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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미스트 Feb 05. 2024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강직도

행복이란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행복은 강직도가 아닌가 싶다.


   가끔 '나는 무엇인가?'를 고민할 때가 있다.

   내 육체일까? 아니면 내 생각일까?


   뼈와 피부 그리고 장기 등 내 온 몸은 각자의 주기에 따라 새로운 세포로 전부 교체된다. 육신으로 따지면 몇 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기에, 지금 내 몸이 언제나 나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과학적으로 따지면 뇌 특히 좌뇌의 기능으로 내가 존재한다고 느끼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인간은 그저 감각 다발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원자의 99.999999999999%는 빈 공간이라고 한다. 이 정도로 비어있는 것을 보면 '존재하다는 것'의 실체라는 게 과연 있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과연 나는 누구이며, 또 무엇일까?

   내가 누구인지를 떠나서, 내가 실제로 존재는 하긴 하는 건지도 헷갈린다. 모든 게 허상이라는 생각을 하다 보면 세상살이에 아웅다웅하는 것도 우습기도 하고, 가끔은 허무주의에 빠지기도 한다.


   어제는 지나갔고, 어제라는 시간을 가질 수도 없다. 대부분의 과거도 기억에서 사라진다. 1초라는 앞뒤의 좁은 폭에 서서 초속 단위의 시간이 허용해 주는 만큼 찔끔찔끔 앞으로 나아가는 순간만이 인간의 수명이 아닌가 싶다.


   뜬금 없는 소리지만 “영구 없다” 라는 옛 유행어는 굉장히 철학적인 말인 것 같다.

영구 없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학원 다니며 입시공부 치열하게 하고, 입시컨설팅받아서, 취업이 잘되거나 연봉이 높은 직업을 갈 수 있는 학교/학과에 들어가서, 취업성공 하고, 이직도 계속 성공하고, 원하는 스펙의 이성 만나서 결혼도 하고, 전국민의 꿈인 내집마련도 성공하고, 자녀 입시 서포트 하고, 각고의 노력 끝에 부동산 갈아타기, 주식, 퇴직연금 등등 재테크 한 돈으로 노후준비 완료하고, 때가 되면 고급 요양원 찾아가는 게 정말 잘 사는 공식인가?


   기왕이면 남들 다 하는 바디프로필도 한 번 찍어보고, 쿨하게 사표 던지고 세계여행 떠나고, 인스타그램에 '좋은 사람'들과의 남부럽지 않은 즐거운 시간을 업로드하거나, 조용히 동남아 어딘가 해변에서 책과 칵테일 한잔 옆에 두고 수영복 입은 채  느슨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모습도 좀 남겨야 할 것 같다.


   이런 게 잘 사는 건가?

   그래 그렇다고들 하는데 그래서 그게 도대체 뭐라는 거지? 정말 저 모든 퀘스트를 다 이루면 진짜로 행복해질 수 있는 건가? 아니 인생이라는 경기에서 나는 우승을 하는건가?


   어쩌면 살아가는 방식에도 FOMO가 작동하는 건 아닌가 싶다. 다수의 한국인들이 저런 것을 지향하는 삶으로 다수가 달려들고 있기 때문에 나도 그 무리에 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 것이다.


   저런 삶을 살지 않는 사람도 천만명은 넘을 테고, 저런 한국인의 평범한(?) 삶을 지향하지 않는 사람들은 전 세계 수십억 명이 넘는다. 과연 한국인이 지향한다는 저런 삶이 인생 매뉴얼일까?


   내 그 많았던 외국인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눠봐도 단 한 명도 공감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넉넉하지 못한 월급쟁이 아버지 밑에서 자란 나도 그러고 보면 행복이라는 감각을 느낀 적이 꽤 있었다. 차가 없어 아버지만 오토바이로 저수지 낚시터까지 이동하고, 어머니와 형과 밥과 김치에 라면 싸들고 버스를 타고 한참 시골길을 달리고도 또 한참을 걸어가면서도 신나는 마음을 숨길 수 없어 실실 웃던 것도 나에겐 생생하게 남은 행복한 기억이다.


   대학입학과 동시에 부모님께 차를 선물 받아 끌고 다니던 친구 녀석의 삶에 비해 내 삶의 행복은 보잘 것 없었나? 대학생이 수 십만 원 하는 양주를 척척 사던 또 다른 금수저 녀석에 비해 내 삶은 망한 건가? 그런 행복이라는 게 쓰는 돈에 비례하는 것일까? 꼭 그렇지는 않다.


   그 녀석이 산 양주맛은 기억나지 않아도, 더운 여름 항아리에 박아 괜찮게 맛이든 장아찌를 송송 썰어 찬물에 밥 말아먹던 그 맛이 더 생생하다. 밥을 먹었던 상황마저도 선명하게 행복이라고 해시태그가 달려있다.

브런치를 먹어도 좋고
5천원, 8천원 짜리 밥을 먹어도 좋고
운전을 하나, 버스를 타나

   불교는 사법계, 이법계, 이사무애법계, 사사무애법계의 4가지 세계관이 있다고 한다.


사법계는

작은 배 타고 물에 빠지는 괴로운 삶이고,


이법계는

방파제 안에서 작은 배를 격리하는(산속에서 머리 깎고 지내는) 삶이고,


이사무애법계는

큰 배를 타고 파도의 원리를 알고 물에 빠지지 않는 삶이고,


사사무애법계는

물에 빠지나 안 빠지나를 떠나, 빠지면 그에 맞게 전복이나 주우며 사는 유연한 삶이란다.


   이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을 다루는 많은 책들은 공통적으로 '그냥 다 수용하라'는 것으로 귀결된다. 내가 원하지 않아도, 부정하고 싶어도, 나에게 주어진 게 마음에 들지 않든 간에 '그냥 다 온전히 사랑으로 수용하라'라고 말한다.


   모든 것을 사랑으로 수용하다보면, 행복은 강하게 오기를 바랄 필요도, 자주 오기를 바랄 필요도 없다. 그리고 무엇이 행복이라고 할 수 없는 이 세상에서 굳이 사는 방법을 굳이 찾는다면 미리 고행하며 깨달은 자들이 남긴 유산을 선물받는 건 어떨까 싶다.


   그래서 요즘 '사사무애'를 흉내라도 내며 살아보고자 한다. 좌뇌가 하는 말에 속지말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생각과 마음에 자유를 주는 것을 연습한다.  


   그렇다면 나에겐 모든 순간이 행복이나 다름없다.


   행복은 강도도 아니고, 빈도도 아니다. 남이 만든 허상과 다수결 같은 시류에 떠밀리지 않은 나의 강직함 그러니까 '강직도'에 달린 것은 아닐까?



   아니, 떠오르는 그 강직도 아니고, 아 그것도 좀 있나? ㅋㅋㅋ


   어쨌든 남들이 만들어 놓은 그런 허상에 발맞추려 헛수고하지 않는 것부터가 행복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굳게 믿고 실천하는 자신의 '강직도'를 높이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살아가는 방법이지 않을까 싶다.


   어제 점심 와이프와 아들과 함께 냉동 목살을 구워 상추로 쌈을 싸 먹는 순간 단돈 만원으로도 충만히 차오르는 만족과 행복감을 느꼈다.


   나이들 수록 나의 강직도가 더 좋아지길 바란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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