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모테나시
만 8년 된 차가 고장이 났다.
세월의 흐름은 이 녀석도 못 피하는 것 같다. 차의 신경망 같은 것이 말썽인데 원인을 찾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원인에 따라 수리비 규모는 30만 원 또는 200만 원이 조금 넘는다고 한다.
정비소 3곳을 돌아다녔다.
기술자들의 그 특유의 무심한 태도를 대할 때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다른 곳을 쳐다보며 무심한 듯 말을 내뱉는다. 그나마 세 번째 정비소는 내가 알아듣기 어려운 정비 은어를 써가며 설명을 해주긴 했다.
일단 30만 원짜리 부품을 교체하고 해결이 안 되면, 그 30만 원 부품값은 일단 내가 부담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실제 나의 지출 예상은 30만 원 또는 200만 원이 아니라 230만 원 이상이 되는 것이다. 자기들의 무능을 나에게 전가하는 것이 나는 납득이 되지 않지만 정비 관례가 그렇다고 한다.
그런데 그 3번째 정비소도 일처리가 뚜렷하지 않아서 답답하다.
아직도 연락을 주지 않는다.
10월 중순에 점검했지만 "다음 주나 10월 말쯤 연락드릴게요. 11월로 넘어갈 수도 있어요."라고만 말할 뿐 지금껏 연락이 없다. 정비 소요 기간도 "살살 뜯어봐가며 원인을 찾아야 해서 얼마 걸린다고 못하겠네요. 이 차만 고치는 게 아니잖아요."라고 했다. (대기업이면 뭐 하냐.)
안전에 관련한 이슈라 어서 그리고 확실히 일처리가 되었으면 하는데 뚜렷한 원인도 못 찾고 기약도 없이 기다리기만 하니 나만 전전긍긍한다. 차를 쓰지 않을 수는 없어서 조심조심 방어운전하며 다니고 있다.
"원인으로 추정되는 게 2가지인데 첫 번째 원인이면 30만 원으로 해결되지만, 그게 원인이 아니라면 비용이 200여 만원이 아니라 230여 만원이 될 수 있다. 정비 관례가 그러니 이해해 달라. 부품 주문과 수령으로 며칠이 소요되니, 정비가능 시점은 언제 또는 언제쯤이다. 첫 번째 원인이 아니라면 정비소요기간이 더 걸리는데 그때는 연락을 다시 주겠다."
이렇게 설명을 했다면, 나는 홀라당 넘어갔을 것이다. 예상 원인이 맞지 않아 정비가 더 필요하더라도, 고객이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을 조리 있게만 말해준다면 나는 그래도 신뢰했을 것이다.
역시 남 훈수는 쉽고 간단하다.
나도 이렇게 일을 하고 있나 돌아보게 되었다. 사업이라는 게 다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돈을 버는 것인데, 나도 문제를 안고 있는 고객들의 마음을 여전히 잘 읽어주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사업 초기에 마음에 갖고 있던 마인드가 '오모테나시'였다. 최고의 환대라는 일본어인데, 손님이 요구하기 전에 미리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그때 나는 이것을 바탕으로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었다. 그래서 고객이 필요하거나 즐거워할 만한 것을 떠올려 미리 제공했다. 그때도 나름 진심이었다고 생각했으나, 지금 돌아보면 그 시작은 '전략'에 가까웠다.
솔직히 그때는 현 고객들이 이탈할 빌미를 제공하지 않고, 이탈하더라도 내가 제공하는 서비스가 우위에 있음을 느끼게 하려는(그래서 다시 돌아오게 하려는) 목적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고객이 어떤 마음을 갖고 있을지를 알고 진심으로 돕는다는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느끼고 노력하고 있다. 그게 고객에게만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나에게 득이 되는 좋은 태도라는 것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상대를 돕는다는 마음으로 일할 때,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뭔가 음덕을 쌓는 기분이 든다. 그런 음덕은 사이클이 길어서 그렇지 언젠가 예상하지 않은 시점에 툭하니 돌아온다.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일하면서 눈앞의 금전적 욕심을 덜고 조금 더 여유를 갖고 사람을 상대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오히려 아쉬울 게 없는 태도가 되어 되려 협상에서 유리하게 작용하기도 한다.
전략이 시간이 흘러 몸에 밴 건지, 마음에 철이 든 건지는 잘 모르겠으나 요즘은 그렇다. 어려움을 들고 나를 찾아온 사람들을 돕는다는 마음으로 일하고 있는 요즘이다.
17년째 사업을 하고 있는 나에게 초심이 사라진 건 아닌지, 내가 불편한 고객의 입장이 된 경험을 계기로 나의 태도를 반성하고 가다듬는다.
아, 그런데 45년 인생짬밥, 17년 사업 구력은 X구멍으로 먹은 게 아니다. 두루뭉술하고 불분명한 기사의 태도를 읽고, 그날 바로 규모가 큰 사업소에도 예약을 걸어두었는데,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이제는 연락 와도 안 간다. 메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