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차별 희생자는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있고, 내일도 있을 것이다
배짱이 꽤 있는 편이다. 어릴 때부터 반장이나 회장을 도맡아 했고, 그런 '지위'를 이용해 불의를 보면 참지 않고 덤볐다. 내가 비웃음을 당해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글짓기 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으면 평가단을 찾아가 내가 최우수상을 받지 못한 이유를 물었고(따졌고), 동방신기 싸인 받겠다고 새벽부터 나가서 몇 시간 내내 밖에서 기다렸다. 독일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이유로 멀쩡하게 잘 다니던 회사에 퇴사를 선언한 것도 그런 '직진' 성격 덕에 가능했을 거다. 홀로 독일로 떠나온 건 배짱이었고.
가장 많이 받은 걱정은 인종차별이었다. 독일이 인종차별이 그렇게 심하다더라, 하는 말을 많이 들었다. 독일어를 이제 겨우 배우기 시작했을 때 마리엔플라츠에서 "니하오"를 '당했다'. 그게 처음이었다. 한국어로 "못 배운 놈들"하며 그냥 지나갔다. 애써 그렇게 마음을 다스렸는데 그날 밤 후회가 미친 듯이 몰려왔다. 보통 동양인을 상대한 인종차별은 '쟤네 어차피 도망가. 아무것도 못해. 독일어도 못해'라는 마인드가 깔려있다고 한다. 너무 괘씸했다. 감히 나를 무시해? 감히 동양인을 무시해? 다음부턴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내가 피하고 무시하면 내 마음은 편할지 몰라도 나 때문에 동양인을 무시하는 마인드가 더 강해 질 거고, 누군가 또 당할 거로 생각하니 전투력이 상승했다. 맞서 싸워야지.
그다음 '니하오'를 당한 장소는 아우크스부르크 중앙역이었다. 구자철 선수를 취재한 후 뮌헨으로 돌아가기 위해 중앙역으로 갔는데 2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청년이 나와 눈을 마주치곤 "니하오"라며 기분 나쁘게 웃었다. 나는 그때 "봉쥬르"라고 반격했다. 낄낄대던 그 남자는 순식간에 표정이 굳은 채 사라졌다. 뭔가 통쾌했다. 참 겁도 없었다. 어두컴컴한 중앙역에서 무슨 일이 생겼으면 어쩌려고.
그렇게 반격에 성공한 후 나의 배짱력은 더 커졌다. 독일 대형 마트 에데카에서 한 물류센터 알바생이 내게 인종차별을 하고 스윽 지나갔다. 중동에서 온 사람이었다. 나는 곧장 쫓아가 "지금 나한테 뭐라고 한 거야?"라고 따졌다. 그 남자는 당황한 눈치였다. 얼굴이 붉어진 채로 도망갈 나를 상상했겠지. 그는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라며 발뺌했다. 나보다 독일어를 못했다. 자기 친구 중에 중국인이 있어서 나한테 장난친 거라고 말인 척하는 방구를 쏟아내길래 바로 에데카 본사에 메일을 보냈다. 에데카 본사는 해당 지점 전 직원 교육에 들어갈 거라며 내게 진심으로 사과했다.
친구와 맥도날드로 가고 있는데 중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 세 명이 우릴 향해 또 인종차별을 하며 비웃었다. 곧바로 혼내줬다. 아직 덜 배운 애들이니까 살살 달래며 혼냈다. 빈말이었겠지만 미안하다는 말도 받아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내가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저러는 걸까.
그런 나의 치솟는 전투력이 한순간에 뚝 떨어진 적이 있다. 이탈리아로 출장을 갔을 때다. 인테르나치오날레와 토트넘의 챔피언스리그(UCL)였다. 손흥민이 뛰기 때문에 단숨에 밀라노로 날아갔다. 여기에 당시 베로나에서 뛰던 이승우 인터뷰까지 잡혔다. 2박 3일 안에 다 해결해야 하는 일정이라 신경이 잔뜩 날카로울 때였다. 게다가 난생처음 와본 이탈리아.
새벽부터 베로나로 가서 이승우 인터뷰를 하고 다시 급히 밀라노로 돌아왔다. 하필 UCL 경기가 당일 저녁에 열렸기 때문이다. 숙소에 돌아가 짐을 놔두고 경기장으로 빠르게 가야 했다. 마음이 급해 발걸음이 빨라졌다. 중앙역에서 빠져나와 숙소로 가는 길목은 아직 환했다. 인적은 드물었지만 딱히 위험한 곳은 아니었다. 그때 맞은편에서 키가 190cm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휘적휘적 걸어왔다. 그 남자는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쟤가 나한테 뭔 짓을 하겠구나. 그 남자와 나의 사이가 좁아졌고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반대편으로 살짝 틀었다. 그 남자는 주먹으로 내 왼쪽 어깨를 내리쳤다. 통증이고 뭐고, 순간 몸이 얼어버렸다. 인종차별은 하나같이 나쁜 거라 '정도'가 있어선 안 되지만, 굳이 그 '정도'를 따지자면 이건.... 그야말로 역대급이었다. 뒤를 돌아보자 그 남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손흥민 경기에 늦으면 안 되니까. 서둘러 숙소에 가 짐을 두고 경기장을 향했다. 인테르 팬들의 함성으로 꽉 찬 경기장에서 나는, 심한 두통에 시달렸다. 경기도, 손흥민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리가 너무 아파 눈물이 뚝뚝 흘렀다. 힘든 하루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하는 걸까? 궁금해서 알아보니 아시아 여성의 가슴을 주먹으로 가격하는 인종차별이 있단다. 즉, 내가 그 자리에서 반대편으로 몸을 틀지 않았다면 내 가슴을 가격했을 거라는 뜻. 몸이 덜덜 떨렸다. 악몽을 매일 꿨다. 1초 만에 벌어진 일이 내게 트라우마처럼 자리 잡았다. 남자가 내 옆으로 지나갈 때마다 움찔댔다. 며칠 후 홀슈타인 킬과 보훔의 경기를 취재하고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는 나를 보고 "맛있겠다"라고 입맛을 다시는 독일 남자도 있었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이쪽으로 와. 너를 위한 걸 준비했어. 아주 맛있는 거야"라며 나를 흘끗거렸다. 보통 같았으면 버럭 화를 냈을 텐데 아직 내 어깨엔 멍이 시퍼렇게 들어있다.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이었다. 다행히 다른 독일 사람이 내가 두려워하는 걸 눈치채고 나를 다른 칸에 데려다줬다. 얼른 목적지에 도착하길 빌고 또 빌었다.
옥토버페스트 기간이어서 길거리엔 사람이 엄청나게 많았다. 뮌헨의 옥토버페스트에는 이탈리안 주말이 있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옥토버페스트를 너무 사랑해 뮌헨에서 공식적으로 정한 날이다. 하필 그때 나는 시내에 있었고, 오데온스플라츠에서 내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버린 이탈리아 남자 세 명과 마주쳤다. 불운하게도. 대낮부터 취한 그들은 내게 알아듣지 못하는 이태리어로 뭐라고 낄낄거리며 말한 후 노래를 부르며 사라졌다. 불과 며칠 전 어깨를 가격 당했는데. 불과 며칠 전 나를 보고 맛있겠다는 사람을 봤는데. 이미 전투력이 바닥난 내게 날아온 그들의 비웃음은 더욱 크게 나를 갉아먹었다. 이 모든 일이 열흘도 채 안 되는 시간에 벌어졌다.
그때부터 일주일 가까이 집 밖을 못 나섰던 것 같다. 하루는 남자 세 명이 우리 집 문을 쾅쾅쾅 두드리다 부수고 들어오는 악몽까지 꿨다. 개의치 않고 지내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었다. 멘털 강하다고 자부한 나조차 그렇게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부모님께서 독일에 혼자 있는 딸 걱정하실까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오롯이 나 혼자 감당하고, 이겨내야 할 문제였다. '사회적 문제'인 인종차별은 결국 그랬다. 내가 혼자 감내해야 할 문제. 도움을 요청할 곳이 없다. 나를 도울 이도 없다. 내가 혼자 맞서 싸우거나, 혹은 다치거나.
최대한 그때를 떠올리지 않으려 했다. 최근 애틀랜타 총격사건을 접하고 곱씹지 않을 수 없었다. 살인자 로버트 애런 롱은 자신이 성중독이어서 유혹을 떨쳐내기 위해 총을 쐈다고 말했다. 아주 나쁜 하루를 보낸 후였다고. 나를 보고 맛있겠다며 입맛을 다신 그 사람도 성중독이었을까? 동양인 여성이 지나가기만 해도 자신을 유혹하는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내 가슴을 주먹으로 치려했던 그 이탈리안 남성은 기분 나쁜 하루를 보내 내게 스트레스를 푼 걸까? 아시안은 그들의 욕구 배출구이자 스트레스를 푸는 대상이 되어도 괜찮다는 뜻인가? 그냥 개소리다.
그런 개소리를 두둔하는 이가 아직도 이 세상에 있기 때문에 그런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고, 인종차별이 존재한다. 특정 인종을 향한 증오는 계속된다. 말로, 비웃음으로, 주먹으로, 총으로, 각종 형태로 날아와 우리에게 꽂힌다. 우리 사회를 벗어나 지내는 나는 희생자였고, 그들은 희생됐고, 내일도, 모레도 그럴지도 모른다. 내가 혼자 맞서 싸우는 게 아니라, 내가 혼자 감내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 먼저 소수 집단을 돕는 구조가 만들어지길. 이제는,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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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정재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