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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N Apr 23. 2017

'오미야게' 문화의 힘

에도시대 '의무'로 시작됐던 일본 오미야게 문화에 대해

일본에 한 번쯤이라도 방문해본 사람이라면, 역과 공항에 있는 선물 상품의 양과 질에 감탄한다. 쿠키, 초콜릿부터 술, 기념 상품까지. 동일한 상품 내용이라도 브랜드가 다른 경우도 적지 않다.


일본어에서는 일반적으로 생일이나 기념일에 주는 선물을 '프레젠토(プレゼント)'라고 하는 데 반해, 어떤 특정의 지역성을 띤 선물은 '오미야게(お土産)'로 구분해 부른다. 한자로 봐도 알겠지만, '토산품'에 가까운 의미다.


아래 브런치를 운영하시는 분께서, 오미야게 리스트를 잘 소개해주셨기에 링크해본다.


이처럼 오미야게는 해당 지역을 상징하는 상품이다. 예를 들어, '도쿄 바나나'라는 과자는, 그 자체가 하나의 장르가 돼서 도쿄 대표 오미야게가 됐다. 다양한 지역에 그 지역을 대표하는 오미야게가 있는데, 교토에는 '야츠하시(八つ橋)'라는 찹쌀떡류의 음식이, 북해도에는 '하얀 연인(白い恋人, 시로이코이비토)'가 있다.


도쿄바나나의 변주된 상품들. 모두 도쿄바나나의 이름을 달고 있다. (출처: http://www.tokyobanana.jp/)



특히 시로이 코이비토는 엄청난 히트를 쳐, 일본 전국 각지에 복제품 붐이 일어났다. 아래 사진으로 확인해보자. 우선 원본 시로이 코이비토다.


북해도 명물 오미야게 시로이 코이비토


그 다음은 각종 복제품(?)들이다. 상품 위에는 '정말 좋아해'라는 각지의 방언을 적어놨다.


시즈오카노 코이비토
후쿠오카노 코이비토
시로이 오다이바
'오모시로이(面白い, 재밌는)' 코이비토! 오사카가 만담으로 유명한 것에 착안해 만든 상품

패러디일지, 표절일지 경계가 불분명하다. 실제로 몇몇 상품에 대해서는 북해도의 본사가 소송을 건 일(오사카의 오모시로이 코이비토)까지 있다고 한다. 시로이 코이비토 변형 상품에서도 분명히 드러나는 건 '지역색'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내 국외여행을 막론하고, 일본인과 다니다보면 가장 먼저 찾는 게 오미야게 상점이다. 오미야게 상점에 들어가 간단히 둘러본 후 귀가할 때 상품을 사는 게 일반적이다. 거의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지지난주에 야마나시현 이사와온천(石和温泉)에 다녀왔는데, 역시나 옆 바로 앞에 오미야게 상점이 몇 군데 있었다. 그다지 유명한 동네가 아닌데도 말이다. 진열된 상품도 한 눈에 다 안 들어올 정도로 많았다. 물론 야마나시의 지역 농산품(포도, 복숭아 등)이 돋보이게 상품화돼 있었다.


야마나시현 이사와온천(石和温泉)역 앞 오미야게 상점


코슈(甲州) 카스테라 상점. 코슈는 야마나시의 옛 이름이다.
다양한 카스테라 진열품들.


일본에 살거나 일본문화를 잘 아는 한국인이라면 상당수 오미야게 문화가 '귀찮다'는 말을 한다. 거의 의무적으로 주위 사람에 줄 오미야게를 '매번' 구입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처럼 출장가서 회사 동료에 줄 선물을 몇 개 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즉, '한국에는 없는 문화'라는 얘기다.


예를 들면 이런 정도다.


필자가 석사 과정(현재는 박사과정 중) 수업 중에 교토나 히로시마 등등에 갔다오는 동료 학생이 있었다. 그들은 다녀오면 반드시 지역을 대표하는 무언가를 돌리곤 했다. "~ 다녀왔다"는 말과 함께. 한국에서도 있을 법은 하지만, 그렇다고 의무감을 갖고 돌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하게도, 오미야게 문화는 그 나름대로 지역 경제에 일조하는 측면이 있다.


아래 닛케이의 관련기사는 오미야게 문화를 세계에 전파하려 하는 벤처기업을 소개하고 있다. 그 나름대로 경제적 의미가 있는 데 주목해, 세계에도 그 마케팅이나 포장의 방법 등을 전파하자는 취지다.



그렇다면 오미야게 문화의 기원은 무엇일까.


일전에 읽은 책 두권을 바탕으로 간단히 소개해볼까 한다. 참고한 책은 다음과 같다. 칸자키 노리타케 '에도의 여행문화', 카나모리 아츠코 '이세 순례와 에도의 여행' 두 권이다.


神崎宜武『江戸の旅文化』岩波新書

金森敦子『伊勢詣と江戸の旅』文芸春秋


에도 시대(1603~1868년) 이전부터 계층을 막론하고 일본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소망이 있었다. 일본 천황가의 발상지로 불리는 이세진구(현, 미에현三重県)로 순례를 가는 것.


실제로 경제가 발달한 에도 시대에 접어들면서 서민도 이세에 가는 일이 가능해졌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세에 가는 길 곳곳에 상점가가 생겨나고 숙박업도 발달했다고.


물론 그렇다고 해서 언제든 이세에 갈 수 있는 형편이 아니어서 곳곳에 '계(코, 講)'가 만들어졌다. 즉, '이세코(伊勢講)'가 조직되면서, 돈을 모아 단체 여행에 나선 것이다. 보통은 '일생에 한 번' 할 수 있는 경험으로 여겨졌다. 오랜 기간 돈을 모았을 터이다.


당시 유명한 길이, 도카이도(東海道)(오사카, 교토 등 간사이~도쿄)로서, 이 길은 일본 영주(大名)가 오간 길이면서, 조선통신사들이 에도로 향한 길이기도 하다. 현재에는 도카이도 신칸센과 도카이도선으로 일본 동부와 서부를 잇는 교통의 중요한 축이 되어 있다.


에도시대의 도카이도를 묘사한 우키요에풍 그림(歌川広重작). '강렬한' 호객행위를 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당시 이세코에 소속된 이들이 모두 이세 순례에 참여할 수 있던 건 아니었다. 그 때문에 순례 가는 사람이 다른 이들을 대표하는 형태를 띠기도 했는데, 이때 돌아올 때 전별금조로 받은 돈을 써 다양한 선물을 사왔다고 한다.


그 선물은 단순히 어디서나 살 수 있는 것이어서는 안되었고, 이세나 주요한 지역성을 띤 상품이어야 했다. "갔다왔다"고 말 할 수 있는 증명이어야만 했다. 여기서 오미야게 문화의 부흥이 시작됐다. 이세 순례객들을 잡기 위해 지역지역마다 물건을 팔기 위해 궁리를 했고, 그 덕에 에도의 상품경제가 발전했다고 한다.


또한, 이세 지역의 숙소, 즉 지금으로 말하면 료칸(旅館) 등은 애초 종교적 목적으로 설립됐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고도로 상업화됐다. 종교 제사를 주재하던 사람들(御師)은 어느샌가 숙소 지배인처럼 바뀌고 있었다. 숙소에 들어가면 공연과 진수성찬이 차려졌다.


에도시대 서민으로서는 그야말로 일생일대의 경험이었다. 당시 숙소에서 나오던 음식(저녁의 경우)을 간단히 소개해보자면,


과자, 떡국(雑煮), 국(吸もの), 해산물 요리(전복, 도미, 새우, 감자, 카마보코 등이 들어감), 큰 도미 한 그릇, 밥, 국, 사시미, 구운 생선 등등


그야말로 진수성찬으로, 이런 음식을 당시 서민들도 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숙소마다 때마다 메뉴는 달라졌다고 한다.


本膳이라고 쓰인 곳부터 第十一라고 쓰인 곳까지가 전부 메뉴 설명이다. 神崎宜武『江戸の旅文化』50~51페이지.


이세 근방의 저잣거리 모습(伊勢参宮名所図会)


(이 지점에서 볼 때, 개인적으로는 조선시대 경제 상황이 과연 에도 시대보다 나았는지 강하게 의문이 든다. 적어도 서민의 삶에 있어서는 에도가 최소한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게 현재 필자의 인식이다. 우리가 아는 조선시대라는 것도 실상은 사극 등으로 만들어진 데 기반하고 있으므로. 물론 임진왜란 등 전쟁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 이세 순례를 서민의 관점으로 쓴 소설 가운데 東海道中膝栗毛(도카이도추 히자쿠리게, 도카이도 도보여행, 1802~1814년)라는 작품이 있다.


두 남자 주인공이 등장해 에도에서 이세에 가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그린 소설이다. 시대상에 대한 풍자와 함께, 각종 사투리로 인한 희극적 상황(지역색에 따라 서로 비방하는 모습도 나온다) 등이 생생하게 나온다.


2년전, 고전 일본어를 공부하면서 일부를 읽어봤는데, 에도의 경제력과 문화적 상황에 감탄한 기억(충격?)이 여전히 가시지 않는다.


당시에는 이세 순례를 위한 가이드 북 같은 것도 유행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길가의 풍속업소 서비스 같은 것까지 품평했다고 하니, 문화의 발달 정도를 알만하다 하겠다.


다소 옛날 얘기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일본의 전근대 역시 개인적으로는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고 본다. 조선보다 앞선 근대화로 '갑작스럽게 뜬' 나라가 아니라는 얘기다. 기본 체력이 없었다면 근대화에 성공할 가능성은 더 낮았을 것이고, 중국이나 조선처럼 힘없이 무너졌을지도 모른다(물론, 서양이 일본에 대한 일정 기간 간섭을 줄이는 등등 많은 우연도 있었지만).


최근에는 한국에서도 조선시대를 좀 더 객관적으로 보자는 연구가 속속 나오고 있다. 단순히 조선시대에 큰 발전이 있었다, 자본주의의 씨앗이 있었다는 수준을 넘어서, 즉 민족주의에 호소하는 전략을 넘어서는 연구가 어느덧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인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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