다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세금은 다음 세입자의 유무와 입주 타이밍, 집주인의 보증금 반환 능력과 시기, 세금 체납 여부 등의 변수에 영향을 받는다.
무엇보다 내 자산(전세금)은 내 부(富)를 위해 일을 해야지, 집주인의 부(富)를 위해 일할 필요가 있을까?
월세는 이사 가기가 좋다.
보증금이 크지 않아 이사 타이밍을 내 스케줄에 맞춰 정할 수 있는 점이 무엇보다 편리하다. 마음에 드는 집을 전세처럼 스케줄이 맞지 않아 포기할 일도 없다. 게다가 이삿날도 비용이 적게 드는 날로 정할 수도 있다. 그리고 악당 같은 이웃을 만나 살기가 힘들다면 내 자유를 위해 이사를 나와버리면 그만이다.
이사가 번거로운 것은 맞지만, 나의 가족은 짐이 별로 없기 때문에 이사에 큰 어려움은 없다. 주소지 이전이나 인터넷, 정수기 이전 등의 일도 하루 이틀이면 해결된다.
지은 지 1~2년 된 새 아파트에서만 이동하며 살고 있다. 신기하게도 새 아파트들에 살아보면서 아파트에 대한 욕망이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이런 공간 점유권에 온 자산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끌어 모아서 몰빵 하는 것은 나로선 납득하기 어렵다.)
그리고 새로운 공간은 새로운 생각을 담게 하고, 달라진 환경은 또 다른 시각을 주는 것 같다. 여러 아파트의 실거주 경험으로 아파트를 더 이해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사실 나는 부동산 투자가 어렵다.
언제 또 바뀔지 모르는 부동산 정책, 교통 요건, 도시 발전 계획, 부동산 경기, 도시마다의 흥망성쇠 등 따져야 할 요소가 너무 많다. 심지어 같은 단지 내 아파트도 팔리는 곳이 있고, 묶이는 곳이 있다. 이런 것에 내 자산에 대출까지 껴서, 미래의 현금흐름마저 사로 잡혀있다면, 결코 합리적인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부동산보다 주식이 더 좋다는 말은 아니다.
부동산 투자로 제법 돈을 번 지인들이 당연히 내 주변에도 있다. 투자는 자신이 잘 이해하는 분야에 해야 하는데, 잘 모르는 경우에는 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코인에도 투자하지 않는다. 나처럼 무소속으로 살아가는 인생들은 현금흐름(환금성)이 막히면 기댈 곳도 없다.
그나마 부동산에 관심을 두고 행동하는 것이 있다면 '아파트 청약'이다. 그런데 걱정스러운 것은 당첨이 되면 가지고 있는 주식의 일부를 팔아야 하는데 어떤 녀석을 팔아야 하는 것인지다.
사실 아직 나이가 젊고, 무주택 점수를 쌓아가며 나이가 들어 청약에 당첨돼도 상관없다. 자영업을 하고 있는 내가 은퇴를 하면 굳이 이 도시에서 살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도시 근처 저렴한 시골 땅을 구해서 들어갈 생각도 있고, 또 청약에 당첨되면 편리하게 거기서 살 생각이 있기도 하다. 또 청약이 되더라도 세를 주고 살아보고 싶은 도시에 월세 거점을 잡고 여행을 다닐 생각이다.
지난주에도 매번 떨어지는 아파트 청약을 또 하긴 했다. 그런데 벌써 아파트 당첨되면 어떡하지? 고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