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28일, 뮌헨의 위성 도시 이즈마닝으로 향했다. 전북현대 에이스 이재성이 독일에 진출한 첫 순간을 눈에 담기 위해서다.
이재성은 2018-19시즌을 앞두고 홀슈타인 킬에 입단했다. 마지막까지 밀고 당기던 타 구단들을 외면하고 선택한 2.분데스리가의 팀. 자신을 간절히 원한 팀 발터 당시 감독의 진심에 감동을 받았다. 발터 감독은 미래의 에이스가 될 이재성을 오매불망 기다렸다. 그는 이재성이 킬에 도착하기 무섭게 그를 데리고 자신의 고향 이즈마닝으로 향했다. 이곳에 스페인 에이바르와의 연습 경기가 예정되어 있다. 그렇게 이재성은 인천 공항을 떠난지 48시간 만에 그라운드 위에 서게 됐다.
취재진은 다섯 명 남짓. 네 명은 킬에서 왔고, 나머지 한 명이 바로 나였다. 킬에서 온 취재진은 내게 이재성에 대한 정보를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방금 막 러시아 월드컵에서 독일을 2-0으로 꺾은 대한민국 국가대표였기에 관심은 더 컸다. 잠깐 발터 감독과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리(Lee)는 오늘 몇 분이라도 꼭 뛰게 할 거다.”
나는 열심히 이재성이 몸을 풀고, 동료와 함께 있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았다. 그런 나를 보며 한 동료가 외쳤다. “와, 리(Lee)! 벌써 팬이 있네? 나도 아직 팬이 없는데!”
팬이 아니라 기자라고 말할까 하다 말았다. 이제 막 독일에 온 이재성의 기가 살 수 있다면 내가 팬으로 둔갑해도 괜찮겠다 싶었다. 졸지에 그의 독일 1호 팬이 된 나는 스탠드에 앉아 그의 모든 순간을 열심히 텍스트로 옮겼다. 경기가 시작됐고, 이재성은 벤치에 앉아 자신의 동료들이 뛰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봤다. 그러다 후반 33분, 발터 감독이 이재성을 불렀다. 그는 이재성의 머리를 연신 쓰다듬고, 어깨를 감싸 무어라 이야기를 하고, 엉덩이까지 툭툭 치며 응원과 애정을 아낌없이 퍼부었다. 이재성의 ‘비공식’ 데뷔전은 그렇게 시작됐다.
추가 시간 포함 13분 동안 이재성은 그라운드를 누볐다. 전북현대에서 본 이재성의 반짝이는 능력은 당연히 나오지 못했다. 지난 48시간 동안 비행기를 무려 3번이나 탔으니 컨디션이 정상일 리 없다. 하지만 발터 감독은 “이건 예고편이다”라며 이재성을 격려했다. “우리는 그에게 어떤 잠재력이 있는지 발견했다”라면서 “이재성이 관중들에게 큰 즐거움을 선사할 수 있을 거로 확신한다”라고 덧붙였다.
이재성은 이미 첫 날부터 그 즐거움을 주고 있었다. 이즈마닝으로 이재성을 보러 온 독일 팬들이 줄을 지었다. 이재성에게 유니폼을 달라는 문구를 적어온 꼬마 팬은 “월드컵에서 보고 사랑에 빠졌다”라며 환히 웃기도 했다. 이재성을 만난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아직 독일어가 서툰 자신의 스타에게 응원한다는 말을 연신 쏟아냈다. ‘셀카’도 잊지 않았다. 팬들의 응원을 받고, 독일 취재진을 만나 인터뷰까지 한 이재성은 얼떨떨한 모습이었다. 이런 환대를 마치 예상하지 못한 듯 말이다.
당일 저녁 나는 이재성을 따로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전북현대 클럽하우스에서 만났던 그를 독일에서 만나니 신기하기도 했다. 인터뷰는 생각보다 길어졌다. 그토록 원했던 유럽에 진출한 심정이 남달랐던 것 같다. 이재성은 이런저런 각오를 다짐하고, 짧게 경험한 팀 분위기를 전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내가 좀 더 나의 삶에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이 시간을 활용하면서 많이 배울 것 같다. 인간적으로도 성숙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변화된 삶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
홀슈타인에서 활약해 한 단계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게 축구선수 이재성의 목표라면, 인간 이재성은 독일에서 한층 성숙해질 자신을 기대했다. 최강희 감독 아래에서 늘 최고를 경험한 이재성은 그렇게 독일의 작은 항구도시에서 전혀 새로운 여정을 시작했다.
새 시즌 준비 과정은 적응부터 어려웠다. 봉동 클럽하우스와 비교될 수밖에 없는 열악한 라커룸 환경, 소박하고 작은 홈구장... 늘 우승을 논하던 그가 이제는 2부에서 승격을 상상하며 고군분투하게 됐다. 물러날 곳은 없다. 유럽에 진출한 이상 이런 환경 속에서도 그는 자신을 증명해내야 했다.
긴장과 기대가 섞인 데뷔전. 하필 상대는 지역 라이벌 함부르크다. 데뷔전부터 선발로 투입된 그는 팀의 두 골을 도우며 3-0 승리에 제대로 힘을 보탰다. 성공적인 첫 경기를 치른 그는 데뷔 시즌 5골 9도움을, 두 번째 시즌에는 31경기 9골 7도움을 기록했다. 특별한 이유(부상, 체력 안배) 등을 제외하곤 전부 선발로 나서서 뛰었다. 측면, 중앙, 최전방까지 오가며 부지런히 움직이는 그를 보는 팬들은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 시즌을 보낸 후 이재성은 만족도를 30%로 정의했다. 이유를 두고 “적응하느라 바빠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라고 했다. 조금은 즐길 수 있게 된 두 번째 시즌이 끝난 후, 그는 홀슈타인의 명실상부 에이스로 우뚝 섰다. 킬의 지역지 <킬러 나흐리히텐>에서 실시한 '올타임 레전드 투표'에서 이재성의 이름이 당당히 올랐다. 이제 겨우 3년 차인 선수가 레전드 칭송을 받기 시작했다.
2020-21시즌은 정점이었다. 이번엔 돈 주고도 못 살 값진 경험까지 더해졌다. DFB 포칼에서 기적을 썼다. 16강에서 바이에른 뮌헨을 승부차기 끝에 잡았다. 이재성은 마누엘 노이어를 상대로 승부차기에 성공하며 페널티킥 두려움을 씻어냈다. 다름슈타트도 잡고,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까지 좌절시켰다. 4강에서 그들이 만난 상대는 도르트문트. 비록 0-5로 크게 졌지만 이재성은 포칼을 통해 독일 최고의 팀, 선수들을 상대하며 내공을 쌓았다.
리그로 시선을 돌려도 대단한 기록이 나온다. 33경기를 소화한 그는 팀에서 세 번째로 많은 플레이 타임을 기록했다. 무려 2,797분. 한 경기 빼고 전부 뛰었다. 그보다 오래 뛴 선수들의 포지션은 수비수다. 쉽게 교체되지 않는 특수성을 가진 포지션이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이재성의 플레이 타임은 팀 최고라 해도 무방하다. 여기에 포칼 5경기 전 라운드 출전(2골)에 이틀 전 끝난 승강 플레이오프 두 경기(1골 1도움) 풀타임까지 더하면 총 3,435분이다. 그야말로 마지막까지 불태웠다. 이재성을 향해 팬과 동료들이 ‘레전드’라 부르는 이유다.
이재성은 쾰른과 승강 플레이오프 2차전이 끝난 후 개인 인스타그램을 통해 자신의 팀이 자랑스럽다는 메세지를 올렸다. 그에 동료들이 일제히 Legende(레전드의 독일어)라는 댓글을 달았다. 현지 팬들의 응원도 뜨겁다. 심지어 한국어로 번역해 댓글을 다는 팬들도 있다. 그 정도로 사랑을 받고 있다는 뜻이다. 평소 산책하다 만나는 팬들이 떠나지 말라고 붙잡을 정도라니, 말 다 했다.
킬에 도착하자마자 독일 반대편에 있는 이즈마닝으로 날아가 연습경기를 치르고, 난생처음 독일 팬과 취재진을 만나고, 데뷔전부터 지역 라이벌을 상대하고, 반복되는 감독 교체와 더불어 계속 바뀌는 포지션과 새 역할에 적응하고, 코로나19로 수없이 많은 자가격리에 돌입하고, 바이에른 뮌헨과 도르트문트를 상대하고, 마누엘 노이어의 골문을 뚫고, 승강 PO에서 좌절하고... 프로를 꿈꾸던 고려대 이재성은 자신이 20대 후반에 유럽에서 이런 경험을 쌓을 거로 상상이나 했을까?
아마 내가 이 질문을 이재성에게 던진다면 이런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더 큰 무대에 가기 위한 준비 과정이다.” 이재성과 인터뷰를 수없이 한 입장에서 보장할 수 있는 대답이다. 홀슈타인 입단 직후 유럽 진출의 꿈을 이룬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을 때 “나의 꿈은 끝나지 않았다”라고 대답한 그였으니까.
“1부 리그도 가고 싶고, 더 큰 무대에도 가보고 싶다.(중략) 유럽에서 나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펼쳐졌다.” 4년 전 이재성은 말했다. 지금 그는 홀슈타인의 에이스를 넘어 레전드 칭송을 받는다. 박수 받으며 도착한 그가 가는 길에도 박수가 쏟아지고 있다. 그 길의 끝에는 아마 자신이 원하던 '더 큰 무대'가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이즈마닝에서 다짐한 대로 성숙해진 자신을 마주했길 바라며.
킬에서 정말 행복하고 즐거웠던 순간들이 많아요
기쁜 마음으로 떠날 수 있어 좋습니다
사진=정재은, 이재성 인스타그램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