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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eoniya Oct 30. 2024

나는 지금 사과를 먹는다

비워내는 방법


어젯밤에 맞춰 둔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눈을 뜨자마자 습관적으로 시계를 보았다. 05:45, 어젯밤에 맞춰 둔 알람이 울리기 15분 전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시계를 보고 이른 시간이라는 안도감에 다시 눈을 감았겠지만, 다시 시작한 아침 운동을 가기 위해서 상체를 일으켰다. 아직도 잠에 취한 탓에 겨우 일으킨 상체가 뒤로 넘어갔다. 뒤로 넘어가며 벽면과 뒤통수가 부딪히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생각보다 세 개 부딪힌 탓에 머리를 힘껏 문질렀지만 한동안 얼얼한 느낌이 지속되었다. 얼얼한 느낌이 썩 좋지만은 않았지만, 덕분에 천천히 이불 밖으로 걸어 나왔다.


06:00, 알람이 울렸다. 마치 옆에서 누군가 빨리 준비해서 나가라고 재촉이라도 하는 것 마냥 들렸다. 학창 시절 아침 등굣길에 엄마가 누나한테 항상 하던 말인 것 같기도 했다. "어서 일어나! 늦겠다!" 알람의 재촉이 통했는지 운동을 가기 위해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그러다 배가 고팠는지 챙기던 짐을 내려놓고 냉장고 앞으로 걸어가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며칠 전에 장을 본 탓에 냉장고는 평소보다 풍족했다. 그중에서 유독 눈에 띄던 건 지난 추석 때 엄마가 챙겨준 빨간 사과였다. 사과를 보는 순간, 또다시 학창 시절 아침마다 엄마가 깎아 주던 사과가 생각났다. "분명 엄마가 사과를 깎아 줘도 잘 먹지 않았던 것 같았는데, 내가 사과를 좋아했던가?"라고 중얼거리며 빨간 사과 하나를 꺼내 들었다.


왼 손에는 사과를, 오른손에는 과도를 들고 사과 하나를 깎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둥글게 돌려가며 껍질을 깎았는데, 요즘에는 조각을 낸 뒤에 하나씩 깎아 낸다. 뭐 어떻게 깎으면 어떤가 어차피 사과 맛은 똑같을 텐데. 그래도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사과를 예쁘게 깎은 뒤 소파에 앉아서 먹었다.


"휘익, 휘이익", "사악, 사아악"


조용한 방 안에는 환기를 한다고 열어 둔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 소리, 사과와 치아의 표면이 서로 교차하면서 내는 묵직하면서도 가벼운 소리뿐이다.  잘게 부서진 사과의 잔해들은 식도를 통해 넘어갔다. "꿀꺽", 사과를 삼키자 방에는 다시금 침묵이 찾아왔다. 침묵과 함께 머물고 있던 감정과 사고들도 자연스레 하나둘씩 찾아왔다. 마치 사과를 다 먹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다. 나는 다시 침묵을 깨기 위해서 사과를 집어 먹었다. 이 과정은 가만히 앉아서 예쁘게 깎아 놓은 사과가 없어질 때까지 몇 번 더 반복됐다. 잠시 후 사과를 담아 온 그릇이 바닥을 드러냈다. 아, 무언가를 비워 내는 것이 이렇게 쉬었던 것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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