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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은 Apr 29. 2021

마치 감독과 함께 더 잔인해질 황희찬을 기대해

2년 전 잘츠부르크에서 황희찬을 만났다. 그를 만나러 잘츠부르크까지 간 이유는 뻔했다. 골을 미친듯이 넣었다. 당시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 8경기에서 5골 6도움, UEFA 챔피언스리그 3경기서 2골 4도움을 기록하며 훨훨 날고 있었다. 우리가 알던 황희찬은 없었다. 그는 전방에서 움직임도 좋고, 이제는 골까지 펑펑 넣는 공격수가 됐다.


바로 직전 시즌 임대 갔던 함부르크에선 부상 등의 이유로 이렇다 할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런 황희찬이 한순간에 잘츠부르크에서 가장 위협적인 공격수로 거듭난 비결은 뭐였을까.



당시 황희찬은 자신의 플레이에는 큰 변화가 없다고 말했다. 다만 시즌을 앞둔 마음가짐이 달랐다고 했다. “이 전에는 포인트보다는 경기력에 더 집중을 많이 했다. 난 어리니까 일단 경기력에 집중해 발전하다 보면 포인트는 자연스레 따라올 거라고 생각했다. 이번 시즌(2019-20)부터는 팀을 돕기 위해선 포인트가 필요하단 생각이 들었다.”


생각의 전환. 그는 자기의 경기력보다 팀의 승리를 더 우선시하기로 했다. 그걸 스스로 깨달았다. 여기에 하나 더. 제시 마치 감독의 한 마디가 황희찬을 움직였다. “이번 시즌을 시작할 때 마치 감독님이 오셔서 한국말로 단어 하나를 가르쳐 주셨다. ‘잔인한’ 이라고 한국어로 말씀하셨다. 굉장히 놀랐다”라고 그는 말했다.


“감독님이 내게 더 잔인하게 해야 한다고 하시더라. 선수를 해치라는 게 아니라 골을 넣을 때는 2, 3골을 넣어도 상관하지 말고 더 잔인하게 4, 5골을 넣을 때까지 하라고. 잘하고 있어도 더 잘하려고 하라고. 잔인하게 뛰라고 동기부여를 주셨다.”


그의 말을 듣고 마치 감독이 굉장히 영리한 사람이란 걸 다시 느꼈다. 그는 경기장 안팎에서 노력하는 감독이다. 미국 사람인 그는 사실 독일어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는 독일어가 모국어인 오스트리아를 존중한다. 구단과 선수들을 배려해 최대한 독일어를 쓴다. 이번엔 황희찬을 위해 직접 한글 단어까지 찾았다. 황희찬은 이미 독일어를 수준급으로 구사한다. 마치 감독은 독일어가 아닌 한국어로 ‘잔인한’을 말했다. 같은 단어라도 독일어와 영어보다 모국어로 들었을 때 더 와닿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마 황희찬이 이 단어를 독일어와 영어로 들었다면 이 정도로 동기부여가 작용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는 “거기서 많이 깨우치고 터닝 포인트가 됐다. 내 안에서 무언가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경기 전에 최대한 그 단어를 생각하고 되새긴다”라고 말했다. 정말로 그는 잘츠부르크에서 가장 잔인한 선수가 됐다. 한 시즌 통틀어 리그 27경기에서 11골 12도움을 기록했고, UCL에서 6경기 3골 5도움, 컵대회 5경기 1골 5도움을 나란히 썼다. 그리고 독일 분데스리가 상위권팀 라이프치히로 이적했다.



1년이 흘렀다. 라이프치히에서 황희찬은 좀처럼 기지개를 켜지 못했다. 포지션 경쟁 상대들이 너무 쟁쟁했다. 분데스리가와 UEFA 챔피언스리그, DFB 포칼에서 성과를 내길 원했던 나겔스만 감독은 쉽사리 황희찬을 기용할 수 없었다. 코로나19와 부상을 모두 이겨낸 황희찬은 출발선에서 제대로 달려보지도 못하고 시즌을 마무리 중이다. 연료만 가득 채운 채로 말이다.


최악의 상황은 아니다. 라이프치히에서 황희찬의 계약 기간은 5년이다. 이제 겨우 1년 끝났으니 아직 보여줄 날이 많이 남았다. 또, 꾸준히 프리미어리그 클럽의 관심도 받고 있다. 황희찬의 진가는 안팎에서 계속 인정받고 있다는 뜻이다.


여기에 희소식도 생겼다. 잘츠부르크에서 황희찬을 '잔인한' 선수로 키워낸 마치 감독이 2021-22시즌부터 라이프치히를 이끈다. 율리안 나겔스만 감독이 바이에른 뮌헨으로 떠나며 지휘봉을 물려받았다. 이 소식에 황희찬은 누구보다 반가웠을 거다. 자기 사용법을 누구보다 잘 아는 감독과 다시 만난다. 다시 한 단계 높은 선수로 거듭날 기회가 찾아온 셈이다.


최근 독일 스포츠 전문 매체 <슈포르트 아인스>에선 에버턴과 웨스트햄 유나이티드가 황희찬 영입을 원한다고 전했다. 이번엔 임대가 아닌 완전 이적으로 말이다. 황희찬이 쉽게 응할 수 있을까? 아직 라이프치히에서 보여준 것도 없고, 무엇보다 곧 자신의 은사와 재회한다. 황희찬이 흔들렸더라도, 마치 감독의 등장이 그의 결정에 영향을 미칠 거로 보인다.


개인적인 바람으론 황희찬이 라이프치히에서 도전을 이어나갔으면 좋겠다. 지금 그는 25세다. 가장 찬란한 순간에 서 있다. 라이프치히에서 마치 감독과 다시 한번 족적을 남길 알맞은 시기가 찾아왔다. 다음 도전지는 라이프치히에서 날개를 달아본 후 선택해도 늦지 않을 것 같다. 앞으로 축구할 날은 많이 남았지만 은사와 재회하는 순간은 날마다 오지 않는다.


황희찬과 마치 감독이 그려나갈 2021-22시즌을 기대한다. 더 잔인해질 황희찬도.



사진=정재은, 라이프치히, 황희찬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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