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에 꽃 피운 미니멀리즘
"삼촌, 처음에 (절에서) 공부하는 사람인 줄 알았어."
콩나물밥집 사장님이 나와 대화를 트고 한 말이다.
머리를 빡빡 깎은 남자가 점심에 종종 혼자 와서 채소 반찬과 콩나물밥을 조용히 먹고 가니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수행하는 분들은 참기름도 안 먹는 사람이 있어서 이걸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도 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5일에 한 번씩 0.8mm로 머리를 깎는다.
깔끔하게 머리를 밀고 난 다음 머리를 쓰다듬으면 그 특유의 까끌거림이 참 좋다. 뿐만 아니라 머리를 깎고 나면 마음이 한결 더 가볍고 맑아진 기분이 든다. 그래서 요즘 나의 정체는 '반인반스' 정도는 되는 것 같다. 반은 보통 인간 반은 스님...ㅋㅋㅋ
그동안 삭발로 지내온 경험에 대해서 정리해 본다.
1/ 비용 절감
- 이발기 구입비용이 1회 발생하긴 하지만, 1대를 사서 머리 깎는 횟수를 계산해 보면 비용은 점점 0에 수렴해간다. 그리고 지금의 삭발 스타일을 고수할 경우 평생 미용실 갈 일도 없을 것이다.
- 게다가 샴푸와 린스 등을 사용할 필요 없으니 그에 대한 비용도 0이다. 그래서 물도 더 적게 쓴다.
2/ 시간 절감
- 미용실에 오가는 시간, 그리고 대기 시간이 들지 않는다. 다만 와이프가 5일에 한번 약 5분~10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현 이발기가 고장이 나면 혼자서도 깎을 수 있는 기기(트리머)를 살 예정이다.
- 헬스장, 목욕탕에 가면 머리를 말리거나 스타일링하느라 한참을 서있는 남자들을 보곤 하는데, 나는 드라이기조차 쓸 일이 없다.
- 세수만 하면 즉시 출근 및 외출 가능하다.
3/ 대인 관계
- 어딜 가든 나를 기억해 준다. 생각보다 이게 참 좋다. 식당이든 카페든 나를 쉽게 기억하고 내 기호에 맞춘 서비스를 미리 해주는 경향이 있다. "고객님, 따뜻한 물 한잔 같이 드리겠습니다", "따뜻한 디카페인이시죠?", "황탯국으로 바꿔드렸어요"
- 사실 쉽게 볼 수 있는 겉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길에서 우연히 부딪힐 뻔하거나 사소한 운전시비가 붙을 때도 황급히 죄송하다는 말을 먼저 듣는 경우가 자주 있다. ㅋㅋ
- 실제로 노멀에서 벗어난 겉모습이 더 높은 지위와 능력이 있다고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왜냐하면 그런 겉모습에 대한 사회적 대가를 감수할 만큼 강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란다. 하긴 머리를 깎은 뒤로 고객들이 내 말을 잘 듣는 느낌이 들긴 했다.
- 가끔 쓸데없는 간섭으로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지인들도 있긴 한데, 가까이할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바로미터가 되기도 하기에 긍정적인 효과만 받아들이기로 한다. 무례한 타인의 간섭이 한동안 귀찮긴 했다.
4/ 미니머리즘 (머리에 꽃 피운 미니멀리즘)
- 선택의 폭을 스스로 좁히는 것이 꼭 나쁘지만은 않다. 옷의 가짓수를 줄이고, 사용하는 생활 도구들을 줄여서 얻는 여유로움이 머리에도 생겼다.
- 머리를 짧게 자르며 살아보니, 스님들이 왜 머리를 깎는지 알겠다. 하지만 나는 그런 수행자 정도까지는 아니고 나에게 삭발은 미니멀 라이프의 연장선이다. 뭔가 초연해지는 기분도 든다.
5/ 자유로움
- 머리에 신경 쓸 일이 없어 간소하니 좋고, 편하다. 머리 망가질 일이 없어 모자도 맘대로 쓰고, 후드도 뒤집어써도 된다. 피곤해서 드러누워도 표시가 나지 않는다. 꽤 편하고 자유롭다.
- 나는 탈모가 조금 있지만, 앞으로 더 빠지나 마나 크게 상관없다. 탈모를 능가하는 삭발이기 때문이다. 옆머리나 뒷머리를 길게 길러서 속알머리 가리거나, 이마를 가리는 가여운 짓을 하지 않아도 된다.
- 내가 인생에서 잘했다고 생각한 것 중 하나가 이 삭발이다. 삭발은 남의 시선을 신경 써서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막상 해보니까 남들에게 잘 보이거나 멋있어 보이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서 좋다.
나는 삭발한 머리를 잘 유지하고 있다.
장점이 많기에 만족하며 앞으로도 유지할 생각이다. 그래서 누군가 나에게 삭발에 대해서 물어본다면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삭발을 한 번도 안 해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한 사람은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