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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N Feb 11. 2018

오바마 반대 뚫고 '제재대상' 푸틴 만났던 아베 총리

서구사회 제재 넘어 푸틴 부른 아베, 그리고 평창의 한일정상회담

평창에서 벌어지는 외교 담판을 보니 정신이 어지럽다. 하루하루 제시되는 의제와 이슈를 따라가기 벅찰 정도다. 어제는 남북정상회담을 실시하자는 북한의 요청이 있었다 하니, 한 달전 김정은의 신년사 이전 상황을 생각하면 그저 아득하게 느껴진다.


온다 안 온다 말이 많던 아베 신조 일본 수상이 한국 문재인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열고, 개막식도 참석했다. 


결과적으로 봤을 때, 북한의 미소외교(ほほえみ外交)를 경계하도록 한국에 강하게 요구한다던 그의 입장이 잘 전달됐는지 의문이다. 여기에 더해 한미군사훈련 중지의 재고도 요청했다고 한다. 문 대통령이 "주권 문제"라며 반발했다는 게 오늘 전해진 보도 내용이다.



어느 정도 알려졌듯이, 한미연합군사훈련은 냉전이 무너진 이후 줄곧 남북 사이의 주요 현안이었다. 훈련 이름은 여러차례 바뀌었는데 90년대에는 팀스피리트 훈련(76년 이후 실시)이라는 이름이었다. 북한은 중지를 요구하고 한국은 응하지 않았는데, 딱 한 번 예외가 있었다. 1992년이다. 아래 신문기사를 보자. 


<동아일보> 1992년 1월 7일자. 출처: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당시 대통령은 노태우였다. 


냉전이 무너지고 북한이 위기에 몰린 상황 속에서 노태우 정권은 북방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91년 12월 13일에는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된다. '체제존중'과 '무력 불사용' 등 원칙이 담겨, 지금도 남북 모든 합의의 출발점 성격을 가진다. 그 뒤 얼마나 지켜졌는지는 강하게 의문이 들지만, 당시 한국은 미국과 협의해 이듬해인 92년 팀스피리트 훈련을 안하겠다고 전격 발표한 것이다.


신문기사 내용을 인용해보면, 발표주체는 국방부로 92년도 실시는 안하되, 93년 이후는 상황을 보고 할지 여부를 판단하겠다고 한다. 한국과 북한은 당시 비핵화 공동선언을 통해 핵 재처리, 농축시설 불보유 입장을 천명했다. 미국도 훈련 중지에 동의했다고 기사에 나와있다. 


<동아일보> 논조도 매우 긍정적이었다.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도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점이 거론돼있다는 게 신선하다. 어쩌면 냉전 붕괴 직후의 자신감이 반영된 것도 있을 듯싶다. 다만, 떠올려야 할 것은 김현희가 KAL기를 폭파시키고 붙잡힌 게 87년 11월이었다. 고작 4년여밖에 흐르지 않은 시점에서도 이같은 보도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노태우 정권에 대한 재평가 얘기를 종종 듣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을 것이다.


(2018년 기준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은 2010년이었으니 8년전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한국 사람의 뇌리에 생생하다. 필자 기준으론 포격 직후 직접 연평도에 들어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동아일보>  1992년 1월 7일자. 출처:네이버뉴스라이브러


뭐랄까, 이제 거의 30년이 다 돼가지만 대북 문제는 여전히 평행선, 아니 오히려 최악의 상황까지 악화되고 있음에 한숨이 나온다. 당시 협상에 참여하고 후에 햇볕정책의 설계자로 알려진 임동원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북한은 미국과 적대관계를 해소하여 안전을 보장받고 정치, 경제적 관계를 개선하는 데 핵문제를 지렛대로 사용하고자 한 것이다. 핵 카드를 외교협상용으로 사용하려는 북한의 입장은 확고했으며, 그후에도 이러한 입장을 일관되게 유지한다(<피스메이커>, 184쪽)


실로 '한반도 핵문제의 기원'이랄 수 있는 구조가 생겨난 것이다. 북한의 잘못된 체제 탓이 가장 크겠지만, 어느 쪽에 책임이 있는지 문제는 점점 더 꼬여가고 있다. 당시는 그나마 한미북 3자 문제였던 것이, 이제는 참여자가 많아져서 더 골치아파졌다. 아베의 '내정간섭' 수준 발언은 그런 가운데 나왔다.




필자는 아베의 끊임없는 남북문제의 우려 표명을 보며, 오히려 아베가 미국의 '간섭'을 거부하며 단호한 모습을 보인 일을 하나 떠올렸다. 2016년 12월에 있은 러일정상회담이다. 


외교 전문가들은 일본 전후 외교 현안 가운데, 주요한 게 2개 남았다고들 한다. 


하나는 북한과의 관계정상화 문제고, 다른 하나는 러시아와 북방 영토 반환 문제다. 일본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郎)수상은 1956년 소련 흐루시초프와 공동선언을 하면서 '우선 국교 수립을 하고, 그 뒤 평화교섭, 북방 영토(하보마이, 시코탄)를 반환한다'는 원칙에 동의한다.


일본은 패전 당시 소련이 밀고 내려오면서 자신들의 영토였던 사할린 남쪽과 인근 섬 4곳(앞서 언급한 곳+에토로후, 쿠나시리)을 잃는다.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51년)으로 미군정을 끝낸 뒤, 영토 반환을 요구하나 소련은 쉽게 응하지 않았다. 특히 에토로후, 쿠나시리는 협상 대상으로도 올리지 않았다.


아래가 일본 외무성에 실린 북방영토 지도다. 


중간 붉은색으로 国後(쿠나시리)・択捉(에토로후)・色丹(시코탄)・歯舞(하보마이)라고 쓰인 곳이 해당 분쟁 섬이다. 현재는 모두 러시아인이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인이 맘대로 들어갈 수 없다. 왼쪽 윗섬은 사할린이고, 그 아래는 북해도다. 이 때문에 북해도청사에 가면 아직도 '4도 반환해야 한다'는 문구가 청사에 걸려있다. 


북방영토 개략 지도. 출처: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


아베가 당초부터 슬로건으로 내건 것 중에 하나도 이 문제의 해결이었다. 북한 납치문제와 더불어, 본인의 최대 과제로 내걸었다. 북한 문제와는 달리, 한국과 직접적 연관이 없기에 잘 안 알려진 이슈이기도 하다. 


아베는 푸틴과 수차례 만난 개인적 인연을 강조하면서 2016년 즈음 슬슬 분위기를 띄운다. 언론에 '러시아와 정상회담'을 할 것이라는 말을 흘리고, 거기서 영토문제와 관련해 큰 진전이 있을 것이란 뉘앙스를 풍기기 시작한 것이다. 진전이란 당연히 영토 반환 가능성으로 여겨졌다. 


다만, 일본 국내 여론은 '모두 반환해야 한다'는 의견과 '원래 합의대로 '2곳만이라도 먼저 받자'는 의견이 엇갈려 있었다. 일본 정부로서도 딱히 답을 못 내리던 마당에 이와 관련 협의가 있을 것이란 분위기가 커져갔다. 


문제는 일본이 들떠있는 것과 달리 러시아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는 점이다(이런 분위기는 대체로 일본 언론을 통해 전해졌으나 기대감에 묻혔다). 이는 결론적으로 회담 결과의 복선이기도 했다.


일본인들의 기대를 한껏 높인 건 푸틴 대통령이 아베의 지역 기반인 야마구치현(山口県)에 직접 전용기를 타고 오기로 했다는 데 있었다. 날짜는 2016년 12월 15, 16일 양일로 정해졌다. 15일에 푸틴과 아베가 야마구치현 내 온천에서 식사를 하며 허심탄회하게 얘기하기로 정해졌다. 


일본 언론은 진작부터 달아오른 현지 분위기를 연일 전하며 흥분해있었다. 필자도 일본 언론에 휘둘려 정말 영토가 일부라도 반환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됐다. 당시의 들뜬 분위기는 아래 수상관저가 직접 올린 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두 정상간이 만나는 데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러시아가 2014년 2월 크림반도를 침공하면서 서구사회에서 대대적으로 비난을 받은 뒤 경제제재 대상이 돼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직접적 위협을 느낀 EU는 적극적으로 제재에 나섰다. 미국에서는 오바마 대통령이 러시아 비판의 선봉이 돼서 전쟁 실시를 비난했다. 아래는 제재가 '냉전이후 최대'였음을 보여주는 기사다. 심지어 러시아는 선진국간 정상회담인 G8에서도 사실상 퇴출된다.


이 제재는 최근까지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당시 대선개입 문제까지 안고 있어 제재를 추가하는 상황이었다. 아래는 러일정상회담이 있은 지 보름 정도 지난 뒤 나온 기사다. 미국 오바마 정권이 해킹 의혹과 관련해 러시아 외교관을 추방했다는 내용이다. 결국 트럼프 정권이 탄생했지만, 오바마는 끝까지 러시아에 제재를 가하려고 했었다. 알려져있듯 러시아 문제는 현재에도 트럼프 정권의 발목을 잡고 있다.



이처럼 서구세계에 대한 위협으로 평가받던 러시아 대통령을 아베는 자신의 지역 기반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영토반환과 맞물려 러시아에 대한 경제적 투자를 하겠다는 지침까지 거론되면서, 자칫하면 서구사회의 제재국면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는 말도 나왔다. 당시 푸틴은 공항에 도착하기까지 몇시간이나 지각을 했지만 아베는 극진히 맞아들였다.


악수하는 양국 정상. 출처: 일본 수상관저 홈페이지


미국으로서는 당연히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아래 극우이면서 친아베성향인 산케이신문 기사('일러정상회담 비화')는 당시 오바마와 아베 간 대화를 통해 어떤 분위기였는지를 전하고 있다.


양국(러일)정상회담 최대 벽은 미국이었다. "(정상회담을) 정하는 건 일본이지만 러시아와 교섭은 올바른 선택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오바마는 아베와 회담할 때마다 우려와 불신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아베는 늘 "이건 일러간의 문제다. 어떻게 해도 할 수밖에 없는 문제"라고 반론했지만, 미국측은 일본에 다양한 형태로 압력을 가해왔다.
5월에 오바마가 처음 히로시마를 방문했을 때도 "미일간에 우려스러운 건 러시아"라고 반복했다고 한다. 오바마와 푸틴의 관계는 험악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오바마는 국제회의에서 "(러시아와 대치하는)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대여하려고 한다"며 각국 정상을 놀라게 한 적도 있다. 동맹국 일본이 대러 포위망에서 빠져나가는 건 어떻게 해서든 저지하고 싶을 터였다.

어디선가 많이 본 구도가 아닌가 싶다. 


아베는 이 때 오바마에게 당한 느낌을 한국에도 가해보고 싶었을지 모르겠다. 외교는 '최대 이익의 다툼장'이라는 말도 있지만, 최소한의 기억 상실 만큼은 지적하지 아니할 수 없다. 불과 1년 2개월여전 서구 사회의 제재 국면과 '최대 동맹국' 미국의 반대를 뚫고 러일정상회담을 강행한 게 아베였다. 


그럼 성과는 어땠을까.


영토문제 관련해선, 섬 4곳에서 양국이 공동경제활동을 하기 위한 협의 '개시'에 합의했다. 결국 검토하겠다는 내용에 그쳐서 실질적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의료, 건강협력 지원이나 러시아 극동 에너지 인프라 개발 관련한 투자를 일본이 나서서 하겠다고 합의했다. 우크라이나 관련해서는 별다른 발언을 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러시아에 끌려간 회담이 돼버린 것이다.


당시 러시아는 친러파로 알려진 트럼트 정권 탄생으로 영토 반환을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트럼프가 나서서 제재를 풀어줄 것이란 소문마저 있었다(물론 현재 상황을 보면 쉽지는 않겠지만). 


게다가 최근엔 일본이 북한을 경계한다는 명목으로 미사일이나 요격시스템을 강화하면서, 러시아가 맞불을 놓는 양상마저 나타나고 있다. 아래는 올해 2월 7일자 보도다. 아예 군사기지화하면서 가뜩이나 북한, 중국으로 골치아픈 일본의 뒤통수를 치는 모습이다. 


러시아 입장에선 미군과 한몸이 된 레이더나 요격시스템이 대량으로 들어오면 그대로 두고 볼 수 없다.


자신의 실패한 외교에서 배운 경험을 아베는, 반면교사 삼으라며 한국에 전달하려는 걸까. 어찌 됐든, 본인이 단호하게 오바마에게 '이건 러일문제다'라고 얘기한 걸 상기한다면, 한미군사훈련에 훈수 둔 데 대해 면박을 당해도 별 할 말은 없을 듯 싶다. 외교란 그처럼 입장이 돌고 도는 거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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